뮤지컬, 결국 음악의 힘
스포티파이를 깔고 나서 초창기에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알게 된 아티스트가 벤 플랫(Ben Platt)이었고, 그의 첫 정규 앨범 <Sing to Me Instead>가 딱 내 취향이어서 한동안 열심히 들었었다. 그때까지는 그가 뮤지컬 배우인지도 몰랐다. 이후 넷플릭스에서 영화판 <디어 에반 핸슨>을 봤는데, 음악이 정말 좋았고, 목소리가 낯익었다. 그때 ‘그 배우’가 ‘그 가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영화판 OST도 지겹도록 들었다.

라이센스판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실 <팬텀싱어4>을 통해 익숙해진 박강현이나 임규형 버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일정의 캐스트가 김성규였고, 원래 배우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기에 그냥 김성규 버전을 봤다. 배우 김성규의 작품은 처음 봤는데, 극소심 캐릭터를 정말 잘 소화해냈다. 혼자 중얼거리거나 불안증 때문에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목, 그리고 가성을 자주 넘나들어야 하는 고난도의 미성 창법이 훌륭했고, 감정 표현도 흠잡을 데 없어 몰입감을 주었다. 내가 본 날의 캐스트는 대체로 완벽했는데,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조이 머피 역의 홍서영 배우가 하이틴 캐릭터에 맞지 않게 너무 원숙하면서도 전형적인 뮤지컬 창법이라 약간 거슬렸다. 부모님과 함께 노래하는 대목(“Requiem”)에서 혼자 튀면서 다소 노티나는 느낌이 있었다. 래리 머피 역의 장현성 배우도 연기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으나, 혼자 꽤 많은 분량을 노래해야 하는 “To Break In A Glove”에서는 확실히 한계를 보였다. 뮤지컬에서 ‘나 지금 노래 부릅니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영화 버전으로 볼 때도 느꼈지만, 뮤지컬 버전에서도 다시금 느끼는 부분은 역시 뮤지컬은 음악의 힘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스토리라인이야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고, 시련을 통해 소년은 성장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가리킨다. 스토리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2시간 동안 관객들을 붙들어 매어 웃기고 울릴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극의 특성상 스토리가 비약적으로 도약해야 할 때, 혹은 논리적 연결 고리가 엉성할 때 그 틈을 메워주는 것은 결국 음악일 수밖에 없고, 이 작품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음악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다. 대표적인 대목이 식탁신(“For Forever”), 레퀴엠(“Requiem”), 그리고 연설신(“You Will Be Found”)이다. 어떻게 저렇게 엉성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수가 있지라는 의문은 에반의 노래 속, 과수원에서 아름다운 두 소년의 우정이라는 멜로디와 음색에 파묻혀 이내 사라지고 만다. 뮤지컬의 성공도 실패도,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뮤지컬의 본질은 음악이고, 좋은 음악은 모든 실패를 용서한다. 심지어 작품이 죽더라도 좋은 음악은 영원히 남아 닳도록 불리고 연주된다.
물리적 요소로는 다양한 크기의 스크린 활용도가 탁월했다. SNS 시대에 맞게 디지털 기기 화면이 되기도 하고, 실내 공간 연출에서는 여러 크기의 창문이 되기도 하고, 실외 공간에서도 공간적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투영하는데, 상황 전달력이 뛰어났고, 몰입도 방해하지 않았다. 동시대적 현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한 소통이라는 장치를 배제할 수가 없는데, 무대 연출에서 이 같은 디지털 스크린의 활용은 앞으로 더 활발해질 것이다. 다만 이러한 추세가 독창적 무대 연출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약하고 획일화할까 봐 우려스럽기는 하다. <라이언킹>의 무대 연출이 찬사 일색이었던 이유는 디지털 기술 없이도 그 이상의 실감 나는 효과를 구현해냈기 때문이었다.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에 휘말리게 된 한 극소심한 소년의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말을 다루며 관객들을 효과적으로 웃기고 울린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야 가장 유명한 곡의 가사처럼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야, 네가 어디에 있든 우린 너를 찾을거야.’겠지만 내게는 한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대하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그보다 먼저 와닿는다. “나는 너를 추모하지 않을거야”라는 말은 ‘나는 아직 너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어’라는 뜻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는 추모 받을 자격도 없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제삼자로서는 후자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르나 가족 간의 사정이란 말 그대로 그 구성원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족 간의 내밀한 상처와 그들만의 속사정이란 말 그대로 이해 가능 영역을 벗어나 있다. 그 사정을 보편적 윤리라는 단일한 잣대, 혹은 생산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회적 최소 단위체에 대한 규율이라는 잣대로 바라본다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중의 또 다른 고통 속에 밀어 넣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각자의 사정을 고유한 맥락 속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묵묵히 안아 주는 것, 그것이 에반의 어머니 하이디가 보여준 성숙한 위로의 방법이다(“So Big/So Small”). 오래 보고, 가만히 들어주고, 혼신으로 안아 주며 마음 깊숙한 곳에 닿는 한 마디, 그런 위로는 요즘같이 빠르게 휙휙 돌아가는 시대에 정말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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