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

진실과 껍데기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는 진실과 껍데기 사이의 간격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 최종적 심급에서 모든 의사결정과 행동거지를 좌우하는 진실이라는 국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람에 따라 두터운 껍데기에 꽁꽁 싸여 철저한 보호 대상으로 관리되고 있을 수도 있고, 아주 투명한 막으로만 둘러쳐져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존재감을 언뜻언뜻 내비칠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진실과 껍데기의 간격은 가까울수록 좋다. 껍데기가 아예 없는 편이 본인에게는 가장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정말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아마 이 사회의 생명관리 정치에서는 그를 ‘미친놈’으로 분류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또한 비극이다.

오늘날 많은 사회적·정신병리적 문제들이 어찌 보면 진실과 껍데기의 간극에서 기인한다. 진실을 덮기 위해 동원한 껍데기가 어느 정도는 규범화된 사회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해 주겠지만, 그 간극이 벌어져서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껍데기는 부식되고 바스러져 솜털 가득한 진실이 그 취약한 맨살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스로,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내 진실이 사회적 규범과 일치한다면 문제될 일이 없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계속되는 자아분열을 감내하던지, 아니면 사회적 규범에 맞서 도전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

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한강 작가는 진실과 껍데기 사이에 극단적으로 틈이 벌어진 인물들의 표상을 군데군데 참 많이도 배치해 놓았다. 군대에서 사고로 손가락 끝이 날아간 외삼촌은 온갖 기행 속에서도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어머니는 누구나 부러워할 가정의 외형을 갖췄음에도 남편과 자식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사회적 관계와 가식적 미소와 쇼핑에 집착한다. 아버지는 근엄하고 교양 있는 지식인이자 다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사랑 없는 결혼이었고, 조건 보고 결혼한 기회주의자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혔다. L은 청소년기에 겪은 가정 내 성폭력과 어머니의 방임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식과 구토가 반복되는 거식증의 수렁에 빠진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기형적 왼손을 달고 태어난 H는 성장 과정에서 ‘정상적인’ 다섯 손가락과 완벽한 외모와 직업적 성취까지 달성했음에도 여전히 ‘육손이’ 시절의 상흔에 시달리며 공허한 가면을 쓴 여인으로 살아간다.

장운형은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내면에 도사린 진실의 존재 여부 자체를 믿지도 않는 인물이다. 그러한 기질은 어느 정도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예술가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냉소와 거리감이라는 기질은 어느 정도 선험적으로 주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성장 과정에서 만난 극단적 인물들, 즉, 진실을 감추기 위해 바둥거리는 인물들을 보면서 누군가의 진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것이 설령 존재한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사고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그럴싸한 진실을 기대하지 않는 기질은 고모의 돈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고, 그것을 해명하려 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그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신념으로 굳어진다. 그토록 절단된 손가락 끝을 감추려 애썼던 외삼촌의 주검 앞에서, 이제는 그 무엇도 감추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뻗은 육체 앞에서 그제야 그토록 궁금했던 절단된 손가락을 원 없이 바라보며, 고작 이것이 그가 감추려 했던 전부인가? 라는 허무함을 맞닥뜨린 장운형에게 진실과 껍데기의 이중주는 그야말로 덧없는 몸부림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라이프캐스팅이라는 방법론에 천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 손을 뜬다.
타인의 손을 직접 떠내는 것이다. 물론 라이프캐스팅은 내 손으로 하므로, 나의 ‘솜씨’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어느 정도 내 감정을 불어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타인의 손이다.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든 조형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내 체온과 냄새는 결코 빨려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90p

누군가의 살결, 주름, 체모까지 있는 그대로 외형을 떠낸다는 점에서 라이프캐스팅은 인간의 물리적 실체에 무엇보다도 육박하는 방법론이다. 동시에 창조 행위로서 라이프캐스팅은 작가의 터치를 최소화하는 재현이므로 작가 자신의 불안, 걱정, 치부 따위를 어느 정도 감추게 해준다. 육체와 석고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라이프캐스팅 작업은 그 매체적 특성 자체로 진실과 껍데기의 관계를 은유한다. 또 타자의 물리적 실체를 고스란히 영속화하여 소유(심지어 예술가 본인의 관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하고자 하면서도 자기 본질은 철저히 감춰두고 싶은 예술가의 이율배반적 욕망도 암시한다.

작가는 아마도 본인과 닮았을 장운형이라는 인물을 경유로 자기 인생관을, 그리고 진실을 묻어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을 펼쳐 놓는다. 특히 타자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삶을 일관되게 옹호하거나 섬세하게 표출하는 태도에서 그것이 곧 작가 자신의 인생관임을 알 수 있다. “기대할 필요 없는 걸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160p)”, 그리고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난 실망하지 않아(301p)”라는 말은 장운형이 들은 말이지만, 이 문장은 묘하게 작가의 목소리로 들린다. 중심인물인 장운형도 외삼촌, 어머니, 아버지, 고모 등 주변 인물로부터 받은 상처와 기대 불일치를 통해 관계로부터 초연한 삶의 자세를 내면 깊숙이 체득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기대를 접은 인물들은 결국 연대하고 공감할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 새 삶을 그려 나가지만(혹은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암시되지만), L처럼 언젠가 자신을 총체적으로 사랑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인물은 반복되는 고통의 사슬 속으로 영원히 침전한다.

물론 작가는 사회적 문제에 직면해 공론장에서 인류의 고통에 대한 대안으로 공감과 연대를 말하지만, 그런 사회적 목소리가 아닌 사적 삶 차원에서 작가는 아마 누구보다도 기대가 없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 일게다. 그가 작품에서 촘촘하게 그려낸 기대가 없는 사람들의 유난스러운 생동감이 그러한 삶의 자세를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운형이 L에게 차려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끈한 밥 한 공기는 초연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의 위로이고, 한갓된 기대와 번뇌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독자들에게 작가가 슬며시 두고 간 작은 선물이다.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313p).” 탈의 투명도만 서로 다를 뿐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진실을 마냥 묻어두고 껍데기로 칭칭 감아 덮어두기만 한다면 언젠가 탈이 난다. 그것이 아무리 못났다고 한들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긍정할 방도를 찾거나 최소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럴싸하게 합리화라도 한다. 그래야 산다.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

늘 베스트셀러를 적극적으로 우회하는 나는 「채식주의자」 열풍일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강의 작품을 피해 왔다. 그래서 그가 어떤 작가인지 논할 자격조차 나에겐 없지만, 최근 한강이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에 개입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적잖이 실망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한강의 작품을 읽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동거인의 강력한 추천이 떠올라 여행길에 이 책을 들고 나섰다. 장운형, H, 그리고 작가와 공명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인생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을 때 묘하게 서로를 밀어내게 되는 불편감을 느꼈다. 이 또한 유익한 문학적 경험이니, 참 훌륭한 작가, 참 좋은 작품임은 분명하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일 뿐이지 그것이 작품의 향배를 영원히 결정할 수는 없다. 하나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탈고한 인물이 작가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수한 선행적 텍스트와 작가가 속한 사회, 경제, 문화적 구조에 단단히 결속되어 잉태되는 복합적 산물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독자를 통해 사후생을 얻고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에 내던져진다. 담론의 장에서 작품은 새 생명을 얻어 재탄생하며 영속성을 얻게 된다. 좋은 작품이란 역사의 큰 흐름에서 결코 완결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한강 작가가 소위 ‘뜨지’ 않았더라도 비평에 개입했을까? 자기 데뷔 작품에 대한 비평에도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했었을까? 오늘도 진지한 비평 한 줄이라도 얻겠다고 (작가 자신보다 한참 부족한) 온갖 얼치기 생계형 비평가들 앞에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신진 예술가들이 즐비한데, 문학계 금수저를 쥐고 태어난 작가가 ‘저자의 죽음’과 비평의 자유라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우리 동시대 문화를 그 어느 때보다 비옥하게 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모더니즘의 구습을 지난날의 한낱 껍데기로 전락시킨 이 새로운 지평─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장운형이 H의 굳게 다문 왼손을 쫙 펴고 그 손가락과 상흔을 하나하나 쪽쪽 빨았듯, 또 그로 인해 H의 최종적 심급에 도달해 새로운 관계성의 지평이 활짝 열렸듯, 영원한 성역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곳은 누군가의 사려 깊은 관찰과 방문과 대화를 통해 비로소 열린 성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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