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으로 말할 방법은 분명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예술을 완전히 뒤집는다!”라는 도발적인 캠페인 문구를 달고 있는데, 내 경우 사실 딱히 뒤집히는 것이 없었다. 저자가 새로 찾아낸 정보란 거의 없고, 그나마 얄팍한 정보도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골자도 사실 내 평소 지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예술에 관한 통념이 뒤집힌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반 고흐의 비극적 삶’과 ‘피카소의 위대한 혁신’, 그 사이 어딘가에 여전히 묶인 사람일 터다. 적어도 나는 저자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공감을 보낸다. 허나 너무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는 사람의 책을 읽으면 공감 자체의 쾌는 있을지 모르되 새로 얻어갈 것은 별로 없다. 이 책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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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의 골자는 이러하다. 일단 미술계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정성이나 기술 같은 가치는 고리타분한 옛말이 되어 버렸고, 작품 이면의 개념이나 철학이 우선시되다 보니 뭔가 좀 아는 말쟁이들이나 지갑을 여는 사람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어떤 작품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거의 없으나, 그저 동조 현상에 의해 다수가 대단하다고 하니까 덩달아 대단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위대한 조건들이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작품에서 위대한 요소들을 애써 찾아나가다 보면 뭐라도 위대한 요소들이 계속 발견되고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시뮬라크르와 상호텍스트성이 서로를 잡아당기며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위대한 작가와 위대한 작품의 신화를 계속 찍어내게 된다.
본질은 파워게임이다.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는 작품 앞에서 개념을, 화두를, 작품의 소유권을 선점한 사람이 모든 담론을 주도해 나간다. 미술계는 미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해 두려움을 느끼는 자의 비대칭적 권력 구조를 동력 삼아 돌아간다(나는 이 대목에서 내가 운영했던 아마추어 미술사 연구회 ‘모두의미술사’를 떠올렸고 처절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권위에의 호소, 그리고 극장의 우상─ 쉽게 말해 분위기로 조지면 누구라도 쉽게 넘어온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도 고색창연한 미술의 전당에 가져다 놓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뭐라도 의미가 생겨난다.
지식과 자본의 최상위 계층은 서로 짬짜미로 결탁해 미술계를 함락한다. 무지가 탄로 나리라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해 그들을 뜻하는 바대로 조종하기는 너무나 쉽다. 미대 갓 졸업한 얼치기라도 대기업 회장님이 작품 한 점 사주거나, 유수의 갤러리가 보증 서주면 일약 스타작가로 등극할 수 있다. 반면 수십 년간 한 우물만 판 대가라도 ‘자본-권력 연합체’에 찍히면 파던 그 우물에 바로 묫자리를 봐야 한다.
이처럼 미술 애호와 신봉의 공동체는 계급론의 철저한 지배를 받는 세계다. 먹고살기 바쁜 사람은 미술에 줄 관심 따위가 없다. 미술 애호와 소장은 그 자체로 잉여 시간과 자본을 증명하는 보증서가 된다. 자본가나 권력자가 원래 미술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체로 속내는 자기 잉여를 증명하려고 애써 미술을 좋아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동경하는 나머지 다수는 동조하기 위해 덩달아 미술을 좋아하는 척하거나, 척하다 보니 실제로 좋아한다고 믿게 된다. 예술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짜 쾌와 거짓된 우월감 섞인 쾌는 습자지 한 장의 차이라서 그 누구도 명쾌히 구분할 수 없다. 그 동조자들을 위해 늘 정제된 미감과 해석이 하사되듯 주입되고, 이러한 주입의 장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각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귀담아들어 주는 곳도 거의 없고 들리더라도 애써 한 귀로 흘려보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고의 작가는 최고의 사이비종교 교주와 거의 동격으로 군림하면서 무결성과 무오성을 자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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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차 작가인 저자는 그간 꾹꾹 눌러 담았던 억하심정을 이 한 권의 책에 토해냈다. 나름 좋은 대학교 나와서 전시도 꽤 했지만, 돌이켜보면 미술계에 딱히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무명의 예술가라는 지긋지긋한 꼬리표는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이고, 어느덧 예술적 산물이 아닌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현실의 막막함이 끌 아닌 펜을 들게 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작품도 구리고, 성실하지도 못한 저 누군가는 이렇게 잘나가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내가 스스로 가장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 작업이 문제일까,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내 작품을, 아니 심지어 나 자신을 바꿔야 하나,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과 자괴감 속에서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답답함이 응집되어 그로 하여금 무슨 말이라도 토해내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브런치에 쌓이고 쌓인 글들이 이 책으로 엮였다.
작품 외적으로라도 이렇게나마 돌파구를 찾은 작가들은 그래도 건강한 편이다. 가슴 속에 쌓인 응어리는 언젠가 곪게 마련이다. 곪기 전에 어떻게든 풀어낼 방법을 찾아야 함은 비단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갤러리와 후원자와 심사평가기관에 가감 없는 직언을 날려줄 작가도 우리에게는 분명 필요하다. 다만 언젠가 그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활자가 아닌 작품에 눌러 담기를, 그 이야기가 별도의 설명 없이도 작품을 둘러싼 대기에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를, 그리고 그 과정을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봐 줄 사려 깊은 눈이 거기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작가의 말이 가장 깊은 심연까지 도달하게 하는 매체는 작품이다. 이 주장이 작가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꼼수로 비칠까 걱정되지만, 유구한 미술사의 좁디좁은 수장고가 말이 아닌 작품만을 위해 그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어쩌겠는가? 작품이 앞선 작가의 사소한 말들은 아카이브로 들어갔지만, 말이 앞선 작가의 위대한 작품들은 소리소문없이 잊혔고, 그래서 우리는 후자의 예를 들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 나아가 ‘이 세상이 기다려 온 작품’을 절충시킬 방법은 분명 어딘가 있다. 지금 눈앞에 명징한 윤곽선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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