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미술사에서 간과되었던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의 작품활동과 생활상을 추적한 연구서다. 재일조선인 3세인 연구자가 자기 박사학위 논문에 살을 붙여가며 대중서로 펴냈다. 연구자들이란 자기 정체성이 투영된 연구에 가장 몰입하는 법이다. 학술적으로 검증된 사실이 거의 없고, 자료도 부족하고, 관련자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는 시점에 저자는 반드시 그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이 작업을 완수했다. 이미 일본이나 한국 미술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몇몇 대가들은 제쳐두고,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만 알음알음으로 알려진 예술가들을 한 명씩 조명하여 그들의 발자취와 작품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의 작품 외적인 생활상을 조명하고 서로 어떻게 교류했는지 밝히고자 애썼다. 자신을 위해 인터뷰 시간을 할애해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작업을 완수해야만 했었다는 그 사명감에 대해 저자는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런데 그 강조가 과한 측면도 없지 않다. 6장은 전체를 구술사 방법론의 가치와 에피소드에 할애하고 있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면, 방법론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법이다.
전반적으로 미술사 서술치고는 자의식이 많이 개입되는 편이다. 연구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한다거나, 인터뷰 대상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강조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성리식과의 인터뷰를 감상적으로 회상하는 장면은 특히 KBS 인간극장의 한 장면처럼 감성적으로 편집됐다(157p). 역자들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학술적인 부분은 덜어내고 부드러운 문체로 옮기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저자의 자의식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다. 미술사는 필연적으로 평가를 내포하고, 평가는 저자의 주관에 오롯이 기대므로 미술사 서술에 저자의 자의식이 개입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서의 외형을 띠고 있고,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독자가 여기 언급된 작품들의 원화에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저자의 자의식적 개입과 중재에 대해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읽어야 할 필요성도 있다.

모든 이야기는 「재일조선미술가화집」에서 시작한다. 1962년에 재일본조선문예미술가동맹 미술부에서 내놓은 화집이다. 이 책은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이 결성한 단체가 그들의 조국에 보낸 공식적 기록물이므로, 이 연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을 어느 정도 해소해준다. 즉, 누구를 ‘재일조선인미술가’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준다. 물론 나같이 삐딱한 독자들은 단체 활동을 하지 않은 예술가들은 간과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단체에 속한 기록이 존재하는 예술가들도 여전히 안개에 덮여 있는 마당에 연구의 범위만 무작정 계속 확장하는 것도 무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다만, 그 미지의 영역에도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와 그들을 탐색해보는 향후 과제 정도는 언급할 필요도 있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이미 의미 있는 향후 과제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단체의 범위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한 예술가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화집」에서 출발한 연구라는 점, 그리고 그 화집을 출판한 단체가 상당한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의 장르적 다양성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단체에 소속된 예술가는 아무래도 사회적 교류 속에 단체나 다른 회원이 기대하는 작품을 할 가능성이 크고, 대외적으로 공개되는 선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대체로 노동당에서부터 정해 내려온 장르적 귀속성,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단단히 결속된 작품들이고, 그러한 ‘테마제작’ 관행을 밝히는 것은 이 연구의 주요 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추측건대 재일조선인 예술가가 모두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만 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면, 그리고 예술가들이 공개하지 않은 작품들이 추가로 발굴된다면 좀 더 자유분방한 표현과 주제들이 드러날지 모른다. 저자는 총련계 예술가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없었다는 인식은 크나큰 편견이라고 답답해했지만(43p), 정작 우리의 그런 무지몽매한 편견을 부숴줄 만한 작품의 실례는 제시하지 않았다.

시절이 하 수상하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포용력과 수용성은 점차 증대되고 있다. 미술사의 경계도 단순히 국경의 틀에 갇히지 않고 확장되는 추세이다. 잊힌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들이 한반도의 예술가들과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나아가 동시대 우리 공동체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시도도 늘어나고 있다. 비록 난데없는 ‘두 국가론’이 판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북한의 예술가들과 작품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언젠가 그들이 우리 예술가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예술가, 혹은 그밖에 제3국의 조선인 예술가들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동화되어 우리 자신마저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걱정은 이제 접어둘 때가 되었다. 빌보드차트 1위는 물론, 노벨문학상도 배출하는 나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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