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오분의일공모선정작가

투명한 사람들의 투명한 이야기들
KTX 광명역을 나서면 맞은편에 AK플라자가 보이고, 그 주변에 어반브릭스라는 상가가 둘러쳐져 있다. 외관만 봐서는 역세권 주상복합아파트 상권의 먹자골목을 끼고 있는 그 건물 4층에 갤러리가 있으리라고는 좀처럼 짐작되지 않았다. 거기 광명 기반의 예술프로젝트 그룹인 ‘예술협동조합 이루’가 운영하는 문화예술 공간이 있다. 현재 최경아 작가의 「이야기가 그린 초상」 展을 포함해 두 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 단체가 그간 무슨 활동을 해왔는지는 모르나 문화예술의 접점이 이렇게 일상적 공간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예기치 못한 미적 경험을 빚어내는 현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지방에도 이런 단체와 공간들이 활성화되어야 할 터인데…
최경아 작가는 10명의 주변 인물과 인터뷰한 결과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10점의 작품을 이번 개인전에서 소개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시발점이 된 인터뷰는 별도의 책으로 엮어 전시장에 비치해 두었다. 그러니까 이 전시는 10점의 회화를 보여주는 일회적 개인전이면서 10명의 인물과 인터뷰한 결과가 이어진 최종 결과발표회 성격도 지닌다. 또 여기 놓인 인터뷰집이 텀블벅에 공개되어 올해 12월까지 펀딩이 진행될 예정이니, 이 책이 인쇄소에서 찍혀 곳곳의 후원자들에게 도달할 시간까지 감안하면, 이번 전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재진행형 프로젝트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다. 2023년 9월에 인터뷰이 모집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반환점을 돌아 활자를 타고 곳곳에 퍼져 나갈 것이다.
작가는 먹기, 식탁, 음식을 매개로 삶의 여정과 가치관을 들려줄 10인을 모집했다. 인종, 성별, 연령이 제각각인 독특한 개성의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았는데, 일부는 공개모집으로, 일부는 지인 추천과 ‘알음알음’으로 모집했다. 먹는 행위는 생물학적으로 보편적이지만, 그것의 구체적 양상과 의미 부여는 사람마다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에 속해 살아간다. ‘먹고 사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쟁점이니, 그것에 엮인 사회·문화·개인적 조건을 둘러보고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영원한 주제 중 하나가 될 것이고, 작가는 이 주제에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했다.
나는 인터뷰집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니, 그저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작가는 인터뷰한 인물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추상적 초상화로 풀어냈다. 미색의 여백이 두드러지는 은은한 화면에 체세포 같은 비정형의 덩어리가 떠다니기도 하고, 꽃과 풀 같은 자연물 모티브가 직간접적으로 암시되기도 하는 화면은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그저 구성(composition)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누군가의 얼굴이 암시된다. 분명 그저 독립적 물질들일 따름이지만, 그것이 구성된 전체적 조화 속에서 누군가는 은은한 미소를, 누군가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누군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다. 이 이미지는 우리 뇌 하측두피질 어딘가에 자리 잡은 방추형 얼굴 영역(FFA: Fusiform Face Area)을 건드린다. 시각 대상의 얼굴과 표정을 인식하는 독특한 부위다. 우리는 이 영역을 통해 누군가의 고유성을, 그리고 그 사람의 정서 상태를 매우 빠르고 직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 그 인식을 통해 대상에 대한 접근과 회피 수준을 본능적으로 결정한다. 이 인식능력은 뿔도 털도 날개도 송곳니도 없는 우리 종을 유구한 세월 동안 지구의 지배자로 만들어 준 고도의 인식 메커니즘 중 하나다. 그리고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벽지나 커튼의 불규칙 패턴 속에서도 기어코 누군가의 얼굴을 발견하게 하고야 마는 얄궂은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작가는 본인이 인터뷰한 인물들로부터 받은 인상,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냈다고 하지만, 그것이 회화적 형식의 영역에서 해내는 일은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람객과의 밀당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밀당은 방추형 얼굴 영역의 변두리를 은은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절묘한 완급조절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얼굴을 암시하되, 대놓고 얼굴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관람객이 더 넓은 상상력의 영토로 발을 디딜 가능성을 가로막게 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얼굴과 무관한 형태만 내걸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관람객의 FFA에는 아무런 전기적 신호도 도달하지 않는다. 작가는 얼굴 암시 수준 70%의 작품과 20% 남짓의 작품을 작은 전시장에 나란히 걸어 두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명백히 얼굴을 암시한 하나의 작품을 본 후 상당히 추상화된 그 옆의 다른 작품도 아마 그런 맥락의 작품이겠거니, 하는 합리적 추론을 거쳐 전체 작품을 초상화로 인식하게 된다. 모든 작품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주 적정한 수준으로만 누군가의 얼굴을 암시해야 한다는 것은 회화적 구성에 있어서 작가의 최대 고심이었으리라. 결과물을 보면, 최대한 절제된 구성 속에서 적재적소에 배치된 물질과 선을 통해 그 고심은 어느 정도 빛을 본 듯하다. 허나 이 완급조절의 맥락에서 작품 하나하나의 제목이 군더더기 없이 모델의 실명이었다는 점은 다소 직관적인 암시였다. 인터뷰집에서 인터뷰이들 각각의 특성과 중심 주제를 간략한 소제목으로 정리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특징을 미적으로 함축한 다른 표현을 제목으로 썼다면 암시의 수준이 좀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작품의 판매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대단한 유명인사의 초상화가 아닌 이상,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이름 그 자체가 제목인 작품을 우리집 거실 벽에 건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니까…)



끝으로, 이 작품들의 사회적 의미가 어디까지 닿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먹는 행위에 얽힌 경험과 가치관을 동시대적 삶의 다양한 양태와 연관지어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오늘날 삶의 조건들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겠지만, 여기 모인 인물들이 그 동시대적 다양성의 지층에서 얼마나 깊은 심연까지 건드리고 있는지는 들여다볼 일이다. 나에겐 여기 모인 10명의 인물에 대한 인구통계학적 정보가 없지만, 대체로 견실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로 보인다. 나름의 역경과 슬픔과 아픔도 있었겠지만, 삶을 긍정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크게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로 보인다. 무엇보다, 적어도 자기 얼굴과 실명, 그리고 주요 활동 본거지를 인쇄 매체로 드러내기에 동의한 ‘투명한 사람들’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는 작가의 모집 방법론, 즉 공개모집 방식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작가가 직접 알음알음으로 캐스팅한 사람들에도 공개모집에 응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정 기준이 적용됐을 것이다. 작가는 미세 플라스틱 걱정이 없는 친환경 안료를 이번 작품에 처음으로 적용해서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가볍고 투명한 느낌으로 표현됐다고 했는데, 이 매체와 기법이 인터뷰이들의 모집 속성과 묘하게 맞닿는 지점이 있다. 그렇게 모인 ‘투명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물론 이 시대를 이해하는데 가치가 있겠지만, 사회구조적으로 강요된 불투명한 삶 속에서 먹는 행위에 어떤 가치나 신념을 부여할 겨를조차 없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동시대 다양성의 지층을 한층 더 두텁고 촘촘하게 그려보고자 한다면, 달리 소통 창구를 가지지 못한 그 ‘불투명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초상이 될 자격을 부여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불투명한 사람들은 공개모집에 응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집요하게 찾아가서 손을 내미는 자에게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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