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종교·제도적 맥락에서 본 유럽의 과학전통, BC 600~AD 1450
David Charles Lindberg, The Beginning of Western Science: The European Scientific Tradition in Philosophical, Religious, and Institution Context, 600 BC to AD 1450
“역사가의 본업은 과거를 이해하는 일이지, 과거에 등급을 매기는 일은 아니다(571p).”
그 시대의 눈으로,
나는 중세 미술을 이야기할 때 대성당에 걸린 제단화로 시작하곤 한다. 멀티미디어의 시각적 스펙터클에 익숙해진 현재의 눈으로 그 당시의 작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세 미술이 왜 그렇게 어색하고 뻣뻣하게 생겼는지 이해하려면 그 당시 성직자와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중세 종교화는 실제의 물리적 세계를 재한하는 기능이 아닌, 당대 종교 및 정치의 교화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데이비드 C. 린드버그(David Charles Lindberg)의 명저 「서양과학의 기원들」은 과학사의 영역에서 ‘당대의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풀어냈다. 참고문헌을 빼고도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대작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근대의 여명기까지 서구 과학사를 가로지르며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보지 말라고 끊임없이 상기한다.
점성술이 대표적인 예시다. 화성에 탐사로봇을 보내고, 육중한 발사체가 역추진해서 자기 발사대로 되돌아오는 경이로운 우주 탐사의 시대에 점성술사들은 그저 머나먼 한 때에 혹세무민하던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세의 점성술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당시에는 그것을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예로부터 기상 조건은 사냥과 농업에 영향을 미쳤고, 급격한 기후 변화를 예측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늘에 뜬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은 기후 변화를 예측하는 가장 손쉬운 지표였고, 큰 틀에서 그러한 추정은 오늘날까지도 일부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그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별의 위치가 계절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연약한 자연 속 한 점에 불과한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으리라는 생각이 어찌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류가 점성술을 믿었던 시간에 비하면 그것을 폄하한 시간은 극히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현재 천체의 운행에 대해 밝혀진 사실들에 기초해서 중세의 점성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점성술은 심지어 의학과도 연관되었다. 고대 의서들이 활발하게 번역되고, 심화된 주석서가 편찬되고, 의과대학이 제도적으로 자리를 잡은 14세기에도 의학서에는 점성술적 방법론이 버젓이 기재되었다. 특정 병증이 특정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거나, 특정 별자리에 맞추어 수술 날짜를 잡는다거나, 심지어 흑사병 같은 대재난이 별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이 제도권 의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당시로써는 합리적인 사고의 흐름이었다.
중세를 그저 암흑시대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도 문제다. 물론 기독교 권력이 고대의 눈부신 사상적·과학적 발견들을 교리의 틀 안에서만 재단하려 하면서 자연철학의 발전을 상당 부분 지연시킨 것은 사실이다. 교회 권력은 교리에 복무하는 주제와 결과만을 허용했다. 그러니 당대에만 가능했을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만한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중세가 고대의 모든 성취를 무덤에 처박아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번역과 주석 작업은 계속 이어졌고, 고대와 이슬람 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을 기독교 교리와 융합시키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또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제도권 교육 체계가 기틀을 잡았고, 이를 통해 후진 학자들이 계속 양성되었다. 인문주의의 싹이 피어올랐을 때, 중세의 학문적 기틀 위에서 새로운 과학의 방법론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빠르게 지식이 성숙하고 확산해 나갔다. 중세에 실험과 경험에 의한 새로운 지식의 발견은 미미했지만, 중세가 지식 문화와 인프라를 철저히 예비하지 않았다면 갈릴레오(Galileo Galilei)의 성취는 실제 그것보다 훨씬 더 후대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치환하는 관점은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를 좌장으로 하는 르네상스 예찬론자들에 의해 부풀려진 바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점을 둔 연구 주제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 전 시대를 낮춰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가 승자의 역사, 즉 ‘휘그적(Whiggish) 입장’으로 굳어져 왔다. 고대의 전승에 의구심을 품고 그것을 새롭게 실험해 본 르네상스 과학자들이 존경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중세인들이 미개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선택했다. 신의 존재와 작용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직접 확인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우주의 모든 행성이 원운동을 하리라는 믿음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미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멀게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까지 이어진 오랜 믿음이었다. “우리는 중세 학자들이 중세에 살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근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헐뜯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585).”
이렇게 특정 시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은 단절론적 역사관으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역사에는 완전한 단절도, 완전한 연속도 없다. 단절과 연속은 복잡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교차한다. 그 흐름을 단절/연속으로 보는 것은 해석자의 마음에 달렸다. 예컨대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의학의 꽃이 피었다고 한들, 신에게 길흉화복을 의탁하는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의학적 처치와 기복적 신앙은 동시대에 나란히 함께 갔다. 반대로 교회 권력이 모든 것을 장악한 중세에도 의학의 발전은 계속 이어졌고, 그 효용성도 신의 영향력과 함께 인정되었다. 오히려 의학의 발전이 종교적 축복의 현실적 증거 중 하나로 해석되었다. 즉, 독실한 중세인들이 의술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의술과 신의 기적을 함께 믿은 것뿐이다. 역사를 단절 혹은 연속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안일한 총론적 접근보다 세부 분과별 차별적인 양상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대 연구는 당대의 목적에 기여할 뿐이다. 중세의 동물학은 동물의 습성과 행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각 동물의 행동과 외모가 인간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우화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통해 독자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주는 데 일조하려 했다. 고슴도치는 신중함을, 두루미는 정중함을, 수사자는 성부(聖父)를 상징했다. 당대의 식물이 약초로서 의학적 필요성에 의해 정밀한 경험적 연구의 대상이 된 것과 달리, 동물은 일부 가축이나 사냥 대상을 제외하고 실용적 의미로 다가오는 바가 적었기에 우화적 대상으로서 가치가 더 컸을 뿐이다. 이러한 중세적 접근을 통해 밝혀낸 사실이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동물을 오직 경제발전에의 유용성 여부로만 평가하려는 신자유주의적 관점보다는 훨씬 건전하고 아름다운 접근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교회 권력이 중세 과학 발전을 가로막을 원흉이라고 보는 관점에도 약간의 포용이 필요하다. 교회는 자연철학을 억압하지 않았다. 전체 자연철학의 분과 중에서 교리에 도움이 되는 것은 지원했으며, 그것이 아무런 지원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교리에 어긋나는 지식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강령을 발표할 정도로 강력하게 억압했지만, 애초에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식인들의 양성소였던 수도원과 여기서 파생된 학교와 도서관이 있었기에 읽고 쓰는 능력이 전반적으로 배양되었고, 각종 문헌의 습득, 소장, 번역 기능도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세에 위대한 창조자는 드물었지만, 보존과 전수의 기능은 발전했고, 이 학문적 문화와 제도가 근대 과학혁명의 기틀이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넓은 범위의 과학 개념 안에서 분과별로, 시대별로, 그리고 지역별로 빈틈없이 접근하며 역사적 변동과 함께 동시대적 차이는 물론, 서로 다른 지역 간의 상호작용까지 촘촘하게 짚어 냈다. 그가 접근한 과학의 범주가 현재의 제도적 의미에서 축소된 자연과학 개념에 머무르지 않았던 까닭에 우리는 고대 이집트 신화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경유하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까지 이어지는 지식의 계보학을 촘촘히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플라톤은 과학적 실천의 근본 원리인 이상화와 환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자세히 묘사되는데, 그를 다룬 장은 어지간한 철학 개론서보다 훨씬 명쾌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타고난 이야기꾼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저자가 과학을 열쇳말 삼아 고대와 중세를 다룬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해 보여주었듯, 모든 시대의 선구자들은 주어진 제약 아래 나름의 열매를 맺어왔다. 인류가 몇 차례 위기 속에서도 멸절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온 이상, 진보의 과정 중에 허투루 무시해 버릴만한 값어치 없는 성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밟아 온 모든 과정이 쌓이고 쌓여 오늘을 만들었고, 그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려면 일단 그 시대를 닮으려는 세심한 눈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비난하는 것보다 훨씬 유용한 사업이기 때문이다(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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