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판소리, 모두의 울림」

해상도의 변주

동시대 미술을 폭넓게 아우르는 국제 행사 유형의 전시는 아주 큰 개념적 우산을 쓸 수밖에 없다. 동시대 지구촌 전역에서 발화되는 목소리를 담을 만한 큰 그릇이 필요다. 이번 제15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호남권을 대표하는 무형문화재인 ‘판소리’를 열쇳말 삼아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소리’들을 중심으로 작품을 배치했다.

전시는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었다. 부딪침 소리(feedback effect)에서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네트워크에서 현대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다루었고, 겹침 소리(polyphonies)에서는 비인간과 자연 생태계 전반까지 아우르는 확장된 관점이 중심이 되었다. 처음 소리(primordial sound)에서는 가장 원초적인 과거로의 회귀, 혹은 가장 미시적인 영역으로의 탐구가 중심을 이뤘다. 주제는 엄밀하게 구분되었으나, 작품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주제에 대한 귀속성이 그리 확연하지 않다. 대체로는 한 갤러리에서 다른 갤러리로 옮겨 놔도 무방하고, 어디에 놓든 그 맥락 안에서 해석하는 데 무리가 없다. 많은 작품이 그렇게 열린 이해의 가능성에 자유롭게 놓여 있다.

아주 전통적인 회화로부터, 사진, 콜라주, 드로잉, 영상, 설치 등 온갖 매체와 재료가 자유분방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내 마음을 점차 사로잡은 개념은 ‘해상도’였다.

영상, 콜라주, 사진 중에서 눈에 거슬릴 정도의 저해상도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캔디스 윌리엄스(Kandis Williams)는 <백인들이 우리를 모두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신과 괴물들(2024)> 연작에서, 백인들이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려고 내세운 이미지들의 콜라주를 제시했다. 할리우드 황금기를 상징하는 아이코닉한 이미지들은 저해상도의 흑백 잡지에서 거칠게 오려져 꿈속에서 본 듯한 엉성하고 아련한 합성물로 재구성되었다. 또 그 옆에는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느끼는 경외심과 두려움이 응축된 괴물성에 가까운 야만적 이미지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거칠고, 강하고, 색욕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흑인들은 날렵하게 차려입고 지적 우월성을 뽐내는 백인 아이콘 옆에 나란히 걸려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두 이미지의 공통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원색의 파란 색점을 유사한 패턴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뿐이다. 서로 다른 이미지 원형이 유사한 방법론과 해상도로 묶이고, 다시 두 이미지를 넘나드는 색점이 모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이로써 인종이라는 미미한 변수와 상관없이 인류는 보편적으로 다양한 정서를 누리고자 하는 본원적 열망을 품고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가 새삼스럽게 도드라진다.

프리다 오루파보(Frida Orupabo)는 인터넷 여기저기서 흑인 이미지를 모아다가 생경한 배치를 통해 부조리를 창출하기도 하고,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로 재구성해 초현실적 콜라주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그가 모은 재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찾아 헤매는 고해상도의 고품격 이미지가 아니다. 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히 발견한 듯 전혀 미학적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거나, 심지어 이미지 스톡 회사인 알라미(Alamy)에서 제공하는 견본을 워터마크조차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저해상도로 강제 확대해 캡처한 것이다. 우리가 고품질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할 때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그 워터마크와 저품질이 예술 작품으로 버젓이 재결합해 고품격의 액자에 끼워져 화이트 큐브에 걸리는 순간, 이미지 유통을 둘러싼 상거래 관행과 시각 매체의 미적 층위에 관한 오랜 관념들이 통째로 흔들리며 새로운 인지적 쾌를 창출한다. 또 헨리 퓨슬리(Henry Fuseli)의 기념비적 작품을 오마주한 콜라주에서는 저해상도로 거칠게 합성된 두 인물이 누운 침대 커버가 바람에 날려 너풀거리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이로써 콜라주 속 인물의 목각인형 같은 경직된 조형성은 실제 물리적으로 너풀거리는 움직임을 매개로 평면을 뚫고 관람객의 시지각으로 파고들며 효용 가치가 끝나버린 이미지가 어떻게 미학적·정치적으로 생명력을 갱신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되묻게 된다.

네타 라우퍼(Netta Laufer)도 저해상도를 전면에 내세우며 일상적 시각장의 관습을 교란한다. 그의 이미지는 미학적 목적으로 제작된 사진이 아닌, 보안 및 군사 목적으로 촬영된 CCTV의 한순간을 캡처한 결과물이다. 군사적 긴장감이 높은 접경지대나 분쟁지역의 국경에 설치된 CCTV에 우연히 찍힌 동물들을 작가는 정성스럽게 캡처하고 인화하고 표구한다. 그 이미지는 당연히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채널의 초고해상도 동물 화보와는 거리가 멀며, 짝짓기나 영역 다툼 같은 인간 주체 관점의 낭만적 동물 서사와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작가의 동물 사진은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는 동물들의 처절한 생존 게임이고, 촬영 장비의 용도와 동물 사진의 미학적 위계에 관한 본원적 질문이다. 동물들은 어둠 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며 번뜩거리는 눈빛의 궤적만을 겨우 화면에 남기고, 그 스틸컷은 잠깐이나마 메모리카드에 저장되겠지만, 전략적 효용성이 전혀 없는 그 이미지들은 이내 다른 ‘유용한’ 영상 데이터에 자리를 내어 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동물들이 표구되고 전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다른 고차원적인 생태·정치학적 이론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원래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그곳을 지나다닐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처럼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서 젠더, 정체성, 생태정치학을 가로지르며 보편적 관행과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예술가들은 의도적으로 이미지의 해상도를 낮춤으로써 형태를 왜곡하거나 낯설게 하고, 이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함을 극대화하거나 관념적 질서를 와해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접근은 B급 정서와 밈(meme)이 주류 예술계의 언어로 속속 전유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초등학생들도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초고해상도의 동영상 스트리밍을 즐기고, 심지어 4K 영상을 아무 데서나 찍어 올릴 수 있는 시대에 현실을 방불케 하는 고해상도의 이미지가 미술계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줄어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너나 할 것 없이 3D 랜더링 기법을 익혀 기계음 나레이션을 떡칠한 채 최첨단 사이버네틱스 세계를 창조하거나, 아니면 아예 정반대로 창고 속에 처박혀 먼지만 낀 채 방치되었던 캠코더를 다시 꺼내 4:3 비율로 ‘가짜 과거’를 양산해내곤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현재의 해상도를 높일 수 없다면 아예 미래를 창조하기, 그럴 기술(재주)도 없다면 아예 과거를 가장하거나 현재를 어거지로 일그러뜨려 낯설게 하기. 오늘날 기술보급의 조건과 창조성의 압박 속에서 시각 예술가들이 이 정도의 제한된 선택지에 내몰리게 된 것일까?

이 와중에 비교적 전통적인 매체와 기법을 꾸준히 밀고 나가는 한 예술가는 놀라울 정도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펼쳐 내어 ‘신기술-저해상도’ 무리와 절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알렉스 세르비니(Alex Cerveny)는 현대적 중세 회화를 선보였다. 그의 정교하고 아이코닉한 회화에는 중세 채식필사본에서 가져온 듯한 인물, 식물, 건물 모티브가 두둥실 떠다니고, 장난기 물씬 풍기는 꽈배기 인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위트와 상상력을 더한다. 현대적 쟁점들과 역사적 계보를 한 화면에 정교하게 엮어낸 탁월한 구성력은 빈틈없는 회화적 마감 솜씨에 의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관람객을 화면 구석구석으로 빨아들이며 오랫동안 붙들어 맨다. 화면 테두리를 감싸는 정교한 장식의 강렬한 색감은 중세 수도자들의 미감이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강력한 시각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나란히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공명하는 두 종류의 이미지들─한편에서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오히려 의도적으로 해상도를 낮춘 이미지, 다른 한편에서 천 년 전의 미감을 현대적 안목으로 재해석한 초고해상도의 회화─은 앞으로 해상도가 미적 표현의 문제에 있어서 소소하면서도 유의미한 매개변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전시 서비스 측면에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별도로 주절주절 전시 설명을 붙이지 않고, 관람객이 원하면 QR코드를 찍어 작가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은 점은 참 좋았다. 그런데 어쭙잖게 AR 기술을 선보이려는 욕심 때문인지 무조건 캐릭터가 등장해 설명하는 형태로 기획해 놓았는데, 이게 영 수용자 친화적이지가 않다. 그냥 텍스트만 뜨게 하면 안 되나? 재생 시간을 통제(스크롤)하지 못하니 지금 설명하는 내용에 관심이 있든 없든 일단 틀었으면 끝까지 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에 봤던 내용을 나중에 다시 보고 싶은데, 그 내역을 보존해 놓지 않으니 작가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렵다. 이런 점은 2년 후에 보완해 주시길…


No Day But Today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

워드프레스닷컴에서 웹사이트 또는 블로그 만들기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