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Jane Benne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나는 인간중심적 형식으로 수행되어온 정치이론의 향연에서 버려진 재료들로 요리를 만들고자 한다.”
11p

“민주주의를 다루는 생기적 유물론자의 이론은 말하는 주체와 침묵하는 객체 사이의 구분을 일련의 변별적인 경향들과 가변적인 능력들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264p

“인간은 기능하기 위해 비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비인간을 필요로 한다.”
265p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섬세한 시선

인간만이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갖는가? 인간만이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자기 운명을, 혹은 자기를 둘러싼 만물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쩌면 누군가의 사고방식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그렇다고 답한다면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체화된 인간중심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종교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된 하나의 신학적 관점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만물에 위계가 있으며, 무생물보다는 생물이, 그 생물 가운데서도 인간이 우선순위에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라는 명령에 자연스럽게 젖어 드는 것이다.

정치이론가 제인 베넷(Jane Bennet)은 이러한 인간의 주권에 회의를 제기하며 만물의 생기와 주체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생기적 유물론’의 편에 선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물과 인공물, 즉 사물에 고유의 유동하는 생명력의 일종인 생기가 있다는 관점이다. 이 생기는 신, 인간, 혹은 그 밖에 초현실적 외부자가 무기력한 사물에 불어 넣은 것이 아니다. 생기는 어떤 존재의 물질성에 그 자체로서 고유하게 내재하는 에너지다(18p). 사물은 이 생기로 말미암아 끝없이 변화하면서 인접한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다시금 반향을 일으키며 존재로 회귀한다. 이렇게 역동적 메커니즘에 놓인 사물은 더는 고정된 사물의 지위에 놓이지 않고 비로소 하나의 행위소가 된다. 행위소는 단독자로서 존재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행위소는 다른 행위소들과의 관계와 영향, 즉 행위소들의 배치에 의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행위소들이 주고받는 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인과관계의 단선적인 흐름으로 읽어낼 수 없다. 행위소는 유동하고, 창발하고, 배치되면서 자기 본질과 배치를 바꾼다. 더 없이 정적이다 못해 고정된 물질로 이해되는 돌이나 금속조차도 그러한 생기를 지닌다. 그 사물들의 생기 작용은 너무나 정적이라서 우리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다. 고작 100년을 살다 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다고 단정 짓는 것처럼 오만한 태도도 없다.

저자는 생기적 유물론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해 줄 법한 유사 이론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소개하면서 자기주장을 정당화한다. 외견상 이 책은 평범한 이론서로 읽히지만, 군데군데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체성이 내비친다. 여러 이론을 논리적으로 꿰맞추면서 새로운 이론의 성을 쌓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그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이 책의 기획은 일종의 지리-정동 혹은 물질적 생기를 이론화하는 것이고, 인간중심주의와 생물중심주의를 철저히 피할 수 있는 방법론을 따르는 이론을 고안하는 것이며, 혹은 아마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질에 대한 비논리적인 사랑을 품은 이론을 고안하는 것이다(164-165p).” 이 천명된 기획 의도는 저자가 하고자 하는 작업이 아무리 저명한 이론가들을 호명하더라도 결코 논리적인 수준의 정합성에는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엄격한 이론의 형태를 띨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일단 특정한 행위소 안에 어떤 생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외부자인 우리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정황상 그렇게 이해할 뿐이다. 아니,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모두에게 유익하므로 그렇게 이해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어떤 사물의 생기가 어느 날 문득 인간인 나에게 불현듯 인식되어 그것을 내가 인간의 언어로 아무리 장황하고 논리적으로 풀어 증명한다고 한들, 그 이해는 다시금 인간중심적인 인식론의 영역에 묶인다. 비인간 사물은 스스로를 이론화해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없다. 말을 걸더라도 그 언어는 우리 인간의 언어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 앞에서 물질의 생기는 영원한 불가지의 영역에 내던져진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생기적 유물론에 대한 신념은 유사 종교로 변형된다. 유신론자들이 논리적 합리성이 아닌 일종의 맹신으로서 신을 믿고, 그 맹신이 다시금 그 유신론자의 신앙심을 증명하듯, 생기적 유물론자도 유신론자의 정반대 편에서 물질의 생기를 그저 믿는다. 이 지점은 저자가 자주 인용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부정변증법과도 공명한다. 아도르노는 특정한 개념이 실제 대상을 온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니 어떤 개념에서 벗어나는 실체의 잔여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부정변증법은 “현실이 대상을 기만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대상 하나하나에서 여전히 드러나는 가능성을 통해 경직된 그 대상들에 파고(63p)”드는 것이다. 이때 비인간 대상은 중요한 탐구 대상이지만, 그것에 대하여 말하면 말할수록 그 대상의 본질은 언어의 작용에 의해 점점 더 왜곡되고 멀어진다. 따라서 부정변증법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불가지한 신을 찬미하듯이 비동일성을 존중(65p)”하는 것이다.

결국 이 책 전체가 이론이나 증명이 아닌 신앙의 영역에 내던져져 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어지는 문제도 눈덩이처럼 커진다. 우선, 생동하는 물질에 대한 이론을 정교화하면 할수록 다시금 인간중심적인 해석에 묶인다는 한계에 대한 대응으로, 저자는 그간의 논의에서 익숙한 조작적 정의들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물질, 생명, 자아, 자기이해, 의지, 행위성 등에 대한 인간중심적 정의를 변형하거나 말소하면 사물의 생기를 이해하는 과정의 인식론적 모순이 어느 정도 해소되리라는 것이다(11p). 하지만 정의를 새로 세우는 것조차 인간 주체(그것도 명명하는 주체라는 아주아주 야심찬 주체)라는 점에서 다시금 순환적 오류에 빠지게 될진대, 여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저자는 인간중심적 인식의 한계성을 자기 글에서조차 피하지 않고 그대로 직면하는 듯 보인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장갑, 꽃가루, 죽은 쥐, 병마개, 나뭇가지에서 느낀 생기에 관한 표현에서 저자는 “적어도, 그것들은 나에게 정동을 촉발했다(42p).”라고 말한다. 이 촉발된 정동을 통해 그 하찮은 사물들의 생기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허나 저자의 심상에서 촉발된 정동이 그 사물들에 생기가 있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사유하고 글을 써 나누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중심적 인식론을 벗어나 사물의 생기를 증명하고 논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다.

사물의 생기를 이해할 유용한 방법론 중 하나로 제시한 의인화도 문제다. 저자는 사물을 의인화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그동안 간과된 어떤 대상의 생기적 측면이나 행위소적 가치를 일깨우는 데 있어서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의인화를 통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존재 범주로 가득한 세계가 아닌, 다양하게 구성되어 연합을 형성하는 물질성의 세계를 발견해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된다(246p).”라는 이유를 덧붙이면서. 하지만 인간을 사물화하든, 사물을 인간화하든, 인간의 언어와 사유 방식을 통로로 삼아 사물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인본주의의 한계가 더 선명히 도드라지는 측면이 있다. 사물의 생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니, 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간을 모델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알겠으나, 그럼 도대체 언제쯤 인간에서 벗어난 사물의 생기론을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견고하게 세워진 하나의 출발점은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더 큰 변혁적 노력을 동반하지 않겠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생기의 작용이 너무나 정적이고 미미해 보이는, 그래서 거의 고정된 사물로 인식되는 돌과 금속에서 어떻게 생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에 관해 저자가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숙제는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저자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를 인용하며 떨어지는 돌에도 계속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강조한다(37p). 또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를 인용하며 인류가 석기를 사용함으로 인해 비로소 반성적 사고가 유도되기 시작했고 말한다. 나아가 석기와 인류의 상호작용을 달리 해석하면 석기가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적 사고를 갖도록 의도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암시한다(97p). 마찬가지로 금속에 대해서는 그것의 미시적 결정 구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빈틈과 결함을 근거로 유연성과 창발적 인과성을 강조한다(159-160p). 물론 인간이 자기 인식적 한계 내에서 세계를 손쉽게 이해하려고 단순화·추상화한다거나 생존기술의 일환으로서 사물을 고정된 실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세계를 계속하여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고정된 사물들의 계산 가능한 집합으로서 바라보는 ‘정신의 피할 수 없는 성향’이 있다(202p).” 하지만 그 성향을 깨기 위해 굳이 인간에 의해 부서진 돌덩이, 혹은 억겁의 세월 동안 휘어진 금속에 내재한 사물의 의지까지 논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논의 범주의 확장과 관점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극단적 사례를 포섭하려다가 괜히 반감만 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방법론적으로도 아쉬움이 남는다. 생기적 유물론을 암시하는 선행연구에 대한 주석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정작 흥미로웠던 대목은 저자가 길에서 발견한 사물들에서 생기를 식별한 1장의 예시나 전기 송전망에서 발생한 문제를 행위소 배치의 쟁점으로 치환한 2장의 논리 전개 방식이었지만, 이처럼 생생한 예시를 통한 접근은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그쳤다. 저자는 “인간중심적 형식으로 수행되어온 정치이론의 향연에서 버려진 재료들로 요리를 만들고자(11p)” 했지만, 정작 우리는 구체적인 재료 언급 없는 레시피만을 반복적으로 주워들었다. 우리가 진정 알고 싶었던 것은 재료들의 영양소와 다듬는 방법이었는데도.

다시 유사신학 논의로 돌아가자.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생기적 유물론에 대한 논리적 이론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사물의 생기와 그 권리, 그리고 사물과 인간이 얽힌 배치에 대한 정치적 관심을 촉구하려는 일종의 호소문으로 쓰였다. 저자가 굳게 믿고 있는 사물의 주체성과 생기에 관한 불가지론적 믿음을 설파하려고 쓰였다. 스피노자, 아도르노, 칸트(Immanuel Kant), 드리슈(Hans Driesch), 베르그송(Henri Bergson), 들뢰즈(Gilles Deleuze) &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등 생기론의 맹아들을 총동원했지만, 실상 저자 자신이 제안하는 독자적 생기론의 모델은 거의 없다. 앞선 생기적 유물론의 시도들은 점진적 진보를 이루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중심적 시선에 여전히 묶여 있으니,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 사물들 자체의 욕망, 의도성, 주체성을 인정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동격으로 품는 완전한 생기적 유물론으로 옮겨가자는 것이 반복되는 주장의 거의 전부다. 이 주장에 따라붙는 실천적 대안도 거의 없다. 그저 폭넓은 차원에서 방법론적 방향만이 암시되는데, 사물에 대한 의인화가 생기론을 익히는 데 있어서 좋은 훈련이 되리라는 것(290p), 그리고 돌고 돌아 결국 인간을 향하고야 마는 질문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보다 폭넓은 배치와 사물의 주체성을 더 깊이 생각하자는 것(291p)이다.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은 저자 스스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나는 논의의 마지막 부분이 매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295p).” 본문 마지막 페이지의 이 문장이 그저 면피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생기적 유물론 실천편이 후속작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즐거웠던 이유는, 이 안에 저자의 날 선 주장이 에두르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물의 생기를 강조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고 들지 않았다. 차이의 말소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충분히 전제되었다. 다만 저자의 야심은 지금 인간이 구축한 정치체계 안에 더 많은 행위소를 끌어들여 그들과 진지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256p). 주체와 사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53p). “생기적 유물론의 정치적 목적은 행위소들을 완전히 동등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한 더 많은 통로를 갖는 정치 조직을 추구하는 것이다(256p).” 이러한 관점의 확장을 통해 우리는 단순화와 신비화의 함정에서 탈피하여 더 복잡한 교호작용과 인과관계의 배치로 뛰어들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폭넓은 사고의 틀에서는 어떤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절대적 단일 책임소재를 찾기 어렵겠지만, 그렇기에 책임의 범위를 넓혀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되고, 결국 ‘영향을 받는 나’와 ‘영향을 주는 나’가 긴밀하게 연결된 통합적 시스템을 가상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지금 이러한 목표를 논하는 것조차 너무 앞서나간 이상향임을 아마 누구보다 저자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비인간 사물에 내재한 생기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존중하기 위한 일련의 현실 정치 제도를 논할 수 있는 시점이 언제 도래할는지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인간임이 명백한 어떤 존재와의 소통에서조차 비인간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나와 같은 인간종에 속한다는 것이 정녕 사실인지 존재론적 회의감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종 내부에서도 결속은커녕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하다고 느끼면서 실제로 언어적 소통 대신 방아쇠를 먼저 만지작거리는 판국에 비인간 사물의 생기를 인정하자는 논의는 먼 나라 얘기를 넘어 다른 은하계 얘기로 들린다. 심지어 저자가 속한 나라는 불과 며칠 전에 인간종 내부에서조차 현격한 차등의 정치를 구현하겠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이를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했다. 그의 면전에서 지렁이나 자갈의 생기를 주장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결국 현실 정치 제도에 비인간 사물의 생기를 고려하는 작업은 제도권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이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아주 작은 논의의 공간을 이 세상 어딘가에 마련해 주는 정도의 역할만 해줘도 족하다. 아주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고, 숨만 쉴 정도로 지원해 주고,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는 잠시 잊어버려 주는 일─. 그 일만 해줘도 예기치 못한 성과는 어느 날 문득 반짝거리는 생기와 함께 우리 곁으로 찾아와 그 감출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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