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드리언 포티의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Adrian Forty, Object of Desire, Design and Society Since 1750

디자인 리터러시의 출발점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시각성이라는 협의의 범주에서 디자인은 무언가를 보기 좋게, 동시에 쓰기 좋게 만드는 행위이자 그 결과물이다. 디자인은 거래 관계에서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더 나은 무언가로 만들어 준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의 원가를 절감하거나, 가치를 돋보이게 하거나, 최소한 경쟁하는 다른 무언가보다 단 하나라도 더 나아 보이게끔 만든다.

디자인 혁신의 동인은 무언가를 더 많이 판매하려는 상업적 열망과 결부되어 있다. 상업적 열망의 중심에는 기업가가 있고, 또 그 저변에 기업가를 뒷받침하는 상업적 시스템이 있다. 디자인은 그 시스템 안의 구성원에 의하여 창출되었든, 시스템 밖 주체의 외주로 창출되었든 기업가의 직간접적인 의사결정에 의하여 촉진되고 선택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기업가의 의지나 욕망과 무관한 디자인도 분명 이 세상 어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체화된 형상을 볼 수 없다. 단 한 사람의 혁신적 디자이너가 창출한 디자인이 생산 시스템을 단독으로 뚫고 물질적 형상을 덧입어 도처에 뿌려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은 디자인을 (순수)예술과, 디자이너를 낭만주의적 예술가와 동일시하는 착각에 가깝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의 결정권자라는 생각은 디자이너들에게 유익하겠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디자인을 독립적인 역사 기술의 하위 분과로 공고히 하려는 디자인사가는 이미 견고히 확립된 미술사 서술의 선례를 따라 신화적 창조자를 중심에 둔 디자인사를 쓰려는 욕망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디자인사가 서술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신화적 디자이너들의 결과물들을 일종의 유파처럼 엮어가는 접근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디자인사는 중심에 선 몇몇 인물과 경향 외에 미시적 움직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또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경제·사회·문화적 변동을 두루 다루지 못한다. 이 점을 문제 삼는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의 작업은 특정 시대의 경제사회적 조건과 디자인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변화의 중심에 사회적 관념을 둔다. 특정한 시대에 누군가 추구하거나 강요하거나 공유했던 관념이 물리적 실체의 형상으로서 구현된 것이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디자인의 특수 임무는 관념과 각각의 생산 방식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제품은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신화를 품게 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신화는 자신이 투사된 제품만큼이나 구체적인 실체로 보이게 된다(14p).” 따라서 예술 작품에 대해 작가의 창조성이나 천재성을 벗어나 사회적 맥락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디자인에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디자인에서 사회적 맥락은 이미 본질적 생성원리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2p).

이 책은 영국의 디자인 발전사를 산업혁명 당시부터 1980년대 초까지만 다루므로 넓은 범위라고 할 수는 없다. 대신 주제별로 사회·경제적 배경과 맞물린 디자인 변화상을 비교적 소상히 밝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가졌던 디자인에 관한 오랜 통념을 깨기 위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도입되며 대량생산 체계가 일반화되자 디자인의 질은 저하되기 시작했다는 통념이 있다. 기계가 노동의 단위를 분업화하면서 디자인의 가치가 격하되고 값싼 취향이 강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 분업은 기계 도입 이전부터 여러 생산 부문에서 일반적이었다. 노동 단위를 분절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 공정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일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기계 도입 이전부터 명확했고, 일반적 공정혁신의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 기계의 도입은 노동 분업을 가속화한 일개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수공업보다 기계 공정에 더 적합한 디자인 경향은 존재했지만, 그것이 진짜 저열한 것이었는지 평가와 별개로 그 디자인을 결정한 주체가 누구였는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 기계 공정에 적합한 디자인을 선택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기 원했던 자본가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가구 공정에 기계가 도입되어 품질이 낙후되고 디자인이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가구 소매상들이 구매 단가를 후려치려는 욕망이 가구 품질의 저하를 가져온 것이다. 디자인의 저하를 문제 삼아 기계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난을 간편하게 엄한 곳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디자인에는 사회적 계층의 차이에 대한 당대의 관념이 반영된다. “제품 디자인간의 차이는 당시의 사회적 차이에 대한 관념이 구체화된 것이다(81p).” 계층이 다르다면 디자인이 달라야 하고, 상위 계층을 표상하는 디자인은 그 계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다 보통사람들이 상위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어떤 디자인을 획득하는 순간, 상위 계층은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내거나 아예 과거로 회귀한다.

사무실 디자인에서도 그런 경향이 발견된다. 처음 사무직이라는 직종이 생겨났을 때, 기업가들은 그들에게 공장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효과적으로 채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차별화된 업무 공간을 제공했다. 깔끔하고 쾌적하며 개인별 구획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사무직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공장 노동자들과 구별되는 중산층의 엘리트라는 정체성을 누릴 수 있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넓은 책상과 문서 보관 공간, 그리고 사생활이 보장되는 높은 가리개를 통해 특별한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무직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노동 분업화가 빠르게 전개되었고, 그들 각각에 사생활의 권한을 주는 것은 관리 효율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책상은 좁아졌고, 문서 보관 공간은 최소화되었으며, 관리자와 접촉할 가능성은 더 멀어지면서 사무직 노동자 개인이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될 여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이 관리 효율성에 기반을 둔 배치였지만, 효율성보다는 지위의 차별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늘 앞섰다. 일반 사무직 노동자들의 공간이 극도의 관리 효율성을 추구하는 와중에도 중역의 사무실은 여전히 부르주아의 주택 내 아늑한 응접실이나 서재를 닮아 있었다. 거기엔 안락한 소파와 다정한 가족사진이 걸렸으며, 이를 통해 그 사무실의 주인이 카리스마적이지만 다정하고, 리더십 있으며, 지적이고 여유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관념을 구현해냈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불어 닥쳤던 위생의 광풍도 차이의 기호로 뒤덮여 있었다. 부르주아 위생 개혁가들은 노동자 계층의 비위생 문제가 각종 질병과 생산성 하락을 낳는 요인이라며 이를 반영한 디자인을 주창했다. 위생학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가구 및 기물의 표면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게 매끈하고 요철이 없어야 했으나, 기차 일등석은 예외였다. 거기엔 늘 화려한 장식과 벨벳 커버가 깔려 있어 단순하고 딱딱한 디자인의 삼등석보다 더 먼지가 날리는 비위생적인 환경이었다. 욕조도 위생을 명분 삼은 차이의 기호였다. 부르주아가 집안에 욕조를 들였을 때는 욕조의 존재 여부 자체가 계층을 드러냈지만, 노동자 계층도 욕조를 들이게 된 이후부터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첫째는 노동자들이 욕조의 사용법을 제대로 모른다는 농담을 퍼뜨리는 것이었고, 둘째는 천편일률적이었던 욕조 디자인과 색에 변화를 주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사회적 관념이 디자인에 투영된다는 사실 외에도 디자인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이 감지된다. 그동안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신제품이 세상에 출시되면, 처음에는 생경함이 주는 충격으로 인해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고, 그로 인해 시장 확산에 애를 먹는다. 다음 단계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 익숙했던 제품의 외형을 본뜨게 된다. 그것마저 진부화된다면,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 제품만이 보여줄 수 있는 본질적 가치를 담은 미래지향적 디자인으로 일대 혁신을 이루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라디오다. 라디오 수신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기능 구현에만 중점을 둔 기계 덩어리와 회선의 조합체일 뿐이었다. 그것이 잠재 고객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후 단계에서는 기계 전체가 나무 캐비닛에 쏙 들어가 일반적인 수납함과 구별되지 않는 외형이 되었다. 라디오가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간 이후 유선형의 미려한 디자인을 갖춘 ‘라디오다운 라디오’가 등장했고, 플라스틱이나 합성수지 같은 새로운 소재도 접목되기 시작했다. 이때 라디오가 보여준 것은 실시간으로 세상의 소식과 즐거움을 안방까지 전달해 줄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도래이며, 누구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는 관념이었다. 이처럼 모든 디자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안락하고, 편안하고, 유쾌하며, 새로운 세상, 즉 천년왕국의 도래를 약속한다. “과학과 기술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희망적인 미래상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디자인은 20세기의 희한한 현상 중에 하나다(255p).”

눈 뜬 모든 순간에 광대역폭 정보 고속도로에 접속해 살아가는 오늘날, 디자인의 홍수와 기호의 공세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로서 오롯이 서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우리의 주의를 뺏으려는 암약이 UX 디자인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사방에서 펼쳐진다. 이러한 디자인의 홍수에서 주체로 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비판적 디자인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비록 한정된 시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보여준 사회사적 접근 방법론만큼은 디자인 리터러시의 선례로서 가치가 충분하며,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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