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展 (국립중앙박물관)

아무튼, 느닷없이, 다짜고짜 ‘혁신’

‘빈1900’은 단순히 특정한 도시와 시기를 싸잡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유럽 정치권력의 중심이었던 빈이 급격하게 모더니즘의 혁명을 맞이하며 학문과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던 1890년부터 1920년 정도까지의 시기를 ‘빈1900’이라고 부른다(이 이름은 레오폴트미술관의 상설전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명명이 철학, 의학, 심리학, 예술, 정치경제학 등 다방면에 걸쳐 통용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시기의 변화는 급격하고도 파급력이 컸다. 또한, 빈이라는 도시 자체의 위상 맞물려 그 시공간에서 배출한 인물들의 영향력이 지금까지 다방면에서 이어지고 있다.

빈 모더니즘 혁명의 중심에는 공교롭게도 정확히 1900년에 출간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꿈의 해석」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에게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의 난잡한 욕망과 상처 따위가 인간의 행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라는 주장은 새삼 충격적인 진실로 다가왔다. 왕가와 귀족들의 스캔들이나 사회적 거대 담론을 논하던 사람들은 이제 삼삼오오 카페에 둘러앉아 인간의 기원과 내면의 무의식, 그리고 어두운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 구석구석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그 명백한 변화의 시각적 증거를 우리는 클림트(Gustav Klimt),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그림에서 발견한다. 이들의 그림에서 그동안 회화의 단골 주제였던 왕과 귀족의 우아한 자태나 신화와 역사 속 알레고리는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화면을 가득 채운 이미지는 악마와 마녀의 송연한 눈빛, 노골적으로 성애를 암시하는 나신의 여인, 그리고 불안과 초조를 감출 길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이다.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화가들은 우선 자기 욕망과 당당히 대면해야 했다. 오늘날 빈1900의 주역들이 실제 그들의 기여보다 더 큰 찬사를 받으며 주요 미술관의 핵심 컬렉션으로 추앙받고 있다면, 그들이 인간 내면의 욕망을 거추장스러운 겉치레 없이 나름대로 솔직하게 직시한 첫 세대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빈1900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국내 첫 블록버스터 전시 소식을 듣자마자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프로이트의 이름을 떠올렸고, 주최측의 성향을 고려할 때 정신분석학과 클림트를 연결하는 등식이 얼마나 작위적일까를 걱정하며 치킨 한 마리 값에 달하는 티켓을 결제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그 등식은 전혀 작위적이지 않았다. 프로이트라는 이름조차 아예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학도, 무의식도 없었다. 전시는 전반에 걸쳐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빈1900에 (우연히) 혁신적인 예술가들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원래부터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혁신은 앞으로도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빈1900 모더니즘 미술 혁명의 유일한 동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을 빼놓고 보니 빈 분리파의 성취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약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프롤로그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of Austria)의 도시 개혁이 언급되기는 하나, 물리적 도시 확장과 구획의 개편, 그리고 건축물의 축조가 무의식과 욕망의 예술을 어떻게 가능하게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브로셔에 언급된 대로, 기념비적 건물의 신축으로 인해 벽화와 인테리어 수요가 증가해 클림트의 위상이 커졌을 수는 있으나, 이러한 사회적 정황은 클림트가 추구했던 새로운 화풍과 주제의식에 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늘 그랬듯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에도 전시의 컨셉을 ‘초·중·고 겨울방학 체험학습 컨텐츠’로 확고하게 정립했다. 이 방향성에 따르면, 일단 교육적으로나 젠더 담론 측면에서 불편해질 수 있는 정신분석, 욕망, 무의식 등 개념은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이 작품들이 남성 예술가들의 성적 욕망 분출구라는 점, 화가-모델 권력관계와 젠더 권력이 긴밀하게 연계·병치되어 있다는 점, 심지어 몇몇 작가들이 아동성애와 근친상간과 스토킹의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해야 한다. 분리파의 새로운 화풍과 주제는 예술가들의 혁신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뭉뚱그려 놓고, 사회정치적 압력이나 학술적 발견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일로 축소해야 한다. 브로셔와 캡션은 최대한 빼곡한 텍스트로 작품 사이사이 촘촘하게 제시하고, 가장 친절한 합쇼체로 서술해야 한다. 일단 텍스트에 질식되면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한다. 특히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합쇼체로 서술된 동화책 및 교육자료에 완전히 길들어 있고, 그 텍스트는 늘 단선적인 답변만을 요구하므로 시간이 흘러 그 문체를 다시 맞닥뜨리더라도 그 이상의 이론(異論)을 떠올리지 못한다.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 이후에 그들을 찾아올 권태기의 가능성은 발을 붙일 곳이 없다.

빈 근현대미술의 성지인 레오폴트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을 이처럼 풍성하게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현재로서 국립중앙박물관밖에 할 수 없겠지만, 그 혁혁한 공을 해낸 주최측의 정체성과 그릇된 검열 욕망으로 인해 전시 구성에 있어서는 독이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초중고 체험학습용 전시에 집착할 생각이라면, 그 그릇에 맞게 근현대 컬렉션에는 아예 관심을 끄기를 바란다. 아니면 브로셔를 어린이용과 성인용으로 분리해서 별도 제공하기를 바란다. 미술사 연구생태계가 열악한 우리나라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공적 담론 형성 기구가 구성한 기획과 텍스트 하나하나는 문화예술에 대한 관여도가 낮은 일반 대중의 교양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심화된 개인적 사후 학습을 실천하는 관객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국립 기관이 이야기하는 것을 작품에 관한 거의 전부라 생각하며 전시장을 나서고, 그 이상의 질문을 떠올리지 않는다. 배고픔보다 위험한 것은 헛배부름이다. 빈1900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 관객들은 이 전시로 인해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를 정신분석학의 태동과 연계해 생각해 볼 당연하고도 소중한 기회를 잃었다. 아마 그 기회는 상당한 개인적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다시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걷어찬 그 기회를 누가 되돌려줄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다. 그들 스스로 ‘정론 생성 기관’의 중압감을 덜어내고 ‘담론 형성 기관’으로 탈바꿈하지 않는다면 훈육강박적 블록버스터 전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모바일 브로셔는 편리하고 좋았어요. 현실적 제약(민원, 예산, 검열 등)이 많다는 건 잘 알죠. 힘내세요, 기획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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