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유니버스: 「피로사회(2010)」, 「투명사회(2012)」, 「아름다움의 구원(2015)」

Mudigkeitsgesellschaft; Transparenzgesellschaft; Die Errettung des Schönen

진단서 말고 연장통을 주세요.

딱히 대단한 원칙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 홈페이지에서 책을 정리할 때 대체로 하나의 글로 한 권의 책을 다뤘다. 이번에는 세 개의 책을 한 번에 엮어 정리해 본다. 일단 이 책들이 모두 소책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얇고, 하나의 대주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 대주제를 한병철 유니버스라고 규정해 본다.

그 주제란 무엇인가?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이 시대 병폐의 상당 부분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근대까지만 해도 주체에게는 명백한 적/타자가 존재했다. 적/타자는 말 그대로 주체의 내면과 대비되는 외부적 대상인데, 합리적 이성을 지닌 것으로 상정되는 주체로서도 적/타자를 통제할 도리는 없었다. 근대의 공포와 불안은 여기서 기인했다. 신체의 경계를 넘어 내부로 파고드는 온갖 세균들이 면역학의 문제들을 야기했고, 이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류도 멸절하리라는 공포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공포는 단순히 신체의 범주를 넘어 국가, 사회, 공동체 전반에 적용되었다. 사회경제의 모든 시스템이 면역학적 공포에 기반한 통제 기구로 확립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벤담(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이 모델에서는 미지의 중앙집권적 권력 중심부가 모든 수감자를 감시한다. 수감자는 권력 기구를 볼 수 없지만, 중심에서는 모든 수감자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다. 수감자에게 권력 기구는 궁극의 적이고 타자다. 수감자는 현시점에서 권력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므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타자의 감시를 내면화하게 된다. “~~하면 안 된다.”라는 부정문 형태의 규율이 이 사회를 지배한다. 그런 의미에서 규율사회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규율사회의 논리 구조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규율사회를 거쳐 성과사회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규율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고 부추긴다. 무한의 가능성이 주체에 허용된 가운데 분명 누군가는 그 선택지를 최대로 누리면서 최대한의 자원을 확보한다. 그 사례는 전범이 되어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타고 곳곳에 뿌려지고, 온·오프라인 플랫폼 여기저기에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집단최면 속에 진정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승리자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잉여자들만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외부의 적이 아닌, 주체의 내부에서 촉진된 긍정성의 과잉이 주체를 극한의 활동성과 산만함으로 몰아세우고, 이것이 곪아 터지면 나르시시즘적 우울증과 관계의 단절 같은 온갖 사회적 병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적/타자라는 부정성이 사라진 자리에 주체 내면에서 재생산된 과잉의 긍정성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1. 피로사회

「피로사회(2010)」에서는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 양상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 진단하고 과거의 패러다임과 어떤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인지 밝히는 데 집중했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되었다는 진단(17p),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은 과거의 면역학적 방법론과 절연해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예리하다. 면역학은 주체 외부의 적/타자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주체가 자기 자신과 끝없는 경쟁을 치러야 하는 이 시대의 병증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로사회가 외부자와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경쟁 체계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만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초기까지도 강압과 규율, 그리고 경쟁 압력에 입각한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공식은 효과적으로 작동했지만, 요소 투입 위주의 생산성 향상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주체는 적/타자를 통제할 수 없으므로, 경쟁 압력이 한계에 도달한 순간 승리에 안주하게 되거나 되려 자포자기하게 되는 임계점이 찾아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경쟁하게 된다면, 승리의 기준선은 매번 새롭게 갱신될 수 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이겼다고 하더라도, 내일의 나는 더 강해져야 하고, 모레의 나는 그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나는 나를 넘어섬과 동시에 스스로 새로운 기준선을 제시하기에, 나 자신과의 경쟁에는 멈춤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너에게 한계는 없어, 넌 결코 멈추지 않을거야.’라는 긍정성의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온갖 미디어를 거쳐 내면으로 유입되면서 긍정성의 과잉은 배가된다. 그 목소리는 내면에서 점차 더 큰 메아리로 부풀려져 자아 본연의 욕망과 뒤섞여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더더욱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자리매김한다. 이제 멈추는 것은 완전한 퇴보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끝없이 주입하는 사회에서 나 홀로 그렇지 못함을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어찌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28p).” 그런 한탄이 그 어느 때보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음을 체감케 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다. 기력을 소진해 무력감에 삶을 포기하거나 공격성의 화살을 애먼 곳에 표출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우리는 왜 자기 자신을 한계까지 계속 다그칠까? 왜 유휴 시간에 불안감을 느끼며 죄의식을 가질까? 이 대목에서 나도 뜨끔한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피로사회의 대표적 징후 중 하나로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함을 꼽고 있는데, 내가 딱 그 부류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시간이 낭비되는 것 같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조금이라도 생산의 흔적이 남으면 그제야 안도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 홈페이지 자체가 그 가만히 있지 못함의 가장 명확한 증거다. 그렇게 가만히 있지 못해 얻은 성취들이 분명 있지만,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지 아니면 은연중에 떠밀려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저자는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32p).”라고 단언한다. 인류가 일궈낸 풍요로운 문명의 성취는 멀티태스킹이 아닌 주의집중에서 기인한 것이다. 야생동물들은 먹기 위해, 또 먹히지 않기 위해 평생을 주의산만 상태로 살아간다. 먹는 동안에도 먹히지 않으려 경계해야 하며, 정주하는 동안에도 이동을 위해 정찰해야 한다. 인간은 고도의 분업화와 기술적 혁신을 통해 주의집중의 여건을 만들었고, 그 주의력의 결실로 더 큰 진보에 도달했다. 이러한 활동과잉은 달리 말하면 과잉수동성이다(48p). 활동적으로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인간은 정작 고차적 활동을 하지 못한다. 이것저것 동시에 처리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관조만이 창조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멀티태스킹이 마치 현대인의 대단한 역량이라도 되는 듯 은연중에 그것을 칭송하고 신비화한다. 피로사회는 평온한 관조와 사색을 죄악시한다. 그 시간에는 정보와 재화가 원활하게 흐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나홀로 피로’의 축적이 아닌, 타자를 향해 열린 공동체적 피로가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사회와 공동체로 손을 뻗어 예기치 못한 조우를 이뤄내는 과정 자체가 피로의 연속이겠지만, 그 피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계속 다그치는 피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동체에 열린, 머뭇거림과 주저함과 관조로 구성된 부정성의 피로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현대 사회의 병폐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열쇠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부정성이 거세된 자리에서 긍정성의 과잉이 주체를 생산성의 도구로 삼아 극한까지 내몬다는 한병철의 진단은 정확하고 예리하다. 문제는 저자가 긍정성의 과잉을 강조하려다 보니 주체 외부의 적/타자를 최대한 언급하지 않으려 하고, 긍정성의 과잉을 주도적으로 부추기거나 거기에 동조한 세력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논지가 흘러간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관심의 초점을 주체 내부로 돌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최면을 거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거기에 중심 세력 및 동조 세력이 있을 텐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 악의 축을 논하게 된다면, 다시금 면역학의 문제로 돌아가게 되니, 저자가 주장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신선한 테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왜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게임의 룰을 전환한 기업가들을 논하지 않는가? 왜 그 기업가들과 결탁한 정치권력을 논하지 않는가? 왜 그 기업가 및 정치권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언론의 생리를 논하지 않는가? 여기서 한병철 유니버스의 가장 큰 딜레마가 시작된다. 이 딜레마는 이후 저서에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현 상황에 대한 예리한 진단에 앞서 긍정성의 과잉이 확산된 배경과 과정에 대한 역사철학적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전반으로 긍정성의 과잉이 퍼져 나간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내면으로의 침전이라는 나르시시즘적 현상이 촉발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선택지, 자유, 권리, 정보 따위가 주체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여건이 시민사회에 보편적으로 제공된 시점 자체가 멀게는 18세기 말, 가깝게는 정보통신혁명 이후이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과거 지배계층 일부의 문제였다가 자유주의와 권리확산에 발맞추어 시민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면밀히 따져보지 않는다면, 피로사회로 진입을 주도하거나 공모한 세력을 식별해 낼 수 없고, 오늘날 병폐에 관해 누군가에게 마땅한 책임을 묻거나 대안적 구조를 설계하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를 예리하게 진단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도 의미는 있다. 다만, 그는 똑똑한 사람이기에, 역사철학적 분석을 할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기에, 자신이 그것을 하게 되는 순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피로사회의 테제가 무너지게 되리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그 고찰은 필연적으로 적/타자를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이 야심만만하게 뒤집으려 했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아감벤(Giorgio Agamben), 아렌트(Hannah Arendt)와 다시금 손을 잡아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자신이 되고자 했던 냉철하고 독보적인 시대의 관찰자가 아닌, 평범한 또 한 사람의 (짜깁기) 철학자 정도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진단대로, 오늘날 우리를 극한의 피로로 몰아 넣는 긍정성의 과잉은 근대적 면역학의 단선적 ‘주체 對 외부’ 논리로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피로사회를 만든 장본인은 존재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피로사회의 문제는 결국 시민사회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아로 함몰되지 말고 공동체로 손을 뻗어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구조가 피로사회를 촉발하고 있다는 점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면서 왜 그 발화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시민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피로 방향의 전환을 강요하는가? 그의 신간 제목처럼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인가? 저자도 혁명의 필요성까지는 아니지만 그것의 시발점 정도는 될 분노의 가치를 논하기는 했다. 여유가 있어야 분노도 생기고, 분노가 있어야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현재 상황은 분노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50p).”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와서 피로사회를 만든 놈들을 다 때려 부수고 혁명하자는 말이 아니다. 나도 혁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은 충분히 알고 있다. 나도 자본주의의 열매를 잘 따먹으면서 안빈낙도하고 있다. 이 체제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대안은 상상하기 힘들다. 다만 피로사회를 만든 장본인들(엄밀히는 장본인의 후계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다시금 개인 간의 연대나 숙고 따위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초라한 대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다. 역사철학적 분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혁명의 도구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메뉴판이다. 메뉴판은 그저 선택지를 늘여 놓는 것이다. 메뉴판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는다. 그저 선택지를 보여주고 그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이 메뉴판을 연장통이라고 불렀다. “나의 모든 책들은 자그마한 연장통이다. 사람들이 권력 제도를 단락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이 연장통의 뚜껑을 열고 마치 드라이버나 펜치를 찾듯이 거기서 어떤 문구, 어떤 관념, 어떤 분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나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다(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392p).”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병철의 책은 메뉴판도 연장통도 아닌 그저 진단서일 뿐이다. 진단서에는 배경도, 원인도, 영혼도 없다. 그저 단편적 현상에 대한 책임 회피성의 임시방편만 기재될 뿐이다.

2. 투명사회

이제 <투명사회(2012)>로 넘어가자. 긍정성 과잉이 이 시대 온갖 병폐의 핵심 고리라는 점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여기서는 긍정성의 하위적 속성 가운데 투명성에 주목한다. 이 시대는 과도한 투명함을 요구한다. 투명함은 디지털 정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 숨길수록 죄악이고, 공유할수록 선이다. 투명해야 정보 네트워크에서 빠르고 거침없이 유통될 수 있다. 이 투명성은 긍정성 과잉 시대의 규약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자기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 낱낱이 공유해야 한다. 이 공유의 과정은 강압적이지 않다. 조금 더 많이 공유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나르시시즘적 공유와 증명은 획일화로 이어진다. 어딘가 모난 것, 딱 들어맞지 않는 것, 베일에 가린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제 벤담의 파놉티콘은 수감자들을 둘러싼 얇은 벽의 경계마저 투명하게 만든다. 베일에 가려진 권력기구만을 눈치 봤던 수감자들은 이제 서로를 향한 시선의 네트워크에 완전히 노출되어 숨을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자발적으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 상태에 진입한다. 모든 행위는 측정되고, 계산되고, 감시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주민들은 자신을 스스로 전시하면서 파놉티콘 건설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95p).

과도한 투명성의 요구는 정치도 연극으로 만든다.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서조차 어떻게 미디어에 비치고 기록에 남을지가 더 중요해진다. 진정한 숙고의 시간이란 보이지도, 기록되지도, 공유되지도 않는 법이다. 그것은 지난하고 고독하고 치열한 집중의 시간이다. 이러한 숙의의 치열함과 예측불가능성은 정보 네트워크의 생리에 걸맞지 않다. 네트워크는 오직 계산 가능하고 투명하고 매끄러운 정보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다. 정치에 대한 과도한 투명성의 요구는 정치인을 연극 배우로 만든다. 그들은 골방에서 숙고할 시간도 이유도 없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광장으로 튀어나와 석고대죄해야 하고, 피켓 시위를 해야 하고, 희생자들 앞에서 무릎 꿇고 즙이라도 짜야 한다. 배우는 대의가 아닌 자기 명성과 출연료를 위해 연기한다.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이다. 지향점 없는 정치는 국민투표로 전락한다(26p).”

긍정사회에서는 의견과 주장이 사라진다. 내가 맞는 만큼 너도 맞다. 철학도, 가치판단도 사라진다. 그런 고차원적인 사고는 계산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 고로 정보 네트워크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유는 자신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나아간다(65p).” 진리는 배제와 부정성을 전제한다. 투명사회에서 사람들은 진리를 입에 올리기 두려워하거나 아예 그런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관점을 유보하는 사람들, 두루뭉술하게 답변을 회피하는 사람들, 모든 발화 끝에 “~~인 것 같아요”를 붙이는 이른바 ‘같아요충’이 최근 들어 급격히 늘어났다면, 긍정사회의 메커니즘에 중독된 사람이 그만큼 많아져서 그런 것이다.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36p).”

투명성은 포르노와 연관된다. 포르노는 성애의 전과정을 일말의 숨김도 없이 안구 바로 앞에서 낱낱이 전개한다. 이것은 말초적 쾌락에 빠르고 직관적으로 도달하기 위해 일체의 방해물을 제거한 것이므로 외설적이다. 오늘날 디지털로 생산 및 유통되는 거의 모든 이미지는 포르노적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피어나지도 광채를 발하지도 않는다. 피어남에는 시듦의 부정성이, 광채에는 그림자의 부정성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157p).” 반면, 에로틱한 것은 가려져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굴곡진 무언가다. 거기에는 연극적 거리감과 서사성이 있다. 진실과 자아 사이의 거리감으로 인해 중지, 유보, 그리고 깊이감이 창출된다. 또한, 그 거리감으로 인해 발견과 해독의 쾌감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생긴다. “미의 신적인 존재 근거는 비밀에 있다(49p, 발터 벤야민).” 발견과 해독은 문화적 기술이고, 이 기술은 문화를 구성하는 무수한 타자를 상정한다. 진짜 욕망과 쾌락은 이러한 불투명함에서 온다. 불투명이 완전히 제거된 채 방사선으로 둘러싸인 대상은 말초적이고 외설적인 포르노가 된다. 그것은 제의의 대상이 아닌, 전시의 대상이자 진열대의 상품에 가깝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경우에도 매력이 유지되려면 그의 일부분은 불명확하고 비가시적이어야 한다(40p, 게오르그 짐멜).” 그리고 “모든 심오한 정신은 가면을 필요로 한다. 아니, 모든 심오한 정신의 주위로 하나의 가면이 지속적으로 자라난다(45p, 니체).”

투명사회의 기획에서 가장 위험한 대목은 거기 속한 그 누구라도 투명성의 요구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보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를 가지며, 아울러 락인효과(lock-in effect)를 갖는다. 모든 구성원이 그 네트워크에 들어와야 비용이 절감되고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에 들어온 후에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CCTV에 찍히고, 신용카드 및 교통카드 로그가 남고, 기지국으로 위치가 추적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국민이 카카오톡에 가입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온갖 세금고지서와 신분증과 QR코드가 카카오톡을 통해 날아든다. 나만 이 네트워크를 우회한다면 우리 조직에, 나아가 정부에 비효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참여를 강요받는다. 지금 나의 스마트워치로 심박수를 실시간 측정하는 것은 순전히 내 호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심박수를 측정해 보고하지 않는 것은 보건당국과 보험사에 누가 되는 일일 수도 있다. 이처럼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90p).” 그리고 이 강요는 이 사회가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으므로 투명하게 까발리라는 것이다.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98p).” 믿을 수 없어서 투명을 요구하고, 투명성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더 높아지다 보니 더더욱 믿을 수 없게 된다. 즉, 불신과 투명성은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더듬어 수색하다 못 믿으니 옷을 벗기 시작하고 그것마저 못 믿으니 X레이를 찍는 꼴이다. 이제는 아예 신체를 해체했다가 검사대를 통과한 후 재조립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신뢰 지수는 세계 167개국 중 107위로 최하위권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그중에서도 사법시스템이 155위로 가장 심각하다.

내가 <피로사회>에서 지적한 문제는 <투명사회>에서도 되풀이된다. 과도할 정도로 투명성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있는데, 그 시스템의 주동자를 정확히 특정하지 않는다. 주체가 자발적으로 투명함을 강요받는 시스템이 있는데, 그 시스템을 촉발한 계기 사건이나 주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 주체가 없을 수도 있다. 그 주체가 너무 분산되어 있고 상호 공조적이라서, 즉 광범위한 공동정범이라서 특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려워서 못 하는 것과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려워서 못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저자는 투명성의 강요가 “신자유주의적 명령(162p)”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스템 차원의 명령임은 분명하다. 그저 그 시스템의 핵심 주체만 빠져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신자유주의자 없이 발화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체제는 지배 없는 착취라고 말하지만(133p), 그 지배 없는 착취의 구조를 만든 주체가 없을 수는 없다. 우리가 자연발생적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구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논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회피는 저자가 인정하고 있듯, 혁명 불가능성 때문일 수 있다. 그 주체를 특정하더라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강압적으로 현상 변경을 시도할 수 없으니 그냥 “신자유주의적”이라고 퉁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이 스스로를 전시하면서 파놉티콘 보강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진정한 자발적 능동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말이다. 다시 말해, 강요된 혹은 의도된 혹은 교묘하게 유도된 자발성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을 유도한 세력에 대해 눈을 감아도 되는지가 의문이다. 또다시 말해, 진정한 자발성의 양상으로 보이는 것들 가운데 교묘하게 유도된 자발성을 섬세하게 구분해 내고, 그것을 적절하게 명명하고, 그것이 형성된 과정을 역사철학적으로 되짚으며 미래를 위한 대안적 방향을 모색하는 데 활용할 수 없겠는지가 의문이다.

물론 그냥 신자유주의적 명령이라고 뭉뚱그리더라도 우리는 다 안다. 그 명령의 주체와 공모자가 누구인지를. 하지만 날카롭게 조목조목 현상 진단을 해주던 선생님이 종국에 가서 그 주체를 꼭 집어 주지 않으니, 우리에게 전달되던 카타르시스가 급격히 반감되고, 우리 나름대로 대안을 모색해 보려 했던 시도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선생님은 우리 손을 잡고 새 영토로 향하는 선착장까지 갔지만 어느 섬으로 향할지, 무슨 배를 탈지까지는 가리키지 않는다. 선생님이 애초에 그 정도까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다. 허나 이제와서 선생님의 뒷모습을 다시 보니 처음과 달리 좀 비겁해 보인다.

또 다른 우려는 투명성 일변도로 치닫는 방향을 거슬러 저자가 찬양하는 불투명성과 에로틱의 시대로 회귀한다고 가정할 때 뒤따르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 진리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졌던 그 낭만과 숙고의 시대가 어떤 치명적 문제점들을 함께 품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저자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인용해 말했듯, 진리는 본질적으로 숨겨져 있다(170p). 또 벤야민을 인용해 말했듯 “미의 신적인 존재 근거는 비밀에 있다(49p).” 이렇게 비밀에 둘러싸인 진리는 본질적으로 진리 외의 무언가를 배제하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이다(185p). 배제의 부정성은 정보 네트워크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은 완전한 상대주의 시대이며, 나도 맞고 너도 맞으므로 누구든 무엇이든 지껄일 수 있다. 이처럼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점, 그리고 배제의 논리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중재자를 소환한다. 중재자만이 주체 개개인을 진리로 인도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중재자의 매개는 늘 의심스럽다. 역사서를 가득 채우고 흘러넘치는 엄청난 양의 피와 땀이 중재자의 오독과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선사시대의 제정일치 족장으로부터 파라오, 교황, 주교, 황제, 히틀러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중재자들이 신, 민족, 법치의 대변자를 자처했고, 정보 및 권력 비대칭성 하에서 진리 해석의 독점권을 누렸다.

투명성은 그 독점권의 분산 및 탈환을 위한 요구였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디지털 정보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그리고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기대치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실시간으로 열람하면서 국회의원들이 무슨 뻘짓을 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투명성이 그들의 연극과 난투극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지만, 그 투명성이 애초에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될 것은 단순한 난투극이 아닌 느닷없는 내전의 화염일 수도 있다.

과잉 투명성을 억제하고 숙고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정보 접근과 해석의 민주주의를 모두에게 돌려주는 일─,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현시대의 투명성 요구가 지나치므로 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투명성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전방위적 투명성으로 싸잡아 부른다면 그 호소는 정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전방위적 투명성 가운데서 ‘민주적 투명성’을 섬세하게 구분해 내는 시선도 필요하다. 민주적 투명성은 중재자의 무분별한 권한 남용을 억제하고, 정보 접근과 해석의 민주주의를 폭넓게 허용하며, 아울러 디지털 정보 및 미디어 리터러시의 평균적 수준을 한 차원 끌어 올리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모두가 CCTV에 의해 감시되고 스마트워치로 체질량을 실시간 측정하여 보고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어느 전시회를 가든지 큐레이터나 오디오 가이드의 중재를 받는 대신 자기 나름의 비평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민주적 투명성이 실현된 지평일 것이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그 안에서 진리의 옥석을 가리는 일이 중요해지는 만큼, 투명성의 요구가 강화될수록 그 안에서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투명성의 국면을 선별적으로 확장하는 일이 중요해질 것이다. 투명사회의 비극은 ‘가짜-강압적-상업적 투명성’이 민주적 투명성을 가장함으로써 심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짜 투명성은 누가 걸러내지? 투명성 심사 위원회라는 또 다른 중재자가 필요한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3. 아름다움의 구원

이제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의 구원(2015)>에 다다른다. 여기서는 긍정성 및 투명성 과잉의 시대진단을 예술 작품과 미의 문제에 투영한다. 제프 쿤스(Jeff Koons)를 비롯한 오늘날의 예술 작품은 매끄러움으로 표상된다. 매끄러움에는 촉각이 없다. 만져보았을 때 저항이 없다는 말이다. 저항은 부정성과 맞닿아 있다. 저항은 네트워크의 정보 흐름과 대비된다. 또 매끄러움은 거울처럼 보는 자를 반사한다. 작품을 통해 타자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말이다. 이것이 부정성이 거세된 긍정성의 예술이고, 과도하게 투명한 나르시시즘적 미학이다.

저자는 긍정사회의 미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미와 디지털미를, 그리고 에로틱과 포르노를 대립한다. 자연미는 거칠고 예측할 수 없다. 이것은 계산되지 않고 오직 숙고와 사유를 통해 조금씩 그 진리가 드러난다. 이처럼 가려진 진리는 에로틱하다. 반면에 디지털미는 모든 정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거기에는 표면을 넘어선 해석의 여지가 없다. 모든 정보는 측정되고 계산됨으로써만 의미가 있다. 디지털미는 더 이상 제의와 아우라의 대상이 아니며, 백화점 쇼윈도 너머의 상품처럼 전시되고 재화로 환원됨으로써만 가치를 지닌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34p, 투명사회).”라던 전작의 주장을 외형만 조금씩 바꿔 반복한다. “~~은 외설적이다.”라는 주장이 마치 세뇌의 주문처럼 되풀이된다. 예컨대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쾌는 미가 아니고 외설에 속한다. 미는 느리게 인식되고 기억 속에 남아 회상됨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110p). 물론 이 같은 주장에서 부정성의 미학을 옹호하는 선행연구의 근거는 충분히 인용하지만, 그것들이 투명성 과잉의 미를 원천적으로 이 땅에서 멸절시킬 만한 이유는 되지는 못하리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취미판단은 어디까지나 상호주관적이고, 예술의 역할은 한 두 가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예술의 경향을 좇아 덩달아 투명해지는 비평에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비평이 예술의 아우라와 온갖 정보를 낱낱이 해체하여 완전히 투명한 대상으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비평의 본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비평은 덮개를 들어 올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덮개를 가장 정확하게 덮개로 인식함으로써 미를 처음으로 전정하게 직관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48p).” 정보는 투명해지려 하나, 진리와 미는 본질적으로 가려져 있다. 여기서도 관건은 그 가려진 진리와 미를 누가, 무슨 권한으로 드러내고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예술은 자본주의와 화합하기 어렵다(84p).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매끄럽게 다듬어 빠르게 유통하려 한다. 소비주의는 탈나르시시즘화와 탈내면화를 거부한다(93p). 반면 예술은 속절없이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춰 다른 방향으로 숙고하고, 생산하고, 다시 부수는 비생산적인 과정이다. 또 예술은 작가의 내면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작가와 세상과 관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며, 작업장에서 빠져나와 공론장에 던져지는 매개체이므로 나르시시즘과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예술이 자본주의 구조에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예술은 자본주의에 빨대를 꽂아 연명하면서 동시에 그 체제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는 자기를 비판하는 그 예술 자체를 다시금 상품으로 키워내 비판의 논점을 흐트러뜨린다.

전체적 뉘앙스를 보면 저자는 진리가 산산이 바스러져 버린 포스트모던의 패러다임 자체에서 비애를 느낀다. 절대적인 개념과 진리가 어딘가 존재하리라고 믿었던 모더니즘으로 귀환을 꿈꾸는 듯하다. 촉각에는 신비감이 없고 부정성을 파괴하나(15p), 시각에는 거리감이 있고 거기서 가치 있는 사유가 나온다는 주장에서는 예술의 제의 가치와 아우라를 복원하려는 반기술주의자적 면모도 느껴진다. 이러한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저자는 실제 작가와 작품을 예시하는 일은 최소로 억제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작가라고는 서두에 등장하는 쿤스가 전부다. 오늘날 예술의 스펙트럼에 정치적 발언이 상당하고, 주류라고 할만한 작가들 가운데서도 정치적 발언이 없는 이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지만, 그런 예시는 이 짧은 에세이 모음집에서 간과되었다(그 정치적 발언의 진정성 여부는 증명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으니 일단 논외로 하고). 저자는 이 짧은 에세이집에서 공정하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전체 예술계의 스펙트럼을 아울러 균형 있게 바라보는 일 자체를 애초에 의도하지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가 품고 있는 우려, 즉 긍정성 및 투명성 과잉의 시대에 편승하는 예술 경향의 득세와 맞물린 사례만을 가지고 편향된 미학을 펼쳤다. 비평의 역할 자체가 편향된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저자의 논지는 정당하다. 다만, 이것을 읽는 독자에게는 저자가 추구하는 미학이 오늘날 예술의 전체 스펙트럼을 충분히 아우르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비평적 독해력이 필요하다.

여기서도 <투명사회>에서 지적한 문제점이 반복된다. 매끄럽지 않은, 가려져 있는 미와 진리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분별해 보편적 관객에게 알려줄 중재자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진리를 분별해 낼 능력을 갖춘 소수의 교양인만 예술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만약 중재자가 필요하다면, 그들의 오독과 그릇된 욕망의 투영은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자본주의적 경향에 최적화된 예술의 생산만을 부추기는 주동자와 공모자를 명확히 분별해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한병철 유니버스에서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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