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로스쿠로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이자 낭만적 천재 예술가의 극단화된 초기 프로토콜 같은 인물이다. 미술사의 숱한 막장 드라마 가운데서도 살인자라는 최악의 경지까지 도달한 인물은 카라바조와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뿐이다. 그는 지극히 세속적인 인물들을 통해 지극히 성스러운 인물을 그려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가장 큰 대중적 찬사를 받는 화가였음에도 가장 어두운 뒷골목에 매료되었고, 거기서 소재를 찾아 헤맸다. 그의 작품에서 성(聖)과 속(俗)은 마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처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타락, 혁신, 살인, 도피, 신분세탁, 그리고 베일에 둘러싸인 죽음까지, 언제 영화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카라바조의 삶이 시의적절하게 극장에 걸렸다. 2022년에 제작된 영화지만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과 맞물리도록 국내 개봉 시기를 맞춘 것 같다. 극장에서 화가를 다룬 전기 영화를 본 것은 세잔과 에곤 실레 이후로 오랜만이다.
영화는 한 인물을 서사적으로 촘촘히 따라가는 전기적 구성 대신, 수련 시절부터 살인, 도피, 죽음에 이르기까지 제법 긴 시간을 파편적으로 찍고 넘어가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관찰식 구성의 중심에는 수사관이 있다.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교황의 명을 받은 수사관이 카라바조를 둘러싼 의혹들을 수사하면서 여러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고 현장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 카라바조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는 식이다. 수사관은 강한 기독교 보수적 신념을 지닌 인물로, 카라바조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무자비한 고문과 학대도 서슴지 않는 냉혹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쫓는 피의자의 천재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점점 그 인간적 면모에 빠져드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강한 보수적 신념을 지닌 인물이 주인공에게 점차 매료되어 어느새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는 모티브는 레미제라블의 자베르(Javert)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물론, 카라바조는 장발장과 달리 선의를 베푼 적이 없다.
카라바조의 죽음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복수 살해설’을 채택한다. 스스로 영화 제목의 ‘그림자’가 자신이라고 칭하는 수사관은 카라바조의 적들이 복수를 실행하도록 묵인함으로써 살해에 가담한다. 아무래도 말라리아, 홍역, 탈진 등 질병에 의한 객사(客死)보다는 그편이 더 영화의 극적인 마무리에 더 적합하리라고 제작진은 판단했을 것이다. 복수의 순간, 카라바조의 목덜미를 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칼날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참수>에 그려진 그 칼날과 겹친다. 카라바조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불안에 평생 시달리며, 언젠가 이 숙명과도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별안간 자신을 덮치리라고 또렷이 인식했을 것이다. 일평생 남겨둔 작품도 몇 점 없는 그가 유난히 천착했던 참수의 모티브는 자기 삶의 끝에 대한 막연한 예언이자 궁극적인 두려움이었고, 재능이 허락하는 여건하에서 최대한의 정성을 쏟은 고해성사였으며, 작품에 몰입한 순간 동안만이라도 불안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그 결말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영화의 제작자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화가의 자화상으로 표현된 골리앗의 얼굴은 단순한 참회의 상징이 아닌 카라바조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복선이었다는 것이다. 영화적 상상력으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진실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


영화의 전반적 만듦새는 카라바조의 이름값에 못 미친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인지 풀샷을 최대한 줄이고 한정된 세트에서 상반신 위주로 찍다 보니 영화라기보다는 드라마, 혹은 다큐 속 재현 장면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특히 콜론나 부인을 열연한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만 음성을 더빙으로 처리한 부분은 만듦새를 가장 엉성하게 만든 요인이다. 애초에 더빙할 작정으로 프랑스 대배우를 캐스팅한 것인지, 아니면 편집 과정에서 도저히 원본 오디오를 쓸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사후 더빙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싱크가 어긋난 더빙 탓에 위페르만 나오면 몰입이 안 되고 ‘MBC 서프라이즈’ 수준으로 희화화된다. 왜 훌륭한 배우를 이런 식으로 소모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다. 그나마 의상과 로케이션의 리얼리티는 나쁘지 않았다. 17세기 로마의 왁자지껄하고 난잡한 느낌을 잘 살렸다. 영화 속 연기와 공간 재현이 실제 회화와 절묘하게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카라바조의 오랜 팬들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있었다. 영화의 시각적 미덕은 딱 거기까지다.
천재성이란 그 시대에 허용된 제도적, 문화적, 기술적 임계점을 가장 절묘하게 건드리면서도, 그 경계를 완전히 뚫어버리지는 않는 적당한 수준의 혁신으로 증명될 수 있다. 만약 경계를 완전히 뚫어버린다면 천재성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다. 카라바조는 로마의 교회 권력이 제한하는 범위에 가까스로 걸치는 가장 급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권력에 맞선 예술가의 삶은 그 자체로 고난과 역경이었지만, 그 결과물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감동으로 영원히 회자된다. 카라바조가 모델로 삼은 주정뱅이, 사기꾼, 창부, 포주는 오늘날 성스러운 서사를 덧입고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매일 수천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아름다움에는 힘이 있고, 그래서 공포를 유발하지만, 결국 어떤 시련에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영화 종반부에 카라바조를 마주한 수사관은 이 세상을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의 끝없는 투쟁으로 단순화하며 카라바조를 악한 세력에 종사하는 예술가로 몰아세운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이 장면은 끝없이 반복된다. 아무리 극명한 키아로스쿠로라도 회색지대는 분명 존재한다. 수사관은 카라바조 회화의 극명한 명암 대비에서 오는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에 결국 눈을 떴지만, 그 대비의 회색지대는 끝내 섬세하게 읽지 못했다. 그런 둔탁하고 좁은 시선으로는 카라바조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파국을 막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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