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켐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와 함께한 50년」

Living with Leonardo: Fifty Years of Sanity and Insanity in the Art World and Beyond

진실의 수호자

이 책은 르네상스의 아이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어떤 화가인지,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 논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기적으로 따라가지도 않는다. 저자는 주인공의 주변부를 맴도는 단순한 평자가 아니다. 저자는 이 회고록에서 중심에 선다. 생물학 전공 출신의 미술사학자 마틴 켐프(Martin Kemp)는 우연과 필연이 겹쳐 다빈치 연구에 뛰어 들었고, 50년 동안 한 우물을 파게 되었다. 이제 그 경력의 거의 마지막 지점에서 지난 과정을 돌이켜 보고 있다. 육체적·정신적 고난도 있었고, 말 못 할 억울함도 있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레오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고, 또 독점적 위치에서 그의 작품들을 마주하고, 세상에 레오의 이야기들을 펼쳐 놓을 수 있음이 크나큰 특권이자 영광이었다는 것이다. 읽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켐프는 어느 날 BBC 견습 PD들의 제안을 받아 레오의 작품 속 물 역학에 관한 프로그램을 자문하게 되었다.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자연과학도 출신인 미술사학자로서, 언제라도 레오와 인연이 닿는 일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레오를 처음 만난 그 순간에 분명 동류를 알아보고 끌리는 모종의 마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과학적 사고에 기반해 세상과 미를 바라보고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탐구하여 자기 나름의 표현형을 남기는 일. 그것이 레오가 당대 누구보다도 앞서서 누구보다도 잘했던 일이고, 또 그것이 레오에 관한 저자의 연구였다.

좌충우돌 학생 시기에 이탈리아로 떠난 미술사 여행기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누구와 어디서 어떤 작품을 봤는지, 그리고 어떤 교수를 만나 학문의 길에 들어서고 교수로서 경력을 시작하게 됐는지 등 자전적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날카로운 관찰력과 유머가 적절히 배합되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각종 추천 도서, 여행기, 취업기, 투고한 논문들,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인맥이 형성된 과정 등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미술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관음증적 쾌감을 줄법한 내용이다.

각 장은 주로 레오의 주요 작품을 둘러싼 연구와 논쟁들을 다룬다. 1, 2장은 <최후의 만찬> 복원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소회를 담았다. 다른 주제들과 달리, 이 주제에 있어서 저자는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거나 주도적 위치에서 프로젝트를 이끈 것 같지 않다. 복원이 중심 주제를 이루는데, 저자 자신이 복원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식당 벽화로 <모나리자>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은 레오가 직접 고안한 혁신적인 프레스코 기법이 적용됐지만, 애석하게도 당시 이 천재는 작품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당대에 누구라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빼어난 구도와 자연주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지만, 질료와 공정 측면에서 보자면 완성과 동시에 빠르게 파멸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작품이었다. 원래부터 쉽게 훼손되도록 그려진 작품이 여러 차례 전쟁과 파괴와 복원을 거치면서 거의 누더기 수준의 물감 얼룩이 되었다.

근래 가장 대대적인 복원 프로젝트는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된 피닌 브람빌라 바르실론 박사(Dr Pinin Brambilla Barcilon) 팀의 작업이었다. 작품 복원에 22년이라는 시간이 보장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화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 이 정도의 세계적 주목도를 가진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이 많이 훼손된 상태라면 정부는 어느 정도의 복원 기간을 보장할까? 최대 5년, 현실적으로는 2~3년이다. VIP 또는 주요 보직자의 임기 중에 결론이 나오고 대대적인 기자 간담회와 포토타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숭례문 복원의 사례를 다시금 떠올리면 불에 타야 했던 것은 그 문화재가 아니었음이 명백해진다.

무수한 전문가와 집단지성이 개입되었고, 투명한 절차와 일관된 리더십까지 보장되었음에도 22년의 복원 과정은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레오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자마자 붓을 던져버린 그 순간을 촬영한 초고해상도의 컬러 사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덧칠에 덧칠에 또 덧칠을 더한 그 작품을 복원하는 과정은 무엇이 원본인가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겼고, 그 의문은 ‘이 작품은 이럴 것이다, 아니 필경 이래야만 한다.’라는 편견의 영향을 받았다. 또 모두의 편견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그 차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금 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고의 복원가와 전문가들이 최상의 결과물을 내어놓더라도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고개를 든다. 심지어 완벽한 원본의 이데아라는 합의에 이르렀다고 한들 명백한 훼손의 과정과 흔적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또는 저마다의 발언권을 갖는다. 작품 복원의 기준과 관점은 동시대적일 수밖에 없고,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최상의 복원이라는 합의에 가까스로 도달하였으나, 우리의 미래 세대는 현재의 그 결정을 원망할 수도 있다. 저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완벽하고 매끄러운 현대화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불 보듯 뻔한 훼손을 가만히 방치해서도 안 된다고 보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다만, 복원은 어쩔 수 없이 (동시대 주류 사회의) 합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으니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너무 심하게 분탕질 치지는 말고 받아들이자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이때 가장 경계할만한 행위는 거의 조작에 가까울 정도로 자의적인 이미지 몇 점을 들고 와 ‘비포-애프터’를 과장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짓이다. 과정에 충분한 숙고가 있었다면,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도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다.

3장에서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둘러싼 흥미로운 연구결과들을 다뤘다. <모나리자>를 르네상스 시대 궁정 시와 연계하여 해석하고, 그림에 관해 밝혀지지 않은 객관적 정황들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참신했다. 당대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시선을 끈 명작들은 궁정인들에 의해 시로 재해석되어 구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다시 시가 되어 창작이 순환되는 사례도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비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이처럼 그림을 주제로 한 시가 일종의 비평적 선례로 해석될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 만큼, <모나리자>는 암호설, 위작설, 모델 관련 황당 주장(자화상이라는 둥) 등이 끊이지 않는 작품이다. 저자는 이 모든 황당한 주장에 앞서 과학적·문헌적 증거로 응수한다. 증거가 있다면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 과학적 분석을 통해 원작자가 수정한 흔적이 명백히 남아 있다면, 그런 흔적이 없는 작품에 비해 원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명백한 진리다. 이때 그가 흔들리지 않고 견지하는 기준은 ‘오컴의 면도날’ 이론이다. 가장 단순하고도 신뢰할만한 가설만 채택하자는 것이다. 정보홍수 시대에 놓치기 쉬운 진리다.

4장에서는 거의 유사한 그림이 두 장소에서 소장되고 있을 때, 무엇이 진짜인지를 궁금해하는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호기심을 뒤집는다. 거의 유사하게 생긴 두 작품이 있을 때, 일반적으로 둘 중 어느 한 작품만이 진짜일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있고, 사람들은 각자 이해관계와 소속감, 기타 주관적 느낌 따위를 따라 어느 한 편에 선다.

<성모와 실패>의 두 버전에 대한 치밀한 과학적 분석결과, 두 점 모두 진품으로 볼만한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수정의 흔적이 역력했고, 무엇보다도 고민 끝에 제거된 인물과 배경 요소들이 명확했다. 또 두 작품이 서로를 모방하면서 유사한 형태로 굳어졌는데, 그 모방의 중간 과정을 본뜬 제3의 위작도 존재한다. 그 위작은 발견 초기에 터무니없는 개량형이라고 판단되었으나, 원작의 방사선 검사 결과 위작에서 드러난 구성적 요소들이 원작의 바탕에도 깔려 있음이 드러났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두 명화는 혁신과 압력 속에서 절충점을 찾은 결과물이다. 레오 본인의 관여도가 어느 쪽에서 더 큰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두 작품 모두 레오가 승인한 공방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레오의 진품일 수 있다는 제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5장에서는 그러한 제보 가운데 하나가 정말 진품으로 밝혀지는 과정을 다뤘다. 주인공은 어느 고서에서 뜯긴 한 장의 드로잉인 <비앙카 스포르자의 초상>이다. 이 작품에 관한 설명에서 저자의 글은 유난히 장황해진다. 아마도 저자가 개입했던 숱한 프로젝트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내내 과학자적 냉철함을 유지하던 켐프는 이 작품의 외형 분석에서 갑자기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로 빙의한다(208-209p). 저자는 이 작품을 본 순간 단박에 매료되었고, 광학 조사와 지문검사 등을 통해 진품일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또 양피지 한 장이 뜯긴 고서를 우여곡절 끝에 찾아 거칠게 찢긴 면에 이 작품을 대어 본 결과 작품이 배치되었던 맥락까지 확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이 아름다운 왕녀를 진품으로 인정받기 위해 온갖 섬세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유자의 경박스러운 의사결정과 검사자에 대한 인신공격이 겹쳐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강한 환멸감을 남겼다. 이처럼 개인이 소장한 레오의 작품들은 엄청나게 복잡한 이해관계들에 노출되어 있고, 이 모든 관계인을 체계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간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다.

6장은 앞선 다른 장들과 달리 특정 작품에 집중하지 않고, 레오의 작품 여러 점을 둘러싼 추잡한 송사들과 추문을 다룬다. 어떤 평범한 작품이 나중에 레오의 것으로 밝혀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때 과거 소유자들에 의한 송사가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믿고 따를만한 것은 역시 과학적 접근이지만, 많은 주류 학자들은 여전히 버나드 베런슨(Bernard Berenson)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감식안을 내세운다. 허나 아무리 정교한 감식안과 배경 지식을 가졌다고 한들 인간은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히기 쉽다. 감식안은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감식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동안 배워온 것, 그리고 지금까지 일궈온 학술적 위상과 권위에 기대 그 아리송한 능력을 신비화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고 싶은 것이다. 또 어떤 방향에 대한 편향적인 의견을 굳게 견지하는 사람은 그 어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증거도 믿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켐프는 그간 지식인으로서의 공적 책무에 따라 레오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에 개입하고 진위논란에 대한 생각도 공공연하게 밝혀 왔으나, 긴 세월 너무나 많은 억측과 모욕에 시달린 끝에 이제는 그 책무를 내려놓으려 한다.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발달은 누구나 지식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었으나, 그만큼 많은 사이비 연구자와 불량 정보와 양극화된 편향성을 양산해 냈다. “IT 시대에 공적 서비스라는 개념을 지속할 수는 없다(252p).”

7장은 가장 최근에 발견되어 어마어마한 숫자와 뒷말을 남긴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를 다룬다. 레오는 기본적으로는 자연주의자였지만, 어떤 이미지들에 관해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통용되는 회화적 규범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고, <모나리자>와 함께 이 작품은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분명 누군가를 보고 묘사했겠지만, 이 작품에서 모델을 추적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엄격한 동작, 견고한 구도, 자애로움과 단호함이 공존하면서 관객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은 이 세상을 한 손에 든 채 축복하는 최후의 구원자에 관한 레오의 아이콘이다. 이 작품에 대한 과학적 분석결과 손의 구도가 조금씩 수정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어 원작임이 유력해 졌다. 이례적으로 이 그림의 초점은 구원자의 오른손에 닿아 있고, 얼굴은 오히려 아웃포커스가 적용되어 뿌옇게 보인다. 광학적 원리에 정통했던 레오만이 살릴 수 있는 디테일이었다.

레오의 구세주는 여러 아이러니에 걸쳐져 있다. 인류를 구원하는 신성성과 대비되게 사기 구매와 관련된 법정 다툼에 휘말렸다. “예술품 시장은 규정이라고는 없는 정글로, 어마어마한 몸값의 축구 선수 이적 시장보다도 더 무질서하다(288p).” 또한, 기독교 세계의 구세주이지만 이슬람 무늬 옷을 입고 있다. 그 무늬가 예견이라도 한 듯이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사우디 왕자의 손에 들어갔다.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 대통합을 이뤄낸 진정한 구세주라고도 할 수 있겠다.

8장에서는 미술사 방법론 중 하나로서 과학적 기법에 대하여 더욱 상세히 논한다. 주류 미술계는 과학기법을 도입하는 데 여전히 주저하고 약간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자연과학도 출신인 켐프는 다빈치 연구에 있어서 과학적 기법 도입을 주도했지만, 그도 역시 일정 부분 회의적인 부분이 있다. 어떤 최첨단 장비와 방법론을 사용하더라도 최종적인 해석은 결국 전문가인 사람이 내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결점 결론이란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보는’ 과정을 기술에 맡기더라도, 결국에는 사람이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323p).” 이 말은 물론 과학 없이 눈으로만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측정과 해석은 상호보완적으로 나란히 걷는다. 또 정답을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명확한 결론처럼 보이더라도 여기에는 해석의 오류가 개입될 수 있으며, 새로운 기술에 의해 지금의 가설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론 중에서는 연대측정보다 지문이나 DNA가 더 신뢰할만하다. 연대측정은 방법론상 너무 긴 시간의 오차 범위를 제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질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 된다.

9장은 레오의 아름다운 과학문서, <코덱스 레스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안에는 다빈치가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숱한 시도들이 아름다운 삽화와 휘갈겨 쓴 메모로 뒤죽박죽 뒤엉켜 있다. 물론 우리 눈에는 뒤죽박죽일지 몰라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이 르네상스 천재에게는 나름의 체계로 엮여 있다. 특히 사물과 인물의 움직이는 역학을 마치 동영상처럼 연속되는 삽화로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인데, 그는 미래주의자보다 앞선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였다. 움직임은 어느 한순간을 포착해 분절된 것처럼 보이게 하더라도 결국 그 본질은 연속되는 무한이다. 또 그 대상을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무한은 또다시 다른 차원의 무한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레오는 동영상이 없던 시대에 그 연속과 무한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트를 채워 나갔다. 레오가 꿈꾸었던 이미지는 이제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만나 얼마든지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켐프는 여러 후원자를 만나 <코덱스 레스터>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재구성하고 배포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언제 바스러질까 조마조마했던 이 고문서는 일단 CD롬으로, 이어서 웹사이트로 재탄생하면서 다빈치의 선구자적인 시선과 마주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미술사적 연구는 최신의 디지털 기술을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고, 또 그 생명력은 새로운 창조의 영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10장은 저자가 직접 기획했던 다빈치 관련 전시들의 뒷이야기다. 전시 기획의 생생한 에피소드와 장막 뒤에서 묵묵히 고생했던 사람들, 그리고 작품 대여를 위한 국제적인 암투가 숨 막히게 펼쳐진다. 세계 유수의 공공 미술관들은 작품의 대여를 국제적 거래의 수단으로 쓰기도 하고, 일종의 담보물이나 심지어 인질로 쓰기도 한다. 작품을 빌릴 때는 대여자의 구미에 맞는 최적의 아부와 미사여구가 총동원되어야 하며, 심지어 대여자가 원하는 제목으로 표기하고 설명문 한 글자도 멋대로 수정해서는 안 될 때도 있다. 그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도 작품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언젠가 명백한 진리마저 서서히 흔들리고 말겠지만, 다빈치의 작품이라면 타협은 불가피하다.

이 장에서 소개하는 켐프가 기획했던 전시들은 모두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우리는 현장에 가보지 못했으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사실 전시 기획자가 말하는 자기 전시에 대한 회고는 늘 그런 식으로 정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과연 실패한 레오의 전시라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11장에서는 레오를 둘러싼 온갖 괴담들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에게 가장 시끄러운 뜬소문들이 난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다빈치 작품들의 기묘한 신비감과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 나간 진보성에 의해 더더욱 부풀려졌다. 「다빈치 코드」를 비롯해 레오에 음모론을 덧씌운 각종 콘텐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업을 형성할 정도로 성업 중이다.

다수의 괴담 유포자들은 자신의 터무니 없는 주장에 어느 정도 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하며 대중을 현혹한다. 하지만 교양인이라면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받아들일 때 “사실과 사실적인 상상을 분리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엮어서는 안 된다(396p).” 역사적 탐구의 과정에서 증거가 없는 부분은 어느 정도 상상으로 채워야 하겠지만, 그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실재에 반하는 가상을 만들고, 그 거짓을 진실의 무대에 올려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거짓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사소한 관심조차 쌓이고 쌓이면 상당한 돈줄이 된다. 그리고 관심과 돈에 의해 움직이는 모든 세계는 진실을 멋대로 재창조하는 이들의 유혹에 휩싸이기 쉽다. 진실과 거짓이 충돌할 때, 거짓이 오히려 돈이 된다면 그것을 외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루브르조차 「다빈치 코드」에 기반한 투어 코스를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판국이다.

저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와 그 대척점에 있는 많은 괴담 유포자들에서 보듯, 지금 우리 눈앞에는 다빈치에 관한 매우 광범위한 진실의 폭이 자유분방하게 놓여 있다. 그의 본질을 정확히 알려면 윤색되고 신비화되고 심지어 가상화된 미디어 속 다빈치에 현혹되지 말고 그의 작품과 메모들, 즉, 1차 자료에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작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술사 연구자의 회고록이 드문 상황에서 이토록 알찬 내용과 읽는 재미로 가득한 책이 출간되고 또 우리나라에서 번역됐다는 점이 놀랍다(번역 수준은 처참하지만). 자기 연구 대상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학문적 고뇌가 이토록 고스란히 담긴 책은 정말 흔치 않다. 책 전반에 걸쳐 미술사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과학적 접근의 중요성, 그리고 여론과 괴담에 휘둘리지 않는 진실 추구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 메시지가 울림을 주는 까닭은 저자 본인이 그렇게 몸소 실천했다는 진정성이 에피소드 곳곳에서 절절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말의 성찬, 경망스러운 상업화, 신파조의 신비화에 마구잡이로 휘둘리는 우리 미술사학계, 비평계, 출판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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