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deric Spotts, Hitler and the Power of Aesthetics
“문화와 야만의 결합이야말로 히틀러 제국의 요체다.”
194p
우리 시대의 악학은 이제 막 집필되는 형국이다.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다. 제목만 보고서는 히틀러(Adolf Hitler)가 대중을 현혹하는데 사용한 미학적 기술들이나 책략들이 낱낱이 파헤쳐지리라고 생각했다. 외교관 출신의 문화사가인 저자는 그러한 뻔한 접근 대신에 예술가이자 폭군인 히틀러의 괴팍하고도 모순적인 측면을 집중 조명했다. 거기에는 그럴싸한 전략이나 의도 따위가 없다. 로드맵도, 명분도 없다. 히틀러는 자신이 옹호하는 예술적 가치를 대중에게 강요했고, 그중 일부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예술의 역사에서 강요된 취향이 성공을 거둔 적은 없다.
히틀러의 정치 역정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도시 풍경화나 그려 팔던 소심한 청년 예술가가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잠재능력과 천운에 힘입어 국가사회주의 제국의 수장에 오르고, 현실감각과 괴리된 미적 취향을 끝없이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 반복된다. 실로 이 희대의 광인은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려는 마음보다는 예술가로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꿈이 더 컸다. 정치인으로서 본인이 처한 위치는 그저 민족의 운명에 도구로 내던져진,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만 받아들였다. 언젠가 이 제국의 건설이 끝나고 나면, 본인이 추구하는 그야말로 ‘아리안적인’ 예술에 파묻혀 영원히 안식할 수 있으리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사실 그의 몰락은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분명 언젠가 찾아올 종착지이긴 했으나, 그의 무분별한 예술적 갈망이 그 종식을 더욱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가 현실도피적인 미적 기념비의 건설에 그토록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음악과 그림이 아니라 전장의 병사들에게 조금만 더 인격적인 관심을 가졌더라면, 죽은 자를 기릴 시간에 산 자들을 보살폈더라면, 오페라극장보다 함선이라도 한 척 더 건조했다면 인류의 비극은 연장되었을 것이고, 국가사회주의 제국의 국경도 더 넓어졌을지 모른다. 히틀러의 예술 집착은 그를 기상천외한 악마 제국의 수장으로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였고, 동시에 그 정점에서 그를 끌어 내린 자해수단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열정에 미치지 못하는 재능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다. 히틀러의 예술에 대한 열망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이었다. 다만 재능이 그 열정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고, 자기 객관화 수준도 형편없었다. 청년 시절에 그가 그린 그림은 늘 도시 풍경이었다. 원근감과 자연주의가 뛰어나고 낭만적 풍경의 정취도 살아 있는 그림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에는 인간이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건물의 부속물처럼 뻣뻣했고, 구색만 맞춘 수준이었다. 그의 시야에 인간은 없었다. 늘 자신이 속한 민족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신고전주의적이고 육중한 양식의 건물만이 먼저 들어왔다. 정서와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배제된 관광 엽서 같은 도시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카데미 입회 시험에서 두 번이나 낙방했던 것도 당연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위대한 예술가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청년 히틀러는 하루에 한 점씩 수채화를 찍어 파는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술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급급했던 질풍노도의 청년 예술가에게 전쟁은 오히려 천운이었다. 일상이 전쟁인 자들에게 진짜 전쟁은 신이 내린 기회가 된다.
인간이 없는 풍경. 청년기 그의 생계 수단이었던 수채화의 주제의식은 그가 국가사회주의 제국의 수반이 된 이후에도 이어진다. 스케일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가 직접 기획한 기념비와 제국의 핵심 거점 도시 청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거기에는 차갑고 직선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의 육중한 건물들만 위압적으로 민중을 내리누른다. 그 앞에 도열한 군인들도 영혼 없는 유기물들의 집합체일 뿐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비로 환원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혀가 닳도록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외쳤지만, 정작 그 아리안족을 구성하는 개별 원자가 무엇인지는 관심 없었다. 그 망각의 자리에는 역시나 차가운 기념비만 우뚝 서 있고, 그 주위로 바그너의 우직한 선율만 흐른다. 그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
또 다른 패착은 그가 옹호한 예술이 무엇인지를 핵심 참모와 일반 대중은 물론 본인조차 정확히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명확히 정의되었더라면, 그리고 명확히 전달되었더라면 간이고 쓸개고 언제든 내줄 듯했던 간신배들은 그것을 따랐으리라. 하지만 진정 히틀러가 사랑한 무언가는 영원히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그 애매함 속에서 권력의 신비는 고조되었다. “독재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바로 독재자 이외의 누구도 무엇이 허용되는지 잘 모를 때이다(138p).”
일단 혼혈의 냄새가 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한다. 특히 유대인의 털끝이라도 스치고 지나간 양식이라면 뿌리를 뽑아야 옳다. 그 본보기가 모더니즘이었다. 시각예술에 있어서 신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의 언저리만 서성거렸던 그에게 모더니즘은 그야말로 데카당이었다. 하지만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모든 양식적 결과물들을 모조리 소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바우하우스 출신에게 공공건물을 맡기기도 했고, 저명한 모더니스트들에게도 결정적인 단죄의 순간에는 짐짓 못 본채 외면했다. 예술가들이 정치적으로 아리송한 태도를 보여도 용서했다. 관대한 지도자여서가 아니었다. 그저 예술가란 족속들이 원래 종잡을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하다는 식의 무시에 가까운 태도였다. 이처럼 지침과 행동이 다르고 일관성이 없다 보니 일선에서는 혼란만 가중됐다. 무엇이 절대자의 진리인지 명확하지 않은 세상에서는 해석의 권력을 독점하려는 중재자들이 호가호위하며 위세를 떨치는 법이다. 그것이 침몰의 전조다.
자유는 예술의 본질이다. 그것을 망각한 국가사회주의 예술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모더니스트들을 내친 자리에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낼 새로운 예술가들을 가득 메우기 원했던 히틀러는 가능성 있는 씨앗을 엄선했고, 그들에게 호화로운 스튜디오와 종신직 같은 막대한 후원을 퍼붓고, 프로파간다 전시의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초장부터 실패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을 정도의 미감은 있었다. 세계를 놀라게 할 국가사회주의의 거장을 탄생시키려는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망했고, 자존심 강한 히틀러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쫓겨난 예술가들은 하는 수 없이 천박한 자본의 나라 미국에 정착했고, 거기서 우리가 귀에 닳도록 들은 오늘날의 현대 미술사가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어부지리가 또 없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머리말보다 앞서서 ‘이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로 시작한다. 일종의 ‘서문의 서문’이다. 이 단락에서는 이 책이 발간되고 나서 터져 나온 몇몇 논쟁을 살짝 깔아 둔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단에서 얼마나 찬사를 받았는지가 중점적으로 논의된다. 이 자화자찬은 히틀러에 관한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느껴질 수 있는 껄끄러움에 대한 완충지대다. 읽기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개인 서재라면 상관없겠지만, 일반적으로 공공장소에서 히틀러에 관한 책을 읽는 행위는 다소 꺼려질 만한, 금기시되는 행위가 맞다. 희대의 악마에 대한 앎이 그에게 뭐라도 이유를 주게 될까 봐, 그럴싸한 서사를 부여해 줄까 봐 두려운 것이다. 나아가 그의 추종자나 동류로 취급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평균수준 이상의 비판적 독해력을 가진 독자라면 단순히 텍스트에 휩쓸려 버릴까 두렵다고 모든 앎의 기회마저 팽개칠 필요가 없다. 그가 설령 순수악이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캐릭터로서,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가 흥미롭지 않을 이유는 없다(610p).”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악이 껄끄럽다고 그것을 짐짓 모른 체한다면, 오히려 부지부식간에 그 악에 잠식될 위험성만 키우는 격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야만과 폭력과 독재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다시금 지구촌 곳곳에서 그 더러운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금 역겨움을 억누르고 히틀러의 미학을 생각해야 할까. 악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새로운 옷을 덧입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악행의 기저에는 유사한 공식이 있다. 반복된 악행을 꼼꼼히 되짚어 보는 일은 그와 같은 사건의 새로운 전조를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준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시민들이 네로를 철저히 공부했다면, 히틀러 정권의 탄생까지는 막지 못했을지언정 그의 폭주에는 제동을 걸 수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 우리 손에는 네로에 이어 히틀러까지, ‘자아도취적 예술가형 독재자’의 두 전형에 대한 교보재가 들려 있고, 그것을 꼼꼼히 비교하다 보면 놀라운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세 번째 전형이 우리 곁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우리가 그 전조를 놓치게 될까?
작금의 현실을 둘러보면 엄청난 악의 전조가 삼류 소설의 복선 마냥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도처에 덕지덕지 널브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애써 눈을 감는 이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글로벌한’ 현상이다. 이들이 지금 눈 감고 있는 악은 네로-히틀러 유형이 아니다. 새로운 유형이다. 그러니 이 새로운 유형의 욕망, 패턴, 전략, 목적지에 대한 새로운 앎이 필요하다. 비판도, 회피도, 결집도 앎에서 출발한다. 악을 아는 것이 악에 동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악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악을 아는 것이다. 히틀러의 미학에 대한 ‘악학’은 프레더릭 스팟츠(Frederic Spotts)가 그 개론을 잘 정리했다. 우리 시대의 악학은 이제 막 집필되는 형국이다.
“사고를 통제하고, 존경을 얻으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을 기념하게 하려고 예술을 활용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과대망상에 빠진 모든 권력자가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이다.”
6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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