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alind E. Krauss, Under Blue Cup
토대로 돌아오라
작용은 반작용을 부르기 마련이다.
전후 모더니즘의 끝자락에서,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매체의 물리적 본질로 돌아가는 것만이 당대의 미학적 책무라며 추상 표현주의로 대표되는 뉴욕 화파를 치켜세웠다. 마초적 개척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린버그의 페르소나들은 르네상스 이후 줄곧 또 하나의 창문 역할에 만족해야 했던 캔버스의 낡은 쓰임을 일신했다. 이제 캔버스는 그 평면 너머에서 원근법적 착시의 공간을 창출하라는 사명을 버리고 평면이 그저 평면 그 자체임을 긍정하게 되었다. 캔버스는 캔버스일 뿐, 더는 환영적 공간의 토대가 될 수 없었다. 뉴욕 화파의 개척자들은 마구잡이로 흩뿌려진 안료를 통해, 혹은 아무런 형체도 암시하지 않는 색채의 덩어리를 통해 캔버스 자체의 평평함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를 통해 그것이 걸린 벽면에 대비되는 확연한 경계선이 도드라졌다. 이제 작품이 공간과 조화를 이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작품은 공간을 뚫고 나와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평면이 그저 평면 그 자체임을 뻔뻔스럽게 인정한 순간, 물리적 매체의 새로운 쓰임새는 예상치 못한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그 변혁이 세계사적 흐름 속에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의 이동과 맞물려 절묘한 효과를 창출했다. 찬란했던 유럽은 폐허가 되었고, 아방가르드는 살아남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린버그는 매체의 물리적 본질을 진솔하게 암시하는 작품만이 이 시대의 요구라며 뉴욕 화파를 정당화했다. 그에게 다른 미학적 대안은 없었다. 그렇게 모더니즘 회화의 전성기는 대서양 너머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이어갈 줄 알았다.
수명은 생각보다 짧았다. 뒤샹(Marcel Duchamp)과 다다가 쏘아 올린 공이 대서양 건너편에 떨어졌다. 매체의 본질과 평면성에 대한 강조가 도를 넘을수록 그와 반대되는 미적 욕망은 슬금슬금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매체의 물리적 조건이 강조될수록 조건을 거스르려는 반작용도 덩달아 커졌다. 그 반작용은 시대착오적으로 다시 환영주의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아닌, 매체 자체를 파괴하는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매체로 삼아 예술의 성역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물리적인 실체 없이 오직 작가의 머릿속에서 개념적 구상으로만 존재하는 작품에 대한 실험이 이어졌다.
크라우스(Rsalind Krauss)의 실험적 글쓰기는 이러한 반작용에 다시금 따라붙는 반작용이다. 즉, 반작용의 반작용이다. 그렇다고 ‘반-그린버그’를 상대하려고 ‘친-그린버그’의 길을 택하지는 않는다. 크라우스에게 둘 중 어느 한 진영만 골라야 한다고 협박하면 아마 마지못해 ‘반-그린버그’를 선택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반-그린버그’를 향해 돌직구를 날리는 까닭은, 현시점에 그들만 살아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에 들어간 이들에게 할 이야기는 없으니까.
저자는 물리적 매체가 무화된 시대, 즉 포스트미디엄 시대를 불러온 세 가지 계기를 논한다. 첫째는 1970년대 미니멀리스트들이 물질들을 단순화시키다 못해 종국에 최소한의 즉자적 사물마저도 거부한 일이다. 개념미술 이론화의 선봉에 섰던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이를 작품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 of art object)라고 불렀다(그린버그는 한때 “루시 리파드 같은 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요즘 미술계는 그렇게 나빠졌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둘째는 개념미술가들이 작품이란 예술의 사전적 정의 같은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선언한 일이었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가 의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담은 텍스트와 의자를 찍은 사진, 그리고 물리적 의자를 나란히 갤러리에 가져다 놓은 순간 이러한 인식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제 작품은 특정한 물리적 매체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셋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자리에서 피카소(Pablo Picasso)가 내려오고 그 자리를 뒤샹이 차지하게 된 사태였다. 두 아이콘의 자리바꿈은 모더니즘의 종식과 개념미술의 부상을 보여주는 인식적 변화를 드러내며,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이 세 가지 계기가 촉발시킨 개념미술의 향연은 미술계의 질서를 뒤흔들었다. 보이는 것보다는 내재한 의미가 중요하다. 화이트큐브의 전시질서는 뒤집어엎어야 한다. 정치적 의미가 없다면 작품으로서 의미가 없다. 보존하기보다는 망각해야 한다. 물질보다는 차라리 관계를 택하는 것이 낫다. 물리적 즐거움이란 정치적 도덕주의보다 저열한 것이다. 등등등.
크라우스는 개념과 해체의 홍수가 이제는 선을 넘었다고 느낀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물리적 매체를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크라우스는 그들에게 물리적 매체만 보면서 아등바등하지 말고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를 보라고 한다. 크라우스가 정의하는 기술적 토대란 중세 길드의 규칙 같은 것이다. 중세의 길드는 다루는 재료별로 세분화되어 있었고, 특정 재료를 다루는 기술의 표준을 개발해 거친 원재료를 사용 가능한 상태로 가공했다. 가죽 길드는 가방이나 신발을 만들기 위해 가죽을 가공했고, 목공 길드는 가구나 건축에 사용될 목재의 가공 기술에 관한 표준을 정했다. 이렇게 원재료를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규준이 기술적 토대다. 캔버스가 회화의 지지대로서 하나의 매체라면, 기술적 토대란 수공적 공법이 해당 재료에 가미되는 것으로서, 캔버스와 안료를 다루는 방법론 따위를 지칭한다. 기술적 토대는 원재료로부터 파생되지만, 그것이 하나의 규준으로 자리 잡으면 특정한 개별 재료를 초월하는 일종의 범용적 방법론이 된다. 다양한 물리적 재료들을 넘나들면서 매체의 구분을 무력화시키게 된다. 동시에 기술적 토대란 규칙의 성격을 지니고, 규칙이란 다른 한편으로 예술의 본질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규제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기술적 토대를 강조하는 크라우스는 자유분방한 예술의 세계에 규제를 가하고 싶은 시대착오적 비평가인가? 그보다는 전폭적인 다원주의 시대에 대응하여 예술이 예술다운 최소한의 선은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에 가깝다. 규칙이 없다면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연장선상에서는 터무니없는 가짜들도 예술이 되므로 그것만은 막고 싶은 것이다.
기술적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등장하는 개념이 재귀성이다. 재귀성은 하나의 완성품을 보면서 그것을 이루게 한 기술적 토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성질이다. 재귀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그린버그도 줄곧 주장했던 개념이다. 캔버스의 평면성을 강조함으로써 회화의 본질이 캔버스의 평면 그 자체에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좋은 회화라는 식이었다. 크라우스의 재귀성도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지만, 그 지칭의 귀착점이 물리적 재료가 아니라 그것의 상위에서 독특하고 매력적인 방법론이나 접근 철학을 대변하는 기술적 토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좋은 작품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 토대를 암시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끼게 되며, 한 예술가의 고민과 제작과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크라우스에게는 그렇게 기술적 토대로 빨려 들어가게끔 만드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그렇게 기술적 토대로의 재귀성이 잘 드러나는 예시로서 크라우스는 바르트(Roland Barthes)의 백색의 글쓰기, 비올라(Bill Viola)의 비디오 아트, 에드 루샤(Edward Ruscha)의 자동차, 파로키(Harun Farocki)의 작업과정 영상 등을 든다. 이 작품들이 왜 기술적 토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인지는 암시적으로만 서술되고 있지만, 대체로 어떤 예술가가 하나의 매체를 오랫동안 다루면서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하고, 기술적 숙련도가 일정한 경지에 올랐으며, 다른 예술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독특한 시각성을 구현해냈고, 사회적 의미와 표현의 미학을 고루 보여주는 등의 조건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크라우스가 강력하게 옹호하는 예술가들은 작업과정과 재료를 시각성에서 철저히 분리하는 언어적 개념주의의 책략에 빠지는 대신 작품을 구성하는 복잡한 기술적·물질적 토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들이다.
이 책에서 기술적 토대와 재귀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은 오토마티즘(Automatism)이다. 오토마티즘은 얼핏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유사하지만, 그처럼 우연성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개념은 아니다. 어떤 매체에는 그 매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정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 특정성은 매체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서, 혹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사고 흐름이나 습성에 의해 촉발됨으로써 매체가 창출한 시각적 매력을 결정짓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매체의 특정성을 게니우스(genius, 정령)라고 불렀다. 이러한 특정성은 매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애지중지 다루는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이 촉발되면서 확장되고 다변화되는 특징이 있다. 이 같은 특정성의 종잡을 수 없는 확장을 묘사하는 개념이 오토마티즘이다. 오토마티즘은 매체의 잠재적 가능성 속에 이미 내재해 있지만, 명확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을 진정으로 갈망하면서 끊임없이 두드리는 자에게만 그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열림으로 인해 작품은 자연스럽게 특별한 존재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오토마티즘은 완전한 우연에 내맡겨져 중구난방으로 뻗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매체의 규칙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빛을 발한다. 모더니즘은 물리적 매체에 얽매인 책무로 인하여 옴짝달싹 못 하는 표현의 제약에 빠졌지만, 그보다 상위의 기술적 토대에 무게 중심을 둔다면, 하나의 기술은 그것을 다루는 과정에서 여러 우연한 계기와 변수가 작동하면서 유연하게 변모할 수 있고, 그 변모 과정에서 새로운 매체를 발견해 기술의 신경망이 확장되는 것도 가능해진다. 오토마티즘은 매체와 표현의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크라우스도 한때는 비물질 운동의 한 지류에 몸을 실었던 적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 길에서 이탈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97년의 카셀10(Kassel Documenta X)이었다. 캐서린 다비드(Catherine David)가 기획했던 그 이벤트는 완전히 화이트큐브의 종식, 비물질, 개념주의, 정치적 올바름에 바쳐진 성토장이었다. 비정형·비물질의 폭주가 한계에 다다른 순간, 크라우스는 예술의 본령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정치적 도덕주의를 위해 물리적 즐거움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까(122p)? 매체의 중요성을 망각한 정치적 개념주의는 키치와 무엇이 다를까(123p)? 화이트큐브만 때려 부수고 그 자리를 블랙큐브와 빔프로젝터로 대체하고 나면 정치적 신념은 자동으로 지구촌 곳곳에 퍼져나가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화이트큐브 무용론이 어느덧 (비평)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이 시대에 오히려 화이트큐브 옹호론(아니, 역할론)을 전면에 내세운다. 작품만 제대로 내놓는다면, 화이트큐브의 희고 견고한 벽을 정치적 저항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블랙큐브는 오히려 사각의 영상 그 자체만을 바라보게 하면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안개 속의 환상처럼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블랙큐브는 영화의 제작, 유통, 상영 등과 같은 기술적 구성요소를 가리고 오직 화면의 착시에만 집중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전시장을 더듬거리며 배회하다가 빔프로젝터가 어디 달려 있는지도 모른 채 홀린 듯이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거북목이 되어 영상을 보고 크레딧이 올라가면 다음 전시실을 향한다. 블랙큐브는 상업적 극장과 동일한 인터페이스를 차용하면서 우리에게 학습된 무기력을 선사한다. 극장에서 우리가 영사실의 위치나 영사기의 사양에 관심을 꺼 두듯이, 블랙큐브는 기술적 토대로의 재귀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을 드러내는 곳은 오히려 화이트큐브다. 크라우스가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를 옹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언제나 자신이 고안한 장치의 모든 부분을 명쾌하게 꿰뚫어보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156p).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면 논할 수 없다. 비평의 성좌는 꿰뚫어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책은 독특하게도 크라우스가 이 기획을 시작한 매우 사적인 계기로 시작한다. 1999년 말에 뇌가 동맥류로 인해 터져버렸던 것이 발단이었다. 혈관이 터져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뇌의 세포막이 뚫리고 신경세포들이 손상되어 버린 것이다. 동시대 비평 현장에서도 손꼽히는 지성 중 하나였던 저자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간 애써 쌓아 올린 지식과 예리한 감각은 물론 자기 존재 자체마저 망각해버릴 만한 위기였다. 병원에서 권했던 치료법은 서로 무관한 이미지나 단어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암기카드 훈련이었다. 거기서 조합된 단어 중 하나가 ‘언더 블루 컵’이었다. 딱히 의미 없는 단어들의 조합, 그러면서 매일 병실을 찾아오던 남편의 손에 들린 커피와도 묘하게 연결되었던 바로 그 조합, 마치 뇌세포의 소멸과 생성이 오토마티즘을 거쳐 도달한 필연의 영토와도 같은 그 조합에서 이 기획이 시작했다. ‘언더 블루 컵’의 본질은 자아가 스스로를 온전히 인식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외의 나머지 일들, 그러니까 아프기 전에 잘 해냈던 일들도 차츰 해낼 수 있게 된다는 데 있었다. 나를 인식하는 일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나를 인식해야 일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다. 자아의 재인이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단순한 병리적 진실이 미술계로 확장되어(마치 하나의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확장되듯!) 기술적 토대로의 재귀성이라는 아이디어가 발전했다. 크라우스에게 이 책을 쓰는 일은 자신이 평생토록 신념을 바쳐 투신했던 한 분야를 향해 진정성 있게 던지는 충언이자, 무너져가는 자아를 온전하게 다시 세우기 위한 필사의 사투였다. ‘언더 블루 컵’은 그렇게 두 가지 Impossible Dream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간다. 저자의 사적 체험이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정상적’ 인지 기능으로만 평생을 살아온 우리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한편으로 이 기획이 저자가 스스로도 살아남고, 또 이 미술계도 똑바로 돌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의 발로였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그저 박수를 보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가지 목표가 완벽한 짜임새로 꼭 들어맞는 순간은 끝까지 보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하나의 실험적 토대 위에 성긴 직조의 흔적을 남겨두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끝으로, 크라우스가 남긴 또 하나의 실험적 글쓰기 전략 중 하나인 알파벳 순서의 아포리즘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 책은 두서없는 짧은 글들을 엮은 것이고, 각 단락은 알파벳 순서로 배치된 아포리즘으로 시작한다. 각 단락은 긴밀하게 연결되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결국, 알파벳 순서가 글의 배치에서 지배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게 알파벳 순서를 따르는 것 자체가 저자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몸소 실천하는 일종의 오토마티즘이다. 긴밀한 서사성이 없으므로 무슨 내용이 어떻게 따라올지 예측할 수 없지만, 거기서 논의의 흐름이 중첩되거나 전환되면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통찰로 이어지게 된다. 거기까지는 잘 알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알파벳이 순서와 상관없이 등장하기 시작하고(왜 L 다음에 Z가 나오나요? 78p), 심지어는 단어의 첫 철자가 아닌 중간 철자에서 알파벳을 취하기까지 한다(166p). 왜죠? 이렇게 규칙을 깨는 것도 오토마티즘인가요? 기술적 토대가 그렇게 엄격한 규제가 아니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신 건가요? 아니면 이렇게 같잖은 문제를 제기하게 유도함으로써 저자와 독자 간의 역동적 인터랙티브를 유도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성공하셨네요.
타고난 정체성을 무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받아들일 것, 물리적 사실을 존중할 것, 그러면서도 물질에 귀속되지 말고 새로운 매체를 창안할 것, 토대를 참조하는 규칙을 따르되 새로운 매체의 영토를 찾아 나설 것, 잊어버리라고 외치는 시대에 기억을 사수할 것─. 크라우스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어렵지만, 그래도 시의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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