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nn Adamson, Julia Bryan-Wilson, Art in the Making: Artists and their Materials from the Studio to Crowdsourcing
더 복잡한 과정 속으로,
미술에 관한 담론들은 지나칠 정도로 넘쳐난다. 전공자, 비전공자 할 것 없이 이렇게 광범위한 대중이 우글거리며 떠드는 전문 영역은 드물다. “미술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려 하고 원리상으로도 미술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역이다(Udo Kultermann).” 작품은 눈에 보이고, 매혹하고, 말을 건넨다. 그 말에 뭐라도 답변을 내놓아야 할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많은 담론 가운데서도 제작에 관한 담론은 부족하다. 우리는 주로 결과물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따름이다. 일단은 제작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하고, 보이는 데로 추정해 본들 그것이 맞다는 보장도 없다.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중의 방법론이 존재한다. 캡션이 없는 상태에서, 직접 붓을 들어보지 않았다면 유채인지 아크릴인지 맞추기조차 쉽지 않다. 템페라라면 더더욱 분간할 수 없다. 육중한 스펙터클을 뽐내는 설치 작품이라면 더 많은 기술적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에 곧바로 보이는 결과물에 대해서만 논할 따름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작과정과 방법을 안다면 더 많은 것을 논할 수 있게 된다. 제작과정에는 모종의 의도가 깔려 있다. 작가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설득력 있게 뒷받침할 방법론을 택하기 마련이다. 또 제작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조력이 개입된다. 작가의 지시를 따르는 조수의 조력은 직접적인 개입에 가깝다. 재료를 납품하는 공급자나 전처리 과정을 담당하는 대행업자는 그보다는 간접적이다. 안료의 1차 원재료를 채굴하는 작업자나 유통·물류까지 전제한다면, 그러한 개입은 가치사슬의 머나먼 말단에 자리할 것이다. 이처럼 작품의 제작과정은 자본주의 생태계의 역동적 가치사슬에 긴밀하게 결부되며, 이를 통해 복잡한 사회경제적 함의를 품는다. 저자들은 바로 이 대목에 주목한다. 그간 미술계의 제작에 관한 담론이 부족했다며, 제작에 개입되는 사회적 계급의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정치적 쟁점들을 다루었다.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그저 또 하나의 식상한 좌파적 관점으로 치부하지 말 것을 요청하지만(19p), 좌파적 관점이 다분한 것은 사실이다. 좌파적 관점이 죄는 아니다. 그것이 미술계에 부족했고, 그래서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었다면, 그 균형을 맞추는 시각은 언제든 소환되어야 한다.
책을 구성하는 9개의 장은 9개의 재료 혹은 방법론을 스쳐 지나간다. 각각의 장이 단행본 수준에 걸맞은 무게감을 지니는 주제이지만, 255쪽 안에서 극히 일부 지분만을 점유한다. 각 장 안에서 다시금 그 방법론을 대표하는 10여 명의 작가가 빠르게 바통을 터치하고 지나간다. 이렇게 대상을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책은 대체로 재미가 없다. 한 꼭지의 매력을 느낄 만하면 다음 꼭지로 넘어가므로 지적 갈증만을 부추긴다. 관심 가는 주제가 있다면 역시나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
‘회화’에서는 실험적인 방식들이 작가의 정치적 의도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했던 사례들이 다뤄진다. ‘목조’에서는 가구와 건물과 조각 사이에 위치하는 목조의 유연한 가변성을 논하였고, 목조가 그 자체로 건물이 될 때 기존 조각이나 구조물과 달리 새로운 정치적 관점을 활성화할 수 있음을 예증하였다. ‘건축’에서는 건축과 조각의 모호한 경계와 함께 이 방법론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인력의 동원에 내포된 권력 구조의 문제를 다루었다. ‘퍼포먼스’에서는 우리가 통상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로 기억하는 전설적 퍼포먼스조차도 누군가의 조력을 요구하게 마련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였다. ‘도구 정비’에서는 미술과 전혀 관련 없어 보였던 도구들이 미학적 맥락에서 전유되면서 더욱 복잡한 의미의 층위가 형성될 수 있음이 드러났다. ‘돈’에서는 돈이 오늘날 경제 체제에서 작품활동을 위한 필수적 기반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작품의 재료나 오브제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돈의 물성이 작품의 재료로서 그대로 노출된다면, 십중팔구 이 작품은 체제 비판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외주 제작’은 이 책의 전반적 주제의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예술가가 직접 일일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만이 진정한 예술 작품이라는 인식은 미술사 관점에서는 불과 200여 년 전 낭만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그전까지 예술 작품은 공방의 산물이라는 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공방은 감독자의 지도하에 무언가를 공동으로 만드는 동업자들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기술적 요소에 대해서는 외주제작하는 방식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 낭만주의 예술가 모델이 득세하면서 공방의 방식은 잠시 잊혔지만, 뒤샹(Marcel Duchamp) 이후 개념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작가와 제작은 다시금 분리될 전기를 마련하였다. 장인적 손길보다는 작가가 어떤 개념을 창안하였는가가 더 중요하게 되었고, 물리적 실체를 만드는 활동은 다른 전문가에게 외주하더라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거대 스펙터클 설치의 시대에는 건축 엔지니어링 기술에 기반하여 그러한 설치물을 전문적으로 제작해 주는 업체(리핀코드, 피터 & 칼슨, 칼슨 앤 컴퍼니, AB 파인 아트 주조소, MDM 프롭스, 마이크 스미스 스튜디오 등)도 성업하게 되었다. 이런 제작소에서 제작된 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저자성(authorship)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제작 업체가 작품의 아이디어에 어느 정도나 개입했는가? 충분히 개입했다면 작품의 크레딧에 제작소를 명기해야 하나? 명기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나? 특정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려면 제작소에 제시된 작업지시서는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이어야 하나? 제작소가 작가의 승인 없이, 혹은 작가의 유고시에 작품의 복제품을 제작한다면 그것은 진품인가? 제작소마다 권한 위임의 정도가 다르다면 그 차이를 작품의 변수로 고려해야 하나? 등
‘디지털화’에서는 디지털 수단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미적·정치적 쟁점들이 다루어졌다. 요즘 디지털화의 물결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앞으로 디지털 도구는 마치 연필이나 캔버스처럼 모든 예술 작품의 기반기술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크라우드소싱’에서는 마치 위키피디아처럼 다수 대중의 참여에 기반하여 집단적으로 완성되는 작품들의 사례가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외주 제작의 집단화라고도 볼 수 있고, 커뮤니티 예술 활동 혹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식 관계 미학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대체로 참여하는 대중의 수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풍성해지는 반면, 작품의 질은 그에 반비례하여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더 좋다는 정답은 당연히 없지만, 작품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른 최적점의 참여 수준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크라우드소싱 작품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그 최적점을 찾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예술의 본령은 아마 사라지고 허무주의만 남게 될 것이다. “대중의 의견을 따르고 그 결과의 평균을 내는 방식은 물론 민주적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예술을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접근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208p).” 그간 일관되게 좌파적이었던 저자들의 사유는 이 지점에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와 손을 잡으며 묘하게 우로 일보 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주제를 잊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책이 작품의 결과물이 아닌, 제작과정, 방법, 수단 따위를 논하는 책이라는 점을 잊게 된다. 그만큼 동시대 미술에서 제작방법은 그 결과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인상주의 이후로 예술 작품의 결과물은 자고로 어떠해야 한다는 규준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고, 그 유명한 변기나 브릴로 상자 따위로 인해 과정과 결과물의 경계는 마침내 거의 습자지 수준의 얇은 막이 되어 버렸다. 비근한 나의 사례를 말하자면, 어떤 예술가가 나에게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좀처럼 끝나지를 않는다, 어서 끝내고 싶다.’라고 고민을 토로할 때 나는 늘 같은 조언을 한다. ‘음… 그럼 그냥 거기서 끝내. 그게 완성된 상태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은 어차피 너뿐이야.’ 이 조언을 들은 예술가는 내 무책임함을 비웃지만, 나는 지금도 이 조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제작과정과 결과물이 긴밀하게 연결된 시대, 아니, 제작과정이 언제든 결과물로 둔갑할 수 있는 시대에 제작과정을 별도로 구분하여 사유할 필요성은 무엇일까? 특히 퍼포먼스의 경우,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곧 결과물이나 다름없는데, 퍼포먼스를 하나의 과정이나 방법론으로 별도 인식함으로써 얻는 효익이란 무엇일까? 사실 별로 없다. 작품을 그저 한 날의 유희쯤으로 여겨도 충분한 삶이라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가 작품의 의미 층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비평적 안목을 동원할 여력이 있다면, 그럼으로써 얻는 삶의 풍성한 의미화 과정을 믿는다면, 작품과 내가 공존하는 공시적 순간의 의미망은 물론, 작품의 기획부터 전달에 이르기까지 궤적을 촘촘하게 쪼개보는 통시적 안목을 동원해볼 필요가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보이는 사유의 맹아 같은 것이 있다. 저자들은 그 맹아를 발견하는 범위를 폭넓게 제시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범위에서 모든 예술은 작가 혼자서 만들 수 없으므로 제작에 관여한 모두를 섬세하게 분별해 합당한 존중을 보내줘야 한다는 주제를 길어 올렸다(이 주제의식은 줄리아 브라이언-윌슨의 전작인 「미술노동자」와도 겹친다.). 이 단편적 주제를 뛰어넘는 더 풍성한 사유의 시발점은 저자들이 제시한 아홉 개 주제 각각에 대한 더 깊은 숙고를 통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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