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맹지영, 손옥주, 전강희의 「매개자의 동사들」

반쪽짜리 매개

예술계에서 창작자와 관객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매개자들을 조명한 책이다. 전시 기획과 드라마쿠르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저자들은 CM(Creative Mediators)이라는 매개자 연구 그룹을 형성했다. CM은 2020년에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예술현장연구모임을 진행하였고, 지원사업을 통해 개최된 라운드테이블의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책 중간에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의 결과보고서가 끼워져 있는데, 다소 생뚱맞은 감은 있지만 동사 풀이만 쭉 나열된 책 가운데에서 신선한 휴게소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부록임에도 당돌하게 중간에 끼워져 있는 까닭은 아마도 중간에서 조율하고 연결하는 매개자의 정체성을 책 구성의 형식으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책은 매개자의 정체성과 활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51개의 동사를 사전식으로 나열한 후 각 어휘의 숨은 뜻을 설명하거나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글의 형식은 매개자의 특수한 맥락을 고려해 꼼꼼하게 의미 해석과 예시를 덧붙인 설명적 구성에서부터 시적이고 냉소적인 짧은 산문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이다. 의미의 복잡성과 모호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있고, 설명보다 이슈를 제기하기 위한 질문이 주를 이루는 글도 있다. 각 동사의 독특한 의미를 고려한 다양한 쓰기의 형식들이 실험되었다.

매개자들이 쓴 매개자론이라서 그런지 매개자 자체가 예술계에서 마치 대단한 입지라도 지니는 양 과도한 자의식이 투영된 대목이 더러 있다. 이 책만 본다면 매개자는 마치 예술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방위적으로 관여하면서 우리의 미적 경험을 좌우하는 배후 흑막으로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는 존재 같다. 책에 따르면, 매개자의 글은 비평가의 그것과 달리 “작품의 미학적 가치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열린 태도로 작품을 바라보려” 한다(21p). 또 매개자는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가장 가까운 대화 상태이자, 작업에 있어서는 최초의 관객이자, 사회에 있어서는 동시대적 현상을 조력의 방식 안에서 읽어내는 해석자로서, 작업 안팎의 보다 작고 구체적인 사안과 작업의 사회적 의미 확장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란다(38p).

나르시시즘적 징후는 과도한 피해의식을 통해서도 표출된다. 책 전반에 걸쳐 매개자들이 현장에서 늘상 마주하는 이기적인 자, 권력에 아부하는 자,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자, 크레딧을 가로채는 자, 소통이 불가능한 자들에 대한 불만과 피해의식이 엿보인다. 여느 업이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매개자라면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서 모든 프로덕션을 원활하게 조율하면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은 매개자론의 이상주의다. 이 이상주의가 창작자, 후원자, 제도기관, 관객 등 여타 이해관계자들의 이상과 얼마나 조화를 이룰지는 불분명하다. 모두의 이상은 동시에 구현될 수 없다.

51개 동사에 대한 매개자 관점에서의 해석과 질문들은 이러한 과도한 자의식의 울타리에 가로막혀 매개자 공동체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다. CM 저자 4인의 매개자론은 매개자들 끼리끼리 돌려보며 서로 손뼉 치고 공감하며 눈물을 닦아 줄 때만 유효하다. 1저자가 설립한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2만 원짜리 책은 매개자의 세계에 첫발을 들이려는 자가 업계의 현실을 사전에 간 보려 할 때, 혹은 경력자가 업계 내에서 지친 영혼을 달래고자 하거나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어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만 의미가 있다. 즉, 매개자들의 목소리만을 담아낸 이 매개자론은 역설적으로 공동체 밖 독자와의 매개에는 실패했다.

만약 CM이 앞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면, ‘매개자가 바라보는 매개자’라는 일차원적이고 자의식적인 담론 구도를 뛰어넘어 예술계를 구성하는 다층적 이해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매개자에 관한 기대, 역할론, 현실, 방향 등 폭넓은 담론적 지형도를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구성한 매개자론만이 공동체 밖으로 흘러나와 예술계와 사회 전반을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적으로 매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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