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현재진행형
거의 6년 만에 덕수궁 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서울 살 때는 즐겨 찾던 곳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상경이 쉽지 않고, 상경 하더라도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6년 전 그때도 ‘근대미술가의 재발견’의 첫 번째 시리즈를 봤었다. 어쩌다 보니 긴 간격을 두고 연속으로 재발견만 하게 됐다. 그 사이 13개의 전시가 흘러갔다. 놓친 전시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아카이브에 묻힌다.
근대미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으나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잊힌 미술가들을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이다. 이번에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난 작가 6인을 조명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고 에둘러 말하는 까닭은, 늘 그렇듯 그들이 스스로 초현실주의자라는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력 가운데 초현실주의자로서 정체성을 드러냈던 시기가 있는 예술가도 있지만, 대체로는 특정 화파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인식이 없었고, 심지어 직업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어떠한 진술도 남기지 않은 예술가도 있다.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초현실주의’로 재규정하는 것은 비평과 기획의 권력이다.


6인의 주제와 화풍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을 초현실주의로 묶는 기획이 권력남용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만큼 초현실주의의 경계는 넓다. 초현실주의는 이성 중심주의와 합리주의를 배격하며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꿈틀대는 꿈과 욕망의 세계로 들어간다. 의식 저 너머의 세계에 의식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가능한지,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동기술법이 진정 가능한지 실무적 논쟁은 일단 차치하고, 초현실주의가 이상적으로 상정하는바 자체는 거의 경계 없는 표현의 자유에 가깝다. 그 자유는 곧이어 등장한 추상표현주의와 대비되면서 상대적으로 ‘경직적 자유’ 내지는 ‘제한적 자유’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계보학적으로 말하자면 초현실주의가 열어 놓은 자유의 지평에서 추상표현주의가 달콤한 열매를 따 먹은 것에 가깝다. 꿈과 환상과 욕망의 세계는 그 어떠한 형태의 제약도 없는 이미지의 영도(zero degree)다. 다만, 최종적 결과물의 위상에서 누군가는 물리적 현실에 더 깊게 발을 걸치고, 누군가는 꿈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는 등 스펙트럼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전시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초현실주의 경향을 선보인 선도적 사례로부터 시작한다. 이들 중에도 스스로 초현실주의자라는 정체성을 표면화했던 예술가는 소수였다. 전쟁과 제국주의와 권위주의가 이성 중심적 사고에 회의를 불러오고 현실도피적 욕망을 부추겼던 경향 자체는 미술계 저변에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고 봐야 한다. 모아 놓고 보니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놓인 근현대 한국 작품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많은 작품을 추리는 과정에서 기획자들이 느꼈을 고뇌도 전해졌다.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다. 공간에 비해 작품이 너무 많았다.






이어서 여섯 예술가가 작은 회고전을 꾸렸다.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김욱규, 김종하, 박광호, 김영환, 신영헌 순이었다. 김종남의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언뜻 보면 정교하게 묘사한 자연 풍경 같지만 계속 보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공존할 수 없는 개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풀 무더기 속에 불온한 눈빛이 서성거리고 작은 동물과 곤충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뜬금없이 모나리자와 눈을 맞추기도 하고, 풀 무더기의 배열이 고전 성화 속 형상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장난기도 연상케 한다. 보호색을 두르고 조용히 숨어들어 간 작은 생명체들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평생 정체성을 숨기고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화가의 불안한 정체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기획자는 설명한다. 자연, 욕망, 그리고 다난했던 삶의 궤적을 표상하는 온갖 오브제들에 뒤섞인 자화상은 하나의 회화가 그 자체로 더 이상의 추가적 설명이 불필요한 자족적 전기로서도 기능할 수 있음을 예증한다.






김욱규의 작품은 주술적 동굴벽화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모델에 가까운데, 그 작업의 동기나 과정 측면에서도 주술적 의도성이 엿보여 더욱 강한 진정성으로 다가왔다. 함흥 출신으로 1·4 후퇴 때 월남한 작가는 북한에서의 전력 탓에 남한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했다.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1970년대부터 작업실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작업에 몰두한 작가는 수백 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그중 400여 점은 제목도, 서명도, 제작 연도도 없었다. 이론적으로 잘 정제된 작가의 말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사후 유족에 의해 조명되기 전까지 이 작품들은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위한 작품이 아니었다. 이런 작품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예술에 가깝다. 내밀한 본심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물을 어떻게 활용해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떠한 목표를 성취하겠다는 로드맵이 결여된, 그야말로 창작의 과정 자체에서 정화와 치유를 누리기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작품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본다면 김욱규의 작품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동식물, 기타 비정형의 형상들, 그리고 이 모든 개체의 상호작용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가 바랐던 것은 예술과 인생의 참된 의미를 공유하는 신비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을까?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구원을 향한 신성한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마음속에 구축한 또 하나의 세계에서 그 공동체와 제의는 이미 실존했고, 이 작품들은 그저 그 실존적 제의의 기록물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일까? 제목도, 작가의 말도 없는 작품들은 모든 해석의 가능성에 열린 채 한 예술가의 내면에 움튼 심오한 우주를 가리킨다.




김종하는 프랑스 유학파답게 아카데미즘적인 초현실주의를 선보였다. 마그리트(René Magritte) 풍의 정돈된 구도가 인상적이다. 아마 당대에 노골적으로 초현실주의자로서 정체성을 드러낸 몇 안 되는 사례일 것이다.





박광호의 작품은 기하학적 추상과 초현실주의의 경계를 오간다. 비정형의 세포질 형상 혹은 요철 같은 덩어리들을 구현했는데, 대략적인 형태는 중구난방이지만 그 표면의 마감처리에는 엄청난 공력이 투입되었다. 오늘날 최첨단 3차원 랜더링 기술에 버금가는 외형적 충실성과 그라데이션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어떤 형상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존재할 때 거기서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지 소프트웨어 툴이 무궁무진한 우리에게 이 이미지들은 그리 혁신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런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오직 머릿속에서만 유영하는 이미지를 붙잡아 한순간에 고정해 놓는 일은 소수의 뛰어난 예술가들만이 해낼 수 있다. 박광호가 배치한 물질들은 얼핏 우연히 던져 놓은 그 상태 그대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치밀한 내적 관찰과 배치와 재조합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회화의 표면에 고정된 이미지를 보지만, 작가의 내면에서 이 형상들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분절하고 이합집산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광호의 기괴한 물질들은 단순히 정적인 회화가 아니라 일종의 스틸컷이다. 이 물질들이 빚어내는 최초의 파동이 어떤 형태였는지 알고 싶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 화면을 마음속 필름에 녹화해야 한다. 진정성 있게 열린 마음으로 녹화한 사람만이 물질의 놀라운 움직임과 파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환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달리(Salvador Dalí)에게서 강한 영감을 받은 매우 전형적인 초현실주의 회화를 선보였다. 마치 어제 칠한 듯한 선명한 노란색과 극단화된 원근법이 인상적이다.



신영헌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 출신이라 그런지 회갈색조의 스산한 분위기가 엿보이는 독창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묘하게 수묵담채화가 녹아든 듯한 그의 회화에서는 생성형 AI에게 한국적 초현실주의를 그려달라고 요청하면 제시해 줄 법한 전형성이 엿보이지만, 동시에 최첨단의 게임 홍보용 일러스트를 보는 듯한 혁신적이고 담대한 구도도 돋보인다. 분절적인 형상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융합되면서 더 큰 주제의식과 결부되는 몰입도 있는 구성에서 연출가적 기질이 드러난다. 그의 이력에서 주로 종교 화가로서의 면모만이 부각되어 왔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전시에서 드러난 초현실주의적 일면은 전시기획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초현실주의는 한때의 유행이나 끝나버린 영광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향의 광의적 지향점에 비춰보면 예술에서 초현실주의적 면모가 완전히 거세되는 시점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것, 실천하지 못하는 것, 억눌려 왔던 것을 분출하는 합법적 무대다. 우리는 예술을 경계로 지리멸렬한 현실의 문턱을 넘어 오감을 확장하고 억눌린 욕망을 건강하게 발산한다. 일상의 시각성에서 벗어난 무언가가 그곳에 있기에 우리는 예술을 찾는다. 예술이 단순히 현실 그대로의 재현이라거나 정치 구호로서만 의미가 있다면, 그 위상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일상이 심심치 않게 초현실적으로 무너지는 오늘날, 초현실주의의 가치는 더욱 부상한다. 꿈과 욕망의 심연에 인간 정체성의 본질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을 가감 없이 직시할 때라야 비로소 동시대 난맥상의 근본적 원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가 증명하듯, 한국 근현대 미술의 여명기부터 미미하게나마 분명하게 초현실주의의 맥박은 감지되었다. 그 발자취를 오늘날까지 이어보면서 기법과 매체 면에서의 변화상을 살펴보거나, 기술혁신과 표현의 상호작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초현실주의의 예술적 발자취를 신경과학적 측면의 최신 연구 결과와 연계해 살펴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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