村上春樹 Haruki Murakami, 1Q84
당신은 이런 사랑을 믿습니까?
이 소설에는 초자연적 능력을 갖추고 태곳적부터 인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온 리틀 피플이라는 군집도 나오고, 그들이 만드는 공기번데기와 복제인간도 등장하며,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이 물리법칙을 비웃듯 지구 중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두둥실 떠 있는 장면도 담겨 있지만, 작품의 판타지적 측면은 그런 자잘한 설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진정 판타지답게 만드는 설정은 덴고와 아오마메의 불가해한 사랑이다.
열 살 남짓 되던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서 우연히 교감을 느껴 손을 맞잡고, 이내 그것을 놓고 둘은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전에도 후에도 딱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덩치가 크고 모든 학교생활을 성실하고 우수하게 수행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마음 따뜻해 보이던 소년, 사이비종교의 교리에 심취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의례를 강요받아야만 했고 그 탓에 늘 억눌려 있었던 소녀. 둘은 서로를 주목했음에도 용기가 없어서, 혹은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서로 다가오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둘은 눈을 마주쳤고, 손을 맞잡았다. 아니, 소녀가 일방적으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용기로 소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운명적인 교접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도록 두 사람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그 이후 둘은 서로 전혀 무관한 인생을 살아갔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늘 서로를 새긴 채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 그간 차마 나누지 못했던 회한을 나누며 영원히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운명적으로 직감했다. 소녀는 이렇다 할 사랑도 연애도 없이 메마른 삶의 시간을 땀으로 메우며 소년을 기다렸고, 소년은 이 여자 저 여자 기회 닿는 대로 만났지만, 그네들은 그 소녀가 아니었으므로 늘 공허했다. 그리고 강한 운명이 그들을 1Q84의 세계로 끌어들였고, 각자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둘은 하나가 되었다. 이윽고 1Q84를 가로질러 달이 하나인 1984의 끝자락에 당도했다.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교감할 수밖에 없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단서는 여기저기 충분히 흩뿌려져 있다. 그들을 잇는 첫 번째 다리는 인격이 형성되는 중차대한 시기에 부모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아 원치 않는 삶을 감내해야 했다는 공감대였다. 아오마메는 종교적 신념을 강요받아 언제 어디서든 엄격한 행동 양식을 지켜야 했고, 주말마다 원치 않는 옷을 입고 선교 활동에 이끌려 이집 저집의 문을 두드리며 박대받는 현장에 동참해야 했다. 덴고는 NHK수금원이 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금 현장에 동행해야 했다. 질곡의 현대사에 떠밀려 가까스로 얻은 그 직업은 아버지의 정체성 거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순진한 눈망울의 10살 소년을 데려가는 것은 고객의 목소리를 낮추면서 수금 확률을 높이는 훌륭한 비책이었다. 아버지가 아닌 외간 남자에게 어머니의 젖을 빼앗긴 유년기 환상에 시달리던 덴고에게 친부인지도 의심스러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주말마다 수금 활동에 참여해야 했던 기억은 강한 상흔으로 남았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발견하지 못한 두 아이는 마음을 닫은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런 와중에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연속으로 잃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오직 서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졌다.

이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마도 두 사람의 운명적 연결고리를 믿고 지지할 것이다. 즉, 두 사람이 같은 상처를 나눠 가졌다는 점, 그래서 두 사람만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믿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운명의 상대와 언젠가 다시 해후하리라는 믿음을 붙잡고 자기 삶을 막막한 불확실성 속에 던져둔 채 20년 이상 공허함을 견디며 묵묵히 기다리는 삶이 이 세상 어딘가에 실존하며, 또 그러한 삶이 가능하면서도 가치 있음을 믿으리라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못 믿는다. 내가 10살 때 ‘아오마메와 덴고의 운명적 손잡음’과 같은 생에 단 한 번뿐일 불꽃 같은 경험을 해보았다고 진정성 있게 가정해 보려 애를 써봤지만, 그런 경험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존재하리라고 믿을 수 없거니와, 그런 경험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다시 그 운명의 짝을 만날 때까지 현재의 인연들에 내 마음의 절반씩만 겨우 내어주며 20년 이상 빈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도 어렵다. 나는 그렇게 못 산다. 그건 너무 큰 불확실성에 베팅하는 셈이다. 나도 간간이 로또를 사긴 하지만, 여기서 베팅하는 불확실성은 3주 연속 로또 1등 당첨보다 더 큰 불확실성이다. 확률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암울함 속에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의 가치가 너무나 크다는 의미다. 그 시간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누군가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운명적인 조우만을 기다리며 무미건조하게 흘려보내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No day but today.
그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지는 않았음을 안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산 것이다. 그래도 두 사람은 각자 능력과 힘의 범위 안에서 최선의 삶을 꾸렸다. 그랬기에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함께 1Q84의 세계에서 자기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그 덕에 결국에는 이어졌고, 힘을 합해 리틀 피플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청년기를 통째로 쏟아 넣은 그 기다림과 운명의 인력을 믿을 수 없기에, 이 작품의 전개에 100%의 지지를 보낼 수 없었다.
사실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기대와 예상을 빗나갔다. 나는 중반부에 아오마메가 노부인과 함께 거대한 혈투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리더의 암살, 혹은 그로 인한 선구의 몰락이 이 소설의 절정이 아니겠는가 하고 추정했다. 리더를 암살하거나 실패하고, 거대한 조직에 벼랑 끝까지 쫓기고,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고, 견고해 보였던 조직의 치명적 트리거를 발견하고, 결국 불가능해 보였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전개를 예상했다. 물론 이건 흔해 빠진 헐리우드식 작법이고, 내 상상력의 한계임을 인정한다.
리더는 생각보다 너무 쉽게 처리되었다. 비교적 초반부에 과업이 달성되어 당황스러웠다. 이제부터 무엇으로 뒷부분을 채우려나? 거대 조직에 쫓기는 두 인물과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는 반전의 국면들이 이어지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모두가 힘을 모아 조직에 역습을 가하는 전개가 이어지려나 하고 두 번째 예측 회로를 가동해 봤다. 그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만났고, 생각보다 쉽게 1Q84를 빠져나왔으며, 리틀 피플과 선구는 생각보다 쉽게 두 사람을 놓쳤거나 아니면 그냥 방관했다. 많이 양보하더라도 리틀 피플은 좀 더 그럴싸한 능력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 태곳적부터 인류와 함께하며 가공할 지혜와 능력을 발휘했던 신적인 존재들이라면…

작가는 애초부터 액션 어드벤처를 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자신이 평생 가져보지 못한, 그럼에도 가슴 속 한구석에 몰래 품고 있었을 진실한 사랑의 알레고리를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관 속에서 풀어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리틀 피플과 거대 종교단체와 공기번데기와 두 개의 달과 자위대 출신 게이 보디가드는 하나의 달빛 아래 알싸한 룸서비스 와인과 함께 펼쳐지는 두 사람의 뜨거운 정사를 위한 소소한 사전 이벤트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첩보 액션물을 기대한 독자들은 쓴웃음과 함께 호텔 로비를 빠져나올 것이고, 판타지 로맨스를 기대한 독자들은 저마다의 와인 잔을 들고 달빛 아래에서 건배하겠지. 물론 나는 전자다. 그들의 건배 소리가 내 귓가에 쨍한 잔상을 남긴다.
비록 기대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독자들이 자기 취향을 확실하게 재인할 수 있는 문학적 무대를 깔아줬다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기량이 그 찬란한 이름값에 충분히 준함을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남겨 놓고 과감하게 한달음에 떠났다는 것도 인정할만한 대목이다: 덴고가 만난 후카에리는 마더인가, 도터인가, 둘이 교차하고 있나? 아유미의 죽음은 리틀 피플과 무슨 관계가 있나? 걸프렌드는 어디로 갔나? 우시카와는 왜 주인공으로 승진했나? 1984년의 세계에서 노부인과 다마루는 별일 없이 잘살고 있을까? 답 없는 질문들은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휘감은 강풍을 타고 빠르게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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