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의 「나쁜 책: 금서기행」

금서를 구하자

서론을 읽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화부 기자이자 시인인 저자는 오래된 책들의 전당인 도서관에 대한 상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지 묵은 고서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에 대하여 절절한 어투로 웅변한다. 명저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명저를 만나는 일, 그야말로 하나의 보석 속에 박힌 또 다른 보석을 발견하는 일의 기쁨을 논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 봤을 쾌감이다.

독서율은 나날이 급감하지만 그럼에도 매주 100~150권의 신간이 기어코 새로 찍힌다. 소수의 책은 엄청난 관심 속에 증쇄를 거듭하지만, 그 외 다수는 도서관으로 직행해 먼지만 쌓여 간다. 저자는 전자에 해당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만한 책들을 사전에 선별하는 과정에 일부 직업적으로 개입한다. 문화부 기자로서 이 주의 신간을 추천하는 기사를 써야 한다. 그의 손에서 버려지는 책은 대체로 안전한 책이다. 상업주의에 영합하여 대중적 관심도가 높은 키워드를 적절히 녹여 냈으나, 정작 그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반짝거리는 논점은 빠진, 그야말로 흐리멍텅한 대중서들이다. 이렇게 “세상과 불화할 가능성을 애초에 제로로 가정하고 집필된 책은 독자의 정신에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9p).” 반대로 “독서의 끝자락에서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책만이 불멸의 미래를 약속받는다(12p).” 그리고 이런 책들은 대체로 시대와 불화해 왔다. 주류의 사고방식이나 공인된 안전한 논리와 단호히 결연한 가운데 시대를 뛰어넘은 아름다움이나 고고한 가치를 추구한 소수의 책들만이 불멸의 반열에 올라 길이 기억됐다. 그들에게 주어진 금서라는 지위는 부끄러운 낙인이 아닌, 위대한 발자취를 증명하는 훈장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금서란 개인과 세계의 거대한 충돌이 낳은 스키드 마크다(13p).”

나는 명쾌한 논리적 흐름과 진심이 담긴 서론을 읽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을 울리는 문장을 만났다. 그의 문제의식은 내가 평소 고민했던 바와 너무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안전한 사고가 만연한 세상, 검증된 키워드로 도배된 양산형 대중서들의 홍수, 이 판도를 뒤엎을 용기가 없는 고만고만한 저자와 출판사들, 한 줌의 용기도 허락지 않는 한 줌도 안 되는 출판 시장, 만연한 마녀사냥과 편협한 여론 눈치보기….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우리의 차갑게 식은 정신을 단박에 후려갈길 아름답고 찬란한 금서의 도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저자의 진단은 너무도 정확하고 날카로웠기에, 이어질 금서 분석에도 기대가 점차 부풀어 올랐다.

기대는 빠르게 식었다. 30권의 금서를 다룬 서평이 존칭으로 쓰였다는 점이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투는 내용을 결정한다. 불온한 책들을 공손하게 존칭으로 설명해 주다 보니 분석의 날카로움을 상실한 듯하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김경식의 ‘영화 대 영화’가 연상되었다. 대체로 서평의 모든 내용이 칭찬 일색이다. 한계점, 아쉬운 점, 독자로서 주의해서 해석해야 할 점이 거의 없다. 여기 소개된 금서들은 진정 무오성을 주장할 만한 명저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한 평가는 평자의 소신이자 자유다. 같은 문인으로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저자들에 보내는 겸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까닭은, 새로운 금서의 도래를 갈망했던 저자의 마음이 대중영합적 문체와 버무려지면서 날카로움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다룬 책들이 왜 금서인지는 충분히 알겠다. 금서들은 정치적 권위와 주류 역사 해석에 도전했고(1, 3부), 과도한 폭력과 사악함으로 인간 본성을 드러냈고(2부), 성적 엄숙주의에 반기를 들었고(4부), 종교적 금기를 깼다(5부). 저자는 금서들이 왜 금서가 되었는지, 어떤 권위에 도전했는지, 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삶의 가르침을 주는지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소개하는 문체의 과도한 친절함과 금서의 내용 및 표현에 대한 절대적 순응이, 정작 이 책이 다루는 금서의 반항적 기질과 반향을 일으키며 엇박자를 자아낸다는 점이 아쉽다. 금서가 지닌 인류사적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려면, 금서를 다룬 책 자체가 금서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결기를 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공손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 글들은 애초에 단행본으로 엮일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 온라인 기획 기사 시리즈 ‘김유태의 금서기행, 나쁜 책’을 위해 썼던 글들을 나중에 책으로 엮은 것이다. 독립된 문인으로서가 아니라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장인으로서 쓴 글이라는 뜻이다. 불온한 서적들을 소개해야 하지만, 적당한 조회 수를 유발해야 하고, 데스크의 검토도 거쳐야 한다. 직장인은 보도 준칙과 사규라는 한계 안에서만 불온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글들은 문인과 직장인의 이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물이 불온한 책들을 공손하게 소개하려는 복합적 압력 속에서 배태되었다. 이미 송고한 기사지만, 단행본으로 다시 엮으면서 문체를 전면 수정했으면 어땠을까? 서론에서 우리가 만난 그 고독한 문인의 절절한 진심이 짙게 밴 문체로 썼다면? 아마 전혀 다른 결의 서평집이 나왔을 것이다. 문체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글의 알곡이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그 미지의 책을 읽고 싶다.

여기까지는 문체에 대한 사소한 아쉬움일 뿐, 좋은 금서들을 소개받은 것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고, 저자에게 감사할 일이다. 미처 몰랐던 세계 각지의 좋은 저자들과 책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오면 여기 소개된 책들을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넣어 두어야겠다. 단, 너무 폭력적인 것은 빼고. 정신은 지금도 충분히 피폐하다.

금서들을 훑으며, 모든 문제는 결국 리터러시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권력에 저항하고 인간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어느 정도 폭력성과 성적 욕망이 드러나는 글쓰기는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 미학적·정치적 가치가 뒷받침되는 자유분방한 표현은 언제든 존중받아야 하며, 그러한 자유와 창의의 정신이 예술의 진보를 이끌어온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리터러시 없는 까막눈들과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음도 분명한 진실이다. 그들은 선을 넘는 표현을 마주할 때 제대로 읽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음미하지도 않고, 의도조차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비난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맹종한다. 여기 소개된 상당수의 금서가 폭력과 성충동을 다루고 있는데, 모든 독자가 그 표현의 의도와 미학적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가치를 몰라줘 금서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 전체를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권의 명저가 금서가 되는 순간, 그로써 한 시대와 공동체의 리터러시 기준선이 수면 위로 올라와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금서의 저자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시대의 지적 한계선을 노정한 것 자체로 큰 역사적 이정표를 세운 셈이다.

금서의 미학적·정치적 가치를 깨달은 독자는 그 맛을 혼자 음미하는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리터러시 한계선을 끌어 올릴 책무를 자동으로 나눠 갖는다. 좁고 음험한 골목길에서 나와 드넓고 윤택한 지적 지평을 자유롭게 산책하는 자들은 더 많은 시민이 그 지평 위에서 앎과 사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닦을 공적 책무를 짊어진다. 진정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제약 없이 읽혀야 하고, 금서가 됐다면 빨리 그 지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해한 자들이 모종의 역할을 해야 한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금서를 피고석에 앉힌 인민재판을 바라보며 손가락질만 해서는 안 된다. 읽고, 사유하고, 쓰고, 나누고, 설득해야 한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나’라고 주저하는 순간, 전 생애 가운데 마땅히 누려야 할 읽을거리를 선택할 자유는 그만큼 좁아진다. 그 점에서 이 책의 저자 김유태 시인/기자는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니 우리도 각자 나름의 역할을 하자. 부끄럽지만 이 홈페이지와 글도 내 나름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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