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 Mueck, 2025.4.11.-7.13. MMCA Seoul &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한끝차이와 천지차이
론 뮤익 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주말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은 인파는 그야말로 미술사적이었다. 안국역에서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구간은 천금 같은 우회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차들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기어코 교통경찰이 출동했고, 미술관 앞 2차선 길에는 라바콘도 세워졌다. 37도에 육박하는 무더위를 뚫고 손에 손에 양산을 받쳐 든 보행자 무리도 끝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실내에 당도해 에어컨 바람에 숨 좀 돌리는가 싶더니, 거기서도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끝없는 대기의 행렬이었다. 매표소에서부터 이어진 대기의 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든 전시실 밖으로 구불구불 뻗어 나갔다. 지하 1층 전체가 대기 줄로 휘감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순회하고 인증하는 젊은이들의 행렬 자체는 최근 5년간 익숙해진 풍경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유례없는 인파였다. 국경도, 남녀노소 구분도 없었다. 늘 주류를 차지하는 연인들과 여성 또래 집단은 물론, 잿밥에 더 관심 많은 어린이를 대동한 가족, 노부모를 모신 자녀들, 전 세계에서 날아온 여행객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평소 관심사를 초월해 한 자리에 모였고, 무지막지한 대기의 압박을 기어코 묵묵히 견뎌냈다. 이 끈덕지면서도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기행렬은 단순히 관람을 위한 것 그 이상으로 보였다. 이것은 차라리 신성한 그 무엇을 향한 참배 의례에 가까웠다.



인고의 시간 끝에 인파에 떠밀려 모스크, 아니 전시장에 들어서면 살결, 주름, 잔털, 뾰루지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묘사된 극사실적 인물상들을 만나게 된다. 대체로 수수께끼 같은 감정에 휩싸인 인물들이 일순간 얼어붙은 채 무방비로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물리적 매체가 와해된 오늘날 개념주의 시대에 이처럼 사실적이고 형상적이면서 과도할 정도의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시대착오적 작품이 왜 필요한지 생각하다 보면, 미적 경험이라는 예술의 본령 하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너무나 현실적인 형상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스케일로 우두커니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생경한 미적 경험으로서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이 생경함을 (유튜브로 보는 대신) 물리적으로 직접 체험하려고 무지막지한 대기의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별도의 시간과 비용을 할애해 이 자리에 선 것이다. 대가를 치러야만 닿게 되는 사유의 지평이 있다. 수고로움이 길어 올린 각자의 기억과 해석이 작품과 융합되면서 수천수만의 사유가 생성되는 것이다. 론 뮤익의 장인정신은 정교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인물상과 실제 피가 흐르는 인물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을 촉발하면서 어느 정도 예측된 방향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반면, 진짜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는 해석의 문이 열릴 때 비로소 발생한다. 이번 전시에서 오브제가 놓인 특별한 상황은 작가의 계산을 보기 좋게 비껴간다. 론 뮤익이 작품의 대상으로 전혀 다뤄본 적 없는 특정 인종의 관람객이 절대다수 비율로 꽉 들어찬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은 무질서를 요구하는 안내 직원들의 통제를 가뿐히 무시한 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질서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집단지성을 모아 암묵적 규범을 자체 생산해 낸다. 세계적 품질의 공교육 12년과 고등교육 4년+@를 준시민권 수준으로 이수한 이 동아시아 국가 관람객들은 ‘줄을 서실 필요가 없다, 작품에는 순서가 없다,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관람하셔라’라는 무질서의 규범을 좀처럼 따르지 못한다. 그들의 DNA에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 폭발하는 유전인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줄을 서서 입장했으니, 줄을 서서 관람한다. 관람객의 행렬은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인증샷은 제때 찍어야 하고, 중간중간에 나와 작품이 한 앵글에 포함된 사진도 따가운 눈총 속에 하나쯤은 남겨야 한다(좁은 통로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적 규모의 <매스(2016-2017)>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청춘들의 뻔뻔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이 어느새 마냥 부러운 그런 나이가 됐다.). 이 대목에서 작품과 나의 특별한 조우를 고대했을 관람객들이 마주하는 뜻밖의 미적 경험은 질서정연한 군중의 흐름에 포위된 작품을 바라보는 제삼자적 주체로서 느끼는 생경한 소외감이다. 작품이 나에게 건네는 말을 듣고 싶었으나, 그 말은 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다른 관객의 단단한 뒤통수까지 뚫고 나의 신경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공허한 빈자리를 대신 채우려는 듯 육중한 화이트큐브에 왕왕거리는 목소리는 구경거리가 된 주체에 관한 사유다.






모두가 초고화질 캠코더를 하나씩 들고 다니는 시대, 공허한 찰나의 순간과 내밀한 감정의 변화마저도 시선의 감옥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누군가와 닮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눈빛의 존재들은 공간에 홀로 있었을 때 발산하지 못했을 구경거리이자 피사체로서 감정을 인파에 파묻혀 부득이하게 덧입는다. 그들의 낯선 한 구석이 정교하게 묘사된 피부와 주름 사이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구경거리가 됐던 트라우마나 앞으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상기한다. 이 불안감은 관람객의 파도 속에서 실시간으로 구경거리가 된 오브제의 초점 없는 눈빛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만약 론 뮤익이 이 효과까지 계산한 것이라면, 그는 단순히 섬세함의 끝을 달리는 장인이 아닌, 한 시대를 대표하는 리얼리즘의 마지막 수호자이자 거장이 분명하다.
여기 출품된 작품과 제작 과정 영상을 보며, 이 작품들과 오늘날 헐리우드 특수효과팀이 제작한 오브제는 그야말로 한끝차이가 아닌가 하는 다소 불경한 회의가 내내 불쑥불쑥 튀어나왔음을 감히 고백한다. 그런데 만약 그 한끝차이가 구경거리이자 피사체로서 동시대적 존재와 그 존재에 동화된 우리 자신에 관한 사유를 끄집어내기 위한 계산된 효과였다면, 그 한끝차이는 천지차이라고 재정의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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