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꾼을 기다리며
그를 눈여겨 본 계기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과 오픈스튜디오였다. “대다수 동료 작가가 자기 꿈, 환상, 망상, 욕망, SNS와 씨름할 때 경제엽 작가는 홀로 이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그가 무슨 대단한 투사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휙휙 돌아가는 세상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진솔하게 다뤘고, 보통 사람의 삶을 그렸다. 부조리하게 꿈틀거리는 구도, 음울한 색감, 사연을 품은 듯 의미심장한 인물들의 서사성에는 일견 반듯하고 투명해 보이는 세상의 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설득력이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문 회화의 힘이 느껴져 언제든 잘 될 줄 알았다. 이번에 OCI미술관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인 ‘2025 OCI Young Creatives’로 선정된 걸 보니, 역시 첫 단추가 꿰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로 식당과 먹는 행위를 다룬 작품들을 모아서 걸었다. 워낙 빠르게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경력 연차에 비해 작품 수도 많아 전시장 전체를 한 가지 주제로 밀도 있게 채울 수 있었다. 대학원 오픈스튜디오 당시 쌓아놓은 포트폴리오에 이미 압도되었던 바가 있다. 그새 또 많은 이야기가 쌓은 듯하다.



한 작품 한 작품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하는 스타일도 물론 존중할만하지만, 작가라면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어딘가 꽂혔을 때 빠르게 다작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래야 기회가 찾아올 때 주저함 없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전시 공간의 크기는 대체로 정해져 있는 불변의 조건이고, 그 공간에 걸기 적절한 작품의 양 또한 정해져 있다. 한두 점만 걸어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즉각 출동할 수 있을 만한 작품들이 필요하고, 그것들이 의미, 서사, 표현적 측면에서 일종의 군락을 형성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 경제엽 작가가 먹고사는 문제 하나만 가지고 OCI미술관 세 개 층 가운데 가장 넓은 2층을 온전히 점유하는 데 성공한 것을 보니 다작도 능력이라는 점이 새삼 재확인된다.
먹는 곳, 그곳을 채운 사람들, 그리고 준비와 뒷정리를 보이지 않게 뒷받침하는 사람들을 고루 다뤘다. 넓은 푸드 코트와 고풍스러운 중국집을 높은 시각에서 내려다본 대작들이 인상적이다. 휑한 공간을 스쳐 지나갔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얄궂은 사실은 부자나 빈자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쨌든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음식, 식재료, 먹는 장소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공통의 조건 위에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 연결된다. 작가가 빠르게 이겨 놓은 안료는 그 공통의 조건을 건드리며 먹고사는 행위를 담은 저마다의 기억에 찐득하게 눌어붙는다. 그로써 답을 얻지 못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오랜 질문들이 다시 부상한다.
우리의 식욕과 미감과 상상력을 동시에 자극했던, 푸드 코트 입구에 세워졌던 그 앙증맞은 음식 모형은 언제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나? 이제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해서 어떤 물리적 모형으로 고정해서 선보이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형상도, 재료도, 가격도, 영양성분표시도, 그 무엇도 항구적이지 않다. 세 개의 튀김이 올라간 새우튀김덮밥 모형은 위험하다. 다음 달에는 튀김을 두 개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니까. “모형이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이라는 경고 문구를 매번 상기시키기에 현대인들은 너무 성급하고 다혈질적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모든 정보 인터페이스는 재현성보다 가변성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시각 정보를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데, 모형 하나 수정하자고 매번 장인을 오라 가라 하자니 타산이 안 나온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지구본을 진열해 놓은 집도 찾아보기 힘들다.



보통 사람, 혹은 그보다는 더 어려운 여건에 놓은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번에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이제 학교를 벗어나 전업 작가로서 첫발을 떼는 단계에서 이러한 관심의 진정성은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조만간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내가 실질적으로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되려 내 커리어를 위해 그들의 이미지만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회의에 다다를 수도 있다. 모두가 내면에 침전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분명 세상을 직시하면서 이야기를 길어 올려 주어야 한다. 여기서 관건은 그 이야기의 창조성과 서사성이다. 오직 작품으로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지닌 독특한 힘이 관객 각자의 사유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 새로운 움직임을 추동해 주어야 한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끄는,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작가가 언젠가 봉착하게 될 난관은 시간이 흘러 가벼운 성장통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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