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Herta Müller, Atemschaukel/The Hunger Angel

추모의 글쓰기,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들

일반적인 ‘수용소 문학’과는 다른 길을 가는 작품이다. 우리는 통상 이 장르 문학에서 수용소에 발을 들이게 되는 계기, 수용소에서의 처절한 삶, 거기서 만난 인물들 간의 동료애와 갈등, 불굴의 의지를 통한 위기의 극복, 수용소 밖에서의 삶과 적응에 관한 이야기 등 굵직한 서사를 기대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도 물론 줄거리는 있지만, 선형적인 서사 자체가 중심을 이루지는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짧은 분량의 에피소드들로 쪼개져 있다. 각 에피소드의 중심 주제는 수용소에서 맞닥뜨리는 사물, 인물, 노동, 관습, 감정 등 다채롭다. 찰나의 향수나 꿈에서 본 고향 풍경조차도 하나의 에피소드가 된다. 이 분절된 에피소드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엉성하게 엮여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완결된 형식을 갖춘 하나의 산문이나 서사시가 되기도 한다.

고통을 이야기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무엇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절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감정은 시적인 은유로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굶주렸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배고픈 천사’가 나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강도 높은 노동에 몸과 영혼마저 질식된다고 하지 않고 심장을 닮은 ‘심장삽’이 내 몸 밖에서 또 하나의 중심이 된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겪는 육체적 스트레스는 시적 은유라는 한 단계의 문학적 층위를 거쳐 우리에게 투습한다. 극한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조건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던지고자 하는 일반적인 수용소 문학의 작법에서는 다소 빗겨나 있는 방식이다.

이처럼 고통과 일정한 거리감을 형성하게 하는 작품 내외적인 요인이 존재한다. 내적 요인은 작품의 수용소 경험담 전체가 오래전 경험에 대한 회고로 구성되어 있음을 꼽을 수 있다. 주인공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17살에 수용소에 들어가 22살에 풀려났다(이 작품이 기존 문학의 서사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인공의 전체 이름이 218쪽에 이르러서야 노출된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용소 생활에 대한 회고는 그로부터 60년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37p). 우리는 80세 노인의 60년 전 회고를 듣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절절했던 감정은 침식되었고, 이제는 어렴풋한 고통의 시간을 구성했던 핵심적인 줄기와 뼈대만이 남아 있다. 뼛속 깊이 파고든 고통의 기억은 일부 맥락이 흐려질지언정 몇몇 중심 장면만은 스냅사진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왜 그 장면만 남아 있는지 누군가 물을 때,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사진은 찍힌 이와 찍은 이의 본질에 한 걸음 깊이 다가서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숨그네」를 생존자가 남긴 일종의 사진첩으로서 받아 든 셈이다.

담담함을 구성하는 외적 요인은 앞서 말한 내적 요인과 겹친다. 작가는 동향인 루마니아 출신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Oskar Pastior)의 수용소 회고를 들으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 수용소를 거쳤던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트라우마에 의해, 또 사회 곳곳에 잔존하는 검열의 공포에 의해 수용소 경험담을 좀처럼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작가에게 진솔하게 수용소 경험을 들려준 파스티오르의 존재는 그야말로 귀했다. 두 사람은 그 경험담을 녹여 낸 작품을 같이 완성하기로 했고 실제 수용소 터에 함께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파스티오르가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숨그네」를 마무리하는 것은 오롯이 헤르타 뮐러(Herta Müller)의 몫이 됐다. 기억의 파편은 끝내 매끄럽게 접합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작가의 문체 자체가 원래 서사보다는 언어와 이미지의 상징성에 주목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숨그네」의 독특한 구조는 구술자를 잃은 작가의 상실감 또한 가감 없이 담겨 기존의 문체와 뒤범벅이 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의 형식으로 구현된 상실의 흔적은 소비에트 수용소에서, 아니 어쩌면 문명사 전체의 무수한 수용소에서 잃어야만 했던 영혼들을 처절하게 은유하면서 추모하는 전략이 되었다.

수용소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궁지에 몰아넣고, 그 상황에서 선과 악은 더욱 날카롭게 극단의 날을 벼린다. 악인은 동족을 핍박하는 관리자가 되거나 아내의 수프를 빼앗아 먹으며 아사에 이르게 할 정도로 더욱 악해진다. 그 정도는 되어야 살아남는다. 선인은 규율에서 벗어날 정도의 바보가 되어야만 노역에서 면제되고 살아남는다. 이때 괴로워하는 이들은 악인과 선인의 중간에 끼인 자들이다. 진실을 볼 수 있지만 살아 남기 위해 눈을 감거나 악에 동조해야 하는 자들이다. 일은 일대로 다 하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수용소와 같다면 지나친 비약이 틀림없지만, 선과 악 사이에 끼인 자들을 점점 더 괴롭게 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는 진단도 타당하다. 극도로 부조리한 구조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가기란 대단히 어렵지만, 그럴 때일수록 스스로 끼인 자가 된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그나마 되물을 수 있을 때는 행복한 때고, 되돌릴 수도 있을 때다. 끼인 자는 양쪽을 바라보며 선택할 수 있다. 반면, 선과 악의 칼날 끝에 서면 강력한 자기장에 이끌려 되돌아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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