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고작 100여 년 전쯤에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을까? 황폐화된 조국에서는 도무지 살아갈 길이 없어서, 혹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강제로 붙들려 극한의 추위가 휘몰아치는 이역만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거기서도 가장 혹독하고 버려진 땅을 불하받아 죽을 둥 살 둥 아득바득 밭을 갈고 가축을 쳤다. 숱한 희생 끝에 그나마 살아갈 만한 땅이 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더 혹독한 광야로 내쫓겼다. 그런 일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내 부모가, 내 부모의 부모가 어디서 왔는지는 잊지 않았다. 그런 초현실적인 일이 불과 90~150년 전에 벌어졌고, 그 처절한 분리의 상흔은 지금까지 후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농경민족에게 땅은 목숨줄이나 다름 없다. 땅이 있어야 곡식을 키워 식구를 먹이고 가축을 친다. 땅은 1년을 주기로 소출을 내놓는다. 날씨야 하늘의 뜻이지만, 그래도 이변이 없는 한 공들인 만큼 보상해 준다. 공들인 값을 제대로 누리려면 결국 내 땅이 있어야 한다. 주인의 땅을 일구는 소작농일지라도 매일매일 눈 뜨면 자동으로 발걸음을 움직여 도달하는 내 땅이 있어야 한다. 땅은 늘 거기에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농경민족에게는 삶의 기본 조건이다. 따라서 땅이 떠돈다는 것은 하루아침에도 목숨줄이 오락가락함을 의미한다. 김숨이 「떠도는 땅」에서 그려낸 고려인들의 애환은 거기서 비롯된다.
소설은 특정 인물을 중심에 놓고 구구절절한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기승전결이 없다. 금실이라는 중심인물은 있지만, 작가는 그 인물이 이야기의 압도적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을 부단하게 억제한다. 금실의 주변에 배경, 성품, 외양, 그 무엇도 좀처럼 유추하기 힘들 만큼 얕은 설정의 주변인들을 여럿 배치해 두었다. 그들은 폐쇄된 무대에서 저마다 한 마디씩을 얹는다. 상황에 적절히 부합하는 대꾸도 있지만, 대체로는 특별히 접합하는 맥락 없이 저마다의 사연을 누가 듣거나 말거나 구구절절 풀어 놓는다. 예전에 정착했던 곳은 어땠는지, 거기서 누구를 만났는지, 누구와 사랑에 빠졌고 배신을 당했는지, 어떤 부조리한 권력의 농간으로 이렇게 떠밀렸는지, 얼마나 삭막한 의심과 배신 속에 목숨을 부지하며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를 두서없이 펼친다. 행선지도 모른 채 짐짝처럼 떠밀린 열차 안에서, 극한의 절망과 불안에 사로잡힌 인물들은 비슷한 처지에 처했다는 공감대만으로 임시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저마다의 드라마를 늘어놓는다. 차가운 열차를 부유하는 먼지와 함께 쌓여 나간 이야기의 파편들은 땅에서 축출된 인간의 서러움을 가장 극명히 드러내는 콜라주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이라기보다 채록집에 가깝다. 작가는 고려인의 비극을 생생하게 재현하면서도 문학적 감수성을 살려 담아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수집했을 것이다. 수집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과 실존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느끼며, 이 소중한 이야기들이 최대한 많이 담길 수 있을 만한 방식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인물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는 방식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독자가 쉽게 이입할 수 있을 만한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짜임새 있는 서사보다는 여러 인물의 분절된 이야기들의 콜라주가 자연스럽게 채택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생생한 사연들이 열차에 실렸다. 각각의 사연은 한 개인의 수난을 직시하는 차원을 넘어 역사와 권력의 흐름 가운데 무기력한 한 존재가 갖는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짧은 분량 속에 최대한 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담으려는 노력이 지나칠수록 열차에 실린 사람들의 대화에서 기대할만한 핍진성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 인물이 왜 갑자기 이 대목에 불쑥 끼어들어 구구절절 묻지도 않은 사연을 늘어놓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반복되는 탓에 몰입감이 툭툭 끊겼다. 사실 여기 구술된 사연들을 모두 담으면서도 서사적 짜임새를 살리려면, 열차 안 모든 인물의 과거사를 관통하는 대하소설이 필요하다. 작가는 서사의 완결성을 다소 포기하는 대신 본인이 애지중지 발굴한 사연들을 어떻게든 한 작품 안에 함축적으로 담아 넣는 데 집중했다. 그것은 작가의 전략적인 선택이고, 또 그 선택으로 인해 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세련된 타협점은 있을 수 없었겠는지가 궁금하다.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복원해 내는 과업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지만, 그 과업을 추구하면서도 서사적 몰입감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방법이 분명 어딘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No Day But Today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