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I. 밀러의 「충돌하는 세계: 과학과 예술의 충돌이 빚어낸 전혀 새로운 현대예술사」

Arthur I. Miller, Colliding Worlds

두 문화를 만나게 하려면

예술과 과학은 본디 한 몸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개별적 학문 분야의 전문성이 심화하면서 두 문화는 제도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했고, 분화된 체계 안에서 각기 기득권적 구조가 견고해지면서 오늘날에는 그것이 한 몸이었다는 사실조차 잊혔다. 과학은 예술이 실용적 가치가 없는 신선놀음이라 생각하고, 예술은 과학을 감성이 메마른 숫자놀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미술사의 흐름을 대강만 훑어보더라도 그 발전을 추동해 온 기저 철학과 기술적 근간에는 과학기술의 발견들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근대 회화의 원근법은 기하학에서 출발했으며, 광학의 발전이 사실주의 회화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상대성이론은 입체파의 다중시점을 자극했으며, 정신분석학의 발견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거창한 과학적 이론의 발견 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재료의 진보 차원에서도 기술이 미친 영향은 크다. 카메라가 발명되어 사실주의적 초상화의 실용적 가치가 퇴색되지 않았다면, 화학 원료 기반의 튜브 물감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기차에 앉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거나 교외로 나가지 못했다면 인상주의 회화는 바로 그때 그 장소에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AI의 눈부신 발전이 예술의 제작, 감상, 유통에 미치는 영향은 전 인류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이제는 예술의 도구로서 기술이 아닌, 예술 창작의 주체로서 기술이 새로운 미학적 화두가 되고 있다.

과학이 시각 예술에 영향을 미친 양상은 작품의 제작 국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을 분석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과학기술의 역량이 투입되고 있다. X-선 및 적외선 촬영 기법은 회화 작품 표면 너머의 제작 과정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탄소연대측정 기법은 작품 제작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예술의 제작 전후 전 과정에 긴밀하게 얽혀 있으므로 예술의 역사 및 동시대 경향을 논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주제가 된다. 또한 과학기술은 예술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우리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에 그 자체로 작품의 중심 주제가 되는 경향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과학기술이 예술의 제작, 감상, 유통에 미치는 영향은 비교적 뚜렷한 반면, 예술이 과학기술에 미친 영향은 불분명하다. 예술을 사랑하는 어떤 과학자가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연구에서 어떤 식으로든 활용했다든가, 예술 창작 활동과 과학 연구를 겸하면서 시너지를 얻은 과학자라든가, 예술적 표현 수단 및 방식을 적극 활용하여 과학적 지식에 대한 수용성을 높인 사례 등은 개별적 사례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과학사적 관점에서 뚜렷한 경향을 만들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예술과 과학이 각각 추구하는 탐구의 방식, 최종적 산출물, 목표 등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결과물은 지각의 감성적 측면에 주로 소구하는 반면, 과학 연구의 결과물은 성숙도가 고도화될수록 대체로 물리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실체로 환원되어 그 파급의 과정을 실증적으로 규명할 수 있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술에 남은 과학의 흔적은 어느 정도 규명이 가능하나, 과학에 남은 예술의 흔적은 희미한 윤곽으로만 남는다. 두 문화의 교류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비대칭성은 이 책에서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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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자인 저자는 20세기 초중반의 과학예술 융합 사례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지만, 역사적 흐름보다는 최신 경향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20세기 초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피카소(Pablo Picasso), 미래주의자, 몬드리안(Piet Mondrian), 달리(Salvador Dalí) 등 당대 아방가르드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열게 했다(1장).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미시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공간만이 이 우주 속의 유일한 시공간이 아닐 수 있다는 발견은 늘 새로운 관점과 주제에 목말라 있던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보고가 되었다. 모호한 것, 상식에 반하는 것, 감춰진 것들을 누구보다 앞서서 세상에 펼쳐 보이려는 선도적 예술가들의 야심은 유례없는 형식의 폭발과 아방가르드 혁명을 불러왔다.

피카소가 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대 과학적 발견을 일방향적으로 수용한 결과이지, 과학자와 예술가가 협업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과 과학이 협력적으로 융합해 일련의 결과물을 내놓았던 최초의 사례는 1966년에 뉴욕에서 결성한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였다(2장). 물론 이 협업을 역사상 최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으나, 20세기 이후 조직적, 가시적, 자발적 협력의 사례로 조건을 좁힌다면, 최초라는 것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클뤼버(Billy Klüver)와 장 팅겔리(Jean Tinguely),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로버트 휘트먼(Robert Whitman) 등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이 단체는 <아홉 개의 밤: 연극과 공학>이라는 기념비적 과학-예술 종합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추진했고, 공식 단체로서 발돋움하여 다양한 파생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비록 <아홉 개의 밤> 이후로는 주목할 만한 가시화된 움직임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융합적 사고를 지닌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의 연구 활동을 이어가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고, E.A.T.에 영감을 받은 단체와 전시도 속속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선례가 되었다.

3장부터는 기술 및 예술의 세부 장르별로 대략적인 발전의 양상과 최신 사례들을 다루었다. 3장에서는 전자통신기술의 총아인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시각 예술들을 다루었는데, 감각이 있는 기술자들은 컴퓨터의 역사 초창기부터 이 도구가 미적인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일만한 도구라는 점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여기서도 선도적 선례들은 벨 연구소 출신 기술자들이 앞장서 만들어 냈다. 그들에게는 최첨단의 컴퓨팅 자원들과 그것을 창의적으로 활용해 낼 줄 아는 기술자들, 그리고 잉여적 생산활동까지도 지원해 줄 수 있을 만한 리더십과 여유 자원이 있었다. 기술, 자원, 인력, 시간이 창조성과 결부되면 비실용적인 영역으로 산출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컴퓨터를 활용한 초기 시각 예술이 그러한 사례였다. 이때의 산출물은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을 모사한 듯한 불규칙한 기계적 이미지로부터 초기의 생성형 AI라고도 할 수 있는 알고리즘 기반의 시각적 패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대목에서 컴퓨터 활용 예술을 어느 선까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사례로 볼 것인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컴퓨터를 활용한 예술의 초기 사례들은 주로 단순한 수준의 피드백 루프를 적용한 것이었다. 만약 컴퓨터에 자체적인 연산의 유연성을 전혀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붓이나 연필처럼 인간의 의도에 전적으로 충실한 창작 도구로만 활용한다면 그것은 예술과 기술의 진정한 융합 사례로 꼽기 어려울 것이다.

4장에서는 컴퓨터를 활용한 예술을 넘어 미디어 아트로의 진화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담았다. 앞선 장에서 컴퓨터를 활용한 예술이 시각적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피드백 루프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었다면, 이 대목에서부터는 컴퓨터가 연산의 자율성을 한 차원 더 적극적으로 보장받는 국면에 다다르게 된다. 컴퓨팅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예술가는 점점 창작자가 아닌 이미지와 도구를 선택하는 자로 그 역할이 변모하고 있고(143p), 이러한 변화는 최근 AI 기술의 혁명 속에 더욱 빠르게 창작 현장에 퍼져나가고 있다. 미디어 아트 시대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조직으로 주목할 만한 곳은 MIT미디어랩이다. 이곳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부설 연구소로서 미디어 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친 자유롭고 창의적인 다학제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산출물들은 실용적 제품과 미학적 오브제의 경계를 넘나든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기술자들과 과학적 지식을 겸비한 예술가들이 학문적 경계가 모호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해 내는데, 이 중 일부는 DARPA의 연구 성과물이 되어 방산 제품에 적용되기도 하고, 또 일부는 갤러리에 팔리거나 전시되기도 한다. 20세기 후반 벨 연구소의 사례처럼, 자본, 지식, 인재, 창의성이 결부된 조직은 상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상상하지 못한 성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최신 물리학 연구 결과에 대한 접근성이 개선되고, 학제적 교육이 활발해지면서 물리학적 원리를 시각화하는 예술가들도 늘어나고 있다(5장). 끈 이론을 조명 예술로 시각화하는 폴 프리들랜더(Paul Friedlander)나 양자 물리학의 양면적 성격을 설치물로 표현하는 율리안 포스안드레에(Julian Voss-Andreae)가 대표적 사례다. 이들의 작품은 일반적인 예술 작품보다는 이해하기 어렵고 대중에 노출될 기회도 적겠지만,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일반적인 논문보다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이며, 대중적 파급력도 좋다(200p). 그런 점에서 과학적 원리를 구현한 예술 작품은 특유의 직관적 소구력을 바탕으로 특정한 지식이 인류에 가져올 파급력에 관해 새롭고도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 내는 유용한 촉매가 될 수 있다. 기초원천 분야의 과학기술 연구와 예술가의 협력에 관한 실례로 CERN(Organisation Européenne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상주 예술가 프로그램과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의 예술가 초청 프로그램이 소개되었다. CERN은 2009년부터 콜라이드 앳 세른(Collide@CERN)이라는 상주 예술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는데, 선정된 예술가는 두 달간 CERN에서 상주하며 유럽 최고 과학자들과 허물없이 교류하며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이때 예술가가 CERN을 홍보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예술과 과학이 동등한 관점에서 교류하는 것을 중요 원칙으로 설정하였다.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도 2000년에 예술가 초청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예술가들이 과학자들에게 무엇이든 질문하고 자료도 얻을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했다. 스티브 밀러(Steve Miller)는 이러한 프로그램의 결과로 연구소의 다양한 대형 연구시설장비를 활용해 가시적 경계를 벗어난 창의적 이미지들을 제작할 수 있었다.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의 진위를 판별했던 유명한 사례는 쉬어가는 코너처럼 책의 중간인 6장에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다. 물리학자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는 프랙털 원리를 바탕으로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작품에서 특유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폴락이 몸을 움직여 물감을 떨어뜨리는 특유의 방식이 여러 작품에 걸쳐 유사하게 독특한 프랙털 이미지를 형성해 내므로, 이 패턴을 기반으로 작품의 진위을 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알렉스 매터(Alex Matter)의 의심스러운 컬렉션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진품 감정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 논쟁에 참전했었다. 그의 분석은 좀 더 설득력 있었던 재료 분석에 비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으나, 과학적 패턴 분석이 작품 감정에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였다. 또 이 논쟁에서 중요한 시사점 하나는, 전통적인 감식안을 중시하는 예술계가 최신의 과학적 감정 기법을 좀처럼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272p).

7장에서는 생명과학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 작품들을 다룬다. 생명과학은 인류의 건강, 안녕, 실존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주제이므로 이것을 예술로 표현할 때도 강한 관심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강한 윤리적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실제 생명체의 조직을 뜯어 실험실에서 배양해 조각으로 출품했을 때, 이 오브제를 생명체의 연장선상으로 볼 것인지, 단순히 돌을 깎은 조각품과 동등하게 처리할 것인지, 또 전시 과정상의 부패 및 감염 가능성에 대하여 어느 주체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관리하고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문제 등은 거의 탐색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생명과학은 여타 과학 영역에 비해 윤리적 요구와 제도적 규제가 가장 첨예한 분야로 손꼽히는데, 생명과학 기반의 연구에서 기인한 예술적 창작물이 단순히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모든 과학 프로토콜의 규제를 빗겨난다면 이러한 자유의 허용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도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반대로 얘기하면, 예술의 허용 한계선은 과학에 비해 훨씬 넓으므로, 각종 규제에 가로막혀 연구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예술가로 정체성을 탈바꿈하여 이런저런 시도들에 나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유전자를 조작한 나비, 토끼, 이끼 등이 작품 재료나 결과물로서 소개되고, 심지어 퍼포먼스를 위해 말 피를 자기 몸에 주입한 극단적 예술가의 사례도 등장하는데, 이들을 이해하고 용인할 제도적 틀은 미비하다. 최소한 과학계 내부에서는 ‘예술적 과학 연구’, 혹은 ‘과학적 예술 연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과학 기반의 예술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큰 틀의 논의 가운데서도 가장 매혹적이며 첨예한 소주제라고 볼 수 있다.

8장에서는 기술에 기반한 음향 예술을 다루는데, 여기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도 부족하고, 책으로 사례 작품들을 들을 수도 없으니 가장 지루한 장이었다. 다만, 이 장에서 소개된 베른하르트 라이트너(Bernhard Leitner)의 소리의자는 예술 작품이 과학에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337p). 라이트너는 1975년에 여섯 개의 스피커를 배치한 소리의자를 개발했는데, 1980년대에 대학병원 의사들이 이 의자를 테스트한 결과 환자들의 긴장 완화에 효과가 있었다. 과학만 예술에 단선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융합의 한계에 대한 적절한 반례인 셈이다.

9장은 방대한 데이터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논문 인용 네트워크, 항공기 이동, 날씨, 올림픽 반응 등 일상적으로 흘려버릴 수 있는 데이터들이 시각화 알고리즘을 만나 멋진 작품으로 변용되었다. SNS, 빅데이터, 스마트폰, IoT, 초연결 시대가 가속화됨에 따라 데이터를 가공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미학적 측면에서도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유용함과 아름다움은 공존하기 어려운데, 성공적인 디자인이 그러하듯, 두 가치를 절묘하게 결합하는 예술가가 주목을 받을 것이다.

10장은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작품들을 지원하고 거래하는 기관들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과학 기반의 예술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고, 전시나 거래가 용이한 형태를 띠고 있지도 않아서 시장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으나, 최근 관심을 보이는 후원 기관과 전문 갤러리가 등장하면서 그나마 시장이 형성되는 첫 단계가 열리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제성은 미비하므로 과학-예술 후원 기관들은 대체로 이 분야에 큰 관심을 보이는 소수 선각자의 열정에 기반해 운영되는 실정이다. 웰컴 트러스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과학 갤러리 등의 사례가 소개되었다.

11장은 저자가 인터뷰했던 예술가들이 미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별도로 모아 정리한 부분인데, 기술과 장르가 중심이 되었던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는 생뚱맞은 전개에 가깝다. 과학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기술, 경험, 직관 등의 개념을 미학의 중심에 두었다. 작품에 새로운 과학 및 기술 지식을 도입함으로써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미적 자극의 세계가 열리게 되고, 이것을 아름답거나 가치 있다고 느끼게 하는 메커니즘은 거창한 미학적 논리가 아닌 내면에서 순간적으로 우러나오는 직관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빚어내는 경험과 직관의 미학은 기존의 전통적 미학 이론의 창작 및 감상 메커니즘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일까, 아니면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일까? 지금으로써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순 없지만, 예술가들이 이야기하는 직관이라는 것이 창작자와 감상자를 한데 엮어 주는 감수성의 섬광 같은 것이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공통의 감각으로서 발현되는 무언가라면 다시금 근대 미학의 거목인 칸트(Immanuel Kant)를 소환해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터이니 아이러니한 면이 있기는 하다.

마지막 12장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에 대한 여러 생각과 전망을 다루었다. 누군가는 융합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전문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융합이 가져올 수 있는 가치는 명확하고, 이것을 촉진하기 위한 첫걸음도 명확하다. 바로 학제적 교육과 시장의 형성이다. 자연스러운 교육의 과정을 통해 두 문화의 접점을 늘려야 하고, 그 접점에서 나온 생산물이 경제적 가치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명확한 보상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융합 수준이나 그것을 이해하는 사회적 맥락은 국가나 민족마다 다르겠지만, 융합을 촉진하는 기본 틀로서 교육과 시장이라는 두 구심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현실에 맞는 논의도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두 문화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촉진하자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고, 모든 혁신의 출발점이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전혀 다른 배경에서 생계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두 존재가 하나의 시공간에서 마주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같은 목적성을 품고 협력하기란 더더욱 힘들다. 가시적인 보상이 없는 상황에서 일차적인 과업을 뒤로 젖혀 두고 부차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모든 활동에는 비용이 든다.

기업이나 자본가들의 선의에 입각한 후원을 기대하지만 100% 순수한 후원이란 존재할 수 없다. 뉴욕에서 예술가와 과학자의 명시적 협력을 처음으로 뒷받침했던 벨 연구소조차 초기 아이디어들이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며 후원 여부에 대해 함구할 것을 주문했다. 기술-자본의 후원은 기술 낙관주의적 입장에만 호의적이기 마련이다. 이렇듯 후원 기관의 눈치에 못 이겨 단선적인 방향으로 협력이 제한된다면, 그 결과물은 작위적일 수밖에 없고 비평적 관점에서도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된 사례 중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였던 모델은 과학 기관에 예술가를 입주시키는 형태였다. 어차피 예술가들에게 작업 공간과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레지던시는 지금도 어느 정도 표준화된 지원 방식이다. 이 방식을 국공립 과학기술 연구시설에서도 차용하여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유도한다면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미적 결과물들이 창출될 수 있다. 일정 기간을 정해 상주하는 방식도 좋고, 그것이 부담된다면 주기적으로 방문, 견학, 미팅할 수 있도록 여건만 제공해 주는 낮은 수준의 협력 모델에서부터 시작해도 좋다. 예술가들은 최신의 과학 시설장비와 연구 결과를 접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녹여 새로운 미적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예술가 특유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접하고 자기 연구에 응용하면서 연구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예술가들의 질의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도출할 수도 있다. 결과물은 과학계와 미술계 양쪽에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질 수 있으며, 과학문화 대중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러한 협력의 성과물을 촉진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있다. 우선, 과학자와 예술가 간 유의미한 협력이 이루어졌다면, 창작 과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려야 한다. 이를 통해 기여가 명시적으로 선언되고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후원 기관은 작품의 제작에 지식과 아이디어로서 기여할 뿐, 그 주제나 방향성에는 일체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후원 기관이 작품을 검열한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결국 무엇이 됐든 결과물은 탄생하겠지만, 작품의 창조성과 진정성은 급격히 퇴색될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가와 작품을 기관 홍보의 도구로 보는 시각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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