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asso’s War: How Modern Art Came to America
제국의 성립 과정을 쓰기 위한 전제조건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다. 현대미술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미국에서 수용되었는가를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대미술이란 프랑스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발흥했던 전위적 아방가르드들의 예술 세계를 일컫는다. 즉, 인상주의로부터 입체파와 야수파를 거쳐 표현주의와 추상으로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계보다. 이것이 미국 사회에서 자명한 계보학적 발전이자 미학의 승리로 비준되기까지는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이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제국에서 혁신의 씨앗을 뿌렸다는 이야기지만, 세밀하게 다시 뜯어보면 여러 욕망과 이해관계와 우연과 정치경제적 격변이 동시에 맞물려 돌아간 복잡한 과정이었다. 저자 휴 에이킨(Hugh Eakin)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 과정을 충실히 재구성해 냈다.
모더니즘을 주도한 모든 예술가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에서의 수용 과정을 돌이켜 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피카소(Pablo Picasso)를 전면에 내세운다.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가장 방대한 화풍과 실험을 선보였고, 가장 많은 세부적 화파의 운동에 폭넓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또한, 정치와 실물경제에 무감각한 동시에 문란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 그 자체로 모더니즘을 표상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이미 파리 미술계에서 중심적 인물로 자리를 잡았지만, 미국에서 피카소를 조명하려는 시도는 1934년까지도 번번이 실패했다. 전시는 관심을 끌지 못했고, 어렵사리 대서양을 건너온 작품들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미국의 대중들이 이 혁신적이고 산만한 예술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미국 사회에 모더니즘이 뿌리를 내린 증거라고 할만했다. 그런 의미에서 피카소를 중심으로 미국의 현대미술 수용기를 돌아보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
미국이 피카소를 현대미술의 구심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은 1939년 11월에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개최한 「피카소: 화업 40년(Picasso: Forty Years of His Art)」 전이었다.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가 기획한 이 기념비적 전시는 피카소의 미국 침공을 공식화하는 무대였다. 이 전시를 계기로 미국 전역을 누비는 순회전이 이어졌으며, 공공미술관들이 피카소를 소장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대 미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가 피카소의 혁신에서 자극을 받아 새롭고 급진적인 실험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을 고려하여 600여 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저술은 「피카소: 화업 40년」 전을 절정부로 설정해 두고 거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또한, 그 전시가 남긴 유산과 연관된 인물들의 뒷이야기까지 흥미롭게 풀어 놓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명언을 되새길 필요도 없이 어떠한 거대 서사도 결국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이 쌓여 빚어진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알고자 하는 것은 누군가의 거친 해석으로 납작하고 평평해진 표층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원형을 간직한 채 보석처럼 빛나는 진실의 원형이다. 이 책이 그 원형 자체를 보여준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대중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헌의 범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깊이 있게 들어간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실질적 중심인물은 피카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둘러싼 수집가, 화상, 박물관장 등이다. 초반부는 뉴욕을 거점으로 선도적인 아방가르드 미술 옹호가이자 컬렉터로 활동했던 존 퀸(John Quinn)이 서사를 주도한다. 1부 전체의 주인공은 사실상 존 퀸이나 다름없다.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자수성가한 변호사인 퀸은 탁월한 안목으로 동시대의 진보적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그들이 제도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입법 활동에도 나섰지만, 그의 생전에 현대미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준 미국 내 옹호자들은 드물었다. 그의 방대한 컬렉션은 그 자체로 현대미술관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취향과 방대함을 갖추었지만, 사후에 적절한 인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럽 각지의 컬렉터들에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퀸 컬렉션의 가치는 그것이 모여 있을 때보다 오히려 그것이 흩어짐으로 인해 오히려 역설적으로 빛을 보았다.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다른 후원자들을 움직여 현대미술관이라는 새로운 결실로 이어지게 된 것인데, 실상은 그 인과관계조차 직접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퀸의 유훈을 따르고자 했던 몇몇 선도적인 후원가들과 학생 시절 우연히 그 컬렉션을 보았던 알프레드 바에 의해 한참 후에야 비로소 제도권 미술관이 퀸 컬렉션 일부를 다시 품게 되는 결실에 이르렀다. 퀸의 컬렉션이 구성되는 과정, 그것이 흩어지는 과정, 그리고 현대미술관을 통해 다시 모이는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완결성 있게 짜맞춰지는 구조가 인상적이다.
피카소의 작품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원했던 화상들도 이 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력 초반에는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가 피카소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차 대전 이후로는 로젠베르그(Paul Rosenberg)가 피카소에게 부와 명성을 안겼다. 두 유대계 화상은 단순히 제작된 작품을 구매하고 컬렉터와 연결해 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화가와 소통하며 새로운 조류를 알리기도 하고, 컬렉터들의 수요가 있거나 유행하는 방향으로 화풍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화가의 소통 창구로서 대외적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특정한 전시에 출품 여부를 함께 결정하기도 했다. 칸바일러와 로젠베르그는 상업적 성격의 미국 전시를 다수 기획했지만 「피카소: 화업 40년」 전 전까지는 대체로 실패로 끝났고, 이러한 시행착오들은 피카소에게 미국 시장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함께 굴욕감을 안겼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에 로젠베르그는 작품을 유럽의 화마 속에 두는 것이 위험함을 조기에 인식했고, 알프레드 바와 협력을 통해 시의적절하게 미국으로 반출할 수 있었다. 전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새롭게 부상하는 경제·군사 대국에서 거듭된 순회전을 통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공공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작품을 팔 수 있었을뿐더러, 현대미술 컬렉션 전체의 가치가 평균적으로 상향되었으며, 심지어 화상 본인은 전시를 계기로 미국 미술계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치의 추격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했을 때 미국 미술계에서 새로운 삶의 거처를 모색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로젠베르그의 유럽 탈출기와 미국 정착기는 소설처럼 긴박하게 묘사되어 특별한 감동을 선사한다.)

1부가 존 퀸의 애석한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난 후 2부는 알프레드 바가 주도한다. 27살에 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한 이 아방가르드 미술 애호가는 메트로폴리탄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혁신적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표와 여전히 보수적인 이사진의 압력 사이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미술관의 밑그림을 그려 나갔다. 독립된 건물도, 상설 컬렉션도 없이 허울뿐인 미술관에서 대중들에 거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작품들을 확보해 전시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매일매일이 불가능에 맞서는 투쟁이었다. 당대 모더니즘은 공산주의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던 미국 사회에서 일종의 정신병적 징후로 받아들여졌고, 기독교적 가치에 기반한 미국 사회를 분열하려는 음모로까지 읽혔다. 그런 점에서 “당신네들은 미술관일 수 있거나 현대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가 될 수는 없습니다.”라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지적은 정확한 현실 인식에 가까웠다(464p). 그럼에도 바는 굴하지 않았고, 반 고흐(Vincent van Gogh) 전 같은 몇 차례의 성공을 거치면서도 최종 목표는 지금까지 어디서도 시도한 적 없는 궁극의 피카소 전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모든 경력을 아우르는 대규모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의 거대한 분기점을 선언하고, 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확고히 굳히려는 열망을 놓지 않은 것이다.
작품을 수집하는 과정이나 미술관의 대내외적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난했으나, 의외로 그 일을 쉽게 풀어갈 수 있게 해준 사건은 결국 전쟁이었다. 제1차 대전을 거치면서 작품이 언제든 권력에 의해 징발될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생겼고, 유럽 전역이 화마에 휩싸이며 작품을 보존할 안전지대는 오히려 대서양 건너편일 수 있다는 인식도 커졌다. 나치가 모더니즘 세력 전부를 퇴폐미술로 규정하면서 화마로부터 안전한 미국이 자유 진영 전부를 대변하여 모더니즘을 옹호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도 부상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대립 구도 속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미국 내의 인식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상대 진영이 적으로 규정한 퇴폐가 오히려 자국의 자유와 번영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읽힐 수 있었다. 이렇듯 소수의 혁신가가 씨를 뿌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헌신과 국제 정세가 빚어낸 우연까지 겹치며 「피카소: 화업 40년」 전의 신화는 현대미술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인물을 중심으로 방대한 사료에 접근한 집념이다. 미국이 피카소를 수용하는 과정을 재구성하기 위해 엄청난 분량의 서신, 일기, 메모 등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개인적인 자료까지 공개되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깊이 있는 자료들이 제시되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도 도드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대목이 오히려 분석 대상의 실존성을 강화한다. 예를 들어 존 퀸은 1차 대전을 거치며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에 극도의 혐오를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컬렉션도 파리 작품들을 위주로 구성한다. 세잔(Paul Cézanne), 쇠라(Georges Seurat), 루소(Henri Rousseau), 고갱(Paul Gauguin), 고흐를 최고로 친 반면, 클레(Paul Klee),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등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216p). (이러한 국적 기반의 편견이 오늘날까지도 미술사 서술에 은연중에 내재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하지만 관대한 후원가 존 퀸은 유대인 화상들과 거래하면서 갈등을 빚을 때 전형적인 유대인 혐오적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228p). 아일랜드계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했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화상들의 사생활까지 파고 들어가는 집요함도 인상적이다. 로젠베르그가 피카소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로젠베르그의 이혼 소송 문제는 물론 그가 경쟁하면서도 협력 관계에 있던 윌덴스탱(Wildenstein)과 경마 업계에서 어떻게 대리전을 치뤘는지도 파고든다. 두 화상이 각각 마사의 소유주로서 어떤 말과 기수를 고용해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는지가 자세하게 논의되는데(309p), 어떻게 보면 논점에서 다소 벗어난 신변잡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에피소드는 성공과 명성을 추구하면서도 허영심과 사생활에 발목 잡힌 한 인물이 몰락의 위기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에 대한 지배력을 일정 부분 상실하면서 미국 전시에 협조하도록 내몰리게 되는 과정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에 대한 저자의 시야가 놀라운 대목이다.
책은 짧은 기간의 역사를 다루지만, 이 역사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연속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닌, 폭넓은 지정학적 범위에서 펼쳐지는 동시다발적 욕망과 이해관계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짧은 시기의 변동을 이렇게 다양한 사람에게 입체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상호 유기적으로 맞물려 해석하는 저술은 드물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구체적 날짜의 에피소드와 정황들을 문학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통해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내고 마치 미술사 속 현장에 들어가 주요 인물들을 관찰하는 듯한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근현대미술사 저술 가운데 사료적 가치와 재미를 동시에 잡은 몇 안 되는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런 탁월한 저술이 또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 현대미술을 주제로 하여 나왔다는 점이 어딘가 원통하다. 전후(戰後) 추상표현주의의 부상 이래 미국 현대미술은 그 나라의 선도적 비평가들이 원했던 대로 파리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최근 그 힘이 많이 약화하기는 했으나 미국의 동시대 미술은 여전히 군사·경제 대국의 위상에 부합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책이 현대미술의 분기점으로 묘사하는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있다. 이 기관의 위상은 단순히 대표적인 현대미술의 거점 차원을 넘어 무엇이 미술이고, 무엇은 미술이 아닌가에 대한 동시대적 규준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 있다. 설립 초기부터 그랬다. 현대미술관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소장함으로써 입체파를 아방가르드 혁신의 시초로 세웠다. 뒤샹(Marcel Duchamp)의 <샘>을 소장함으로써 반미술을 혁신의 아이콘으로 옹립했고, 폴락(Jackson Pollock)의 추상을 대거 소장함으로써 모더니즘 혁명의 중심지가 뉴욕임을 선언했다. 심지어 현대미술관을 비판한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를 현대미술관이 스스로 소장하고 전시함으로써 반제도를 제도권으로 편입시켰다. 최근에는 4D프린팅으로 출력한 드레스를 소장함으로써 기술적 혁신과 미학적 혁신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답을 내어놓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이 미술관이 모더니즘을 미국 미술계 주류 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과정을 이토록 탁월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저서가 탄생함으로 인하여 미국 미술에서 현대미술관이 지니는 입지, 나아가 오늘날 전 세계 동시대 미술계에서 뉴욕이 차지하는 입지는 더욱 강력한 신화화의 기제에 몸을 싣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승자독식(winner takes it all)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겠지만, 이 과정을 미학적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싶은 외부자 관점에서 원통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라도 마땅한 묘수는 없다. ‘억울하면 너희도 현대미술 수용 과정을 이렇게 치밀하고 아름답게 기록하면 되잖아.’라고 지적한다면 ‘우리도 그런 게 있어’라며 보여줄 예시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예시가 조만간 도래하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점이 더더욱 암울하다.
이런 책이 나오기 위한 전제조건들을 일단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동시대성의 기준을 설정하는 제국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지니고 있기에 비로소 이 나라가 현대미술을 수용한 과정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미국이 아닌, 동시대 시각문화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어떤 국가가 현대미술을 수용한 과정에 전 세계 독자가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별로 없다. 미국이라서, MoMA라서 저자의 지적 모험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애초에 제국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면, 흥망성쇠에 대한 연구 동력과 지원도 창출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다음 조건으로는 아카이브를 꼽을 수 있다. 저자는 파리와 뉴욕을 오간 엄청난 양의 서신과 그밖에 메모, 일기, 인터뷰 등을 활용해 짧은 기간의 역동적 흐름을 촘촘히 재구성해 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일단 그 자료들이 어딘가 찾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분명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소실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양이 존재했기에 이 같은 집대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는 아카이브 관리에 있어서 그동안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 그 자체만을 수집하고 보존하기에도 급급했던 것이 현실이다. 몇몇 국공립 기관과 뜻있는 개인 연구소 등이 뒤늦게나마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기반은 여전히 미흡하다. 예컨대 몇 년 전 이건희 컬렉션의 기부를 계기로 개인 컬렉터 보유 작품을 기반으로 하는 근현대 미술사 연구가 다시금 활발하게 촉진되었지만, 그 컬렉터가 작품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남긴 편지나 메모 같은 사적 기록물이 열람할 수 있는 상태로 어딘가에서 보존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암울한 답만 돌아올 것이다. 기록이 없거나 공개되지 않는다면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는 소유자 또는 기부자의 해석과 설명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고, 그 해석은 과도한 신화화로 흐를 우려가 크다. 자료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소실되고 있다. 작가, 화상, 평론가, 컬렉터, 언론인 등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이 생산한 문서들에 대한 체계적인 수집, 보존, 연구가 필요하고, 공개 범위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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