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샤 맥 스위니의 「만들어진 서양: 서양이란 이름에 숨겨진 진짜 역사」

Naoíse Mac Sweeney, THE WEST

“역사 이론으로서 서양 문명의 기원은 탐험, 계몽, 제국을 연결하는 데 있다.”
247p

서양을 부술 연장통

이제는 ‘오래도록 견고한 원칙으로 여겼던 것들이 알고 보니 허상이고 신화에 불과했더라’, 라는 진술조차 진부해졌다. 우리는 그동안 포스트모던의 광풍을 거치며 의심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허울에 대해 의심의 화살을 이미 겨눠봤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국가를 ‘상상된 공동체’라고 깎아내렸고,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거대서사에 종언을 고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역할극에 불과하다고 지적했고,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누군가의 문화적 취향마저 계급적 구조가 만들어낸 ‘구별짓기’의 산물임을 간파했다.

이제는 ‘서양’이라는 광범위하고 불확실한 공동체가 새로운 표적이 됐다. 구체적으로는 서양사라는 주류 역사의 계보학이 문제가 된다. 이때 서양사의 계보학이란,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의 영광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세 기독교 체제에 패권을 넘겨주고, 르네상스에 도달해 다시금 그리스-로마의 정신적 유산이 재발견되어 기독교 기반의 지도 체제와 성공적인 접붙이기가 이뤄졌으며, 이내 찬란했던 대항해 시대의 영광으로 이어졌다는 선형적 서사다. 이 서사의 구체적 단위 국면들을 쪼개가며 제국의 깃발이 이양되는 들여다보면 모순적인 구석이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오늘날 평균적 소양의 대중은 대체로 이 도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첫째, 각목에서 오류가 있더라도 지적으로 권위가 있는 누군가나 제도 기관이 큰 틀에서 그렇다고 선언하면 반박하기가 어렵다.

둘째, 제위의 이전이라는 도식은 주로 역사 속 승자들이 자신들의 지도 체제가 갖는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앞선 시대의 제국을 선조로 삼으며 정립되는데, 승자들은 강력한 제도화 및 메시지 도구를 독점하므로 피지배자나 주변부 세력이 이 도식을 전복하기가 어렵다.

셋째, 이 도식은 승자가 패자들을 지배, 계몽, 전유, 회유하는 명분으로서 유용성이 크므로 강화와 전승의 연쇄적 되먹임 구조에 놓인다.

넷째, 모든 역사적 사실에는 양면성이 있는데, 양측의 진실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진실성의 원칙에는 반하지 않으므로 사실관계 오류의 지적에서 교묘히 빠져나간다.

이와 같은 복합적 이유로 그리스-로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서양이라는 두툼한 덩어리의 신화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다. 이 신화의 주인공은 건장하고 다부지며 지적인 백인 남성이다. 그들의 남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은 군사, 경제, 예술,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외부로 분출하며 주인공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모든 성별, 인종, 연령대를 함락하거나 보호의 휘하에 둔다. 백인 남성의 지배 체계를 인정하는 이들은 그 체계의 신민으로 품지만,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문란하고 중성적이며 계몽이 필요한 미개인으로 낙인을 찍는다. 역사학, 미학, 대중문화, 시장경제가 합작으로 재구성한 이미지의 체계는 이 신화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강력한 지지기반이다. 이 체계 아래 우리는 서양-백인-남성이 저 머나먼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마를 거쳐 오늘날 지구촌 전역에 이르기까지, 사방팔방에서 벌어지는 온갖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해낸다는 숱한 증거들을 목도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들의 손에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총천연색 학습 만화책을 쥐여주는 순간부터 서양-백인-남성 지배 체계로의 편입은 본격화된다.

저자 니샤 맥 스위니(Naoíse Mac Sweeney)는 플라톤으로부터 나토까지 이어지는 단일 계보학적 서양 개념의 도식이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혔다(12p). 대다수 지식인은 이러한 거대 서사가 오류투성이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확대 재생산은 멈추지 않는다. 거대 서사는 제국주의적 확장에 유용하다. 침략자는 역사적으로 부여된 권한을 누릴 수 있었고, 서양 문명의 경계에 포함되지 않은 미개인을 계몽할 권리와 책임이 있었다. 오늘날 정치권력 차원에서 노골적인 제국주의는 사그라들었지만,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의 열차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 동력을 제공하는 사상적 틀 중 하나가 역사 서술이다. 정치적이지 않은 역사 서술이란 없다. 정치적 역사 서술이란 과거의 사실에 대한 명백한 왜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강조하고 싶은 특정 맥락에 대한 취사선택과 강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거대 서사의 견고한 흐름에 아주 작은 분열이라도 가져오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방식은 특정한 인물들의 구체적 실례에 주목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단일 정체성이라는 신화를 흔드는 인물, 서양과 동양의 견고한 경계선을 흐트러뜨리는 인물, 서양의 전형성에서 빗겨선 인물을 통해 거대 서사의 오류를 지적했다.

헤로도토스(Herodotus)를 통해 당대인들이 인식한 그리스와 오늘날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그리스의 격차를 드러냈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단일 그리스 정부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그 포괄적인 범주에 속한 개별 도시 국가들은 그리스라는 통합된 경계를 인식하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과 지도자들은 아테네를 그리스의 중심 도시가 아닌, 다른 모든 도시 국가와 구별되는 천상 세력으로 인식했다. 헤로도토스는 헬레네인과 야만인이 인종적으로 뒤섞여 있음을 알았고, 각각의 민족이 창안해 낸 문명이 저마다 중요한 가치를 지님을 밝혔다. 혼종적 성장 배경을 지닌 헤로도토스는 외국인 혐오로 치닫는 아테네의 당대 인식을 경계했다.

리빌라(Julia Livilla)를 통해서는 로마 제국의 인종적 혼종성을 지적한다. 로마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구인이 아닌 트로이 전쟁의 난민들이었다. 트로이에 우뚝 선 리빌라를 기리는 비문은 로마 제국의 최상층 권력과 제국의 발원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점을 보여주면서 이 제국의 혼종성을 증언한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를 계승했다기보다 그리스를 정복하고 그 문화를 탈취했다는 데서 자긍심을 느꼈다. 로마는 인접한 모든 민족의 문화를 빨아들이며 성장했고, 그 여러 문화의 각축 속에 그리스 문화가 상대적으로 고급의 주도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뿐이다. 그리스-로마를 연결하는 선이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해 보인다면, 그 견고함에 묻혀버린 동양과 로마를 잇는 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알칸디(Abu Yusuf Ya’qub ibn Ishaq al-Kindi)를 통해서는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는 편협함을 꼬집는다. 서쪽만 본다면 로마 제국의 멸망과 독자적 왕국들의 성장을 보겠지만, 동쪽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적통을 이어받아 번성하고 있었다.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무수한 고대 문헌을 발굴해 번역하고 주석을 달며 수준 높은 학문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당나라 고분벽화에까지 전파할 정도로 대외적인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알킨디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 신학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에 따르면 기독교 유럽 세계가 고대 그리스의 적장자라는 신화는 금세 취약해진다.

사피예 술탄(Safiye Sultan)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또 다른 복잡 미묘한 관계 양상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갈등만 반복했을 것 같은 두 세계 사이에서도 전략적 제휴의 시기가 있었다. 신교도와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다다랐던 16세기 중반, 궁지에 몰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오스만의 사피예 술탄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적극적 친교에 나섰다. 당대 서구인의 시선에서 오스만을 바라보는 관점은 철천지원수, 혹은 야만인에 가까웠지만, 기독교 세계 내 교파의 갈등이 워낙 첨예했기에 오스만과 화해를 타진해야 할 상황에까지 몰린 것이다. 기독교 내 다른 교파보다 아예 다른 종교와 손을 잡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프로테스탄트 엘리자베스 1세와 사피예 술탄을 하나로 묶어 준 동질감은 그들 모두가 트로이의 후계자라는 인식이었다. 그들의 동맹은 비록 실질적인 군사적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동서를 아우르는 혼종성의 단서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계몽주의 태동기의 신화적 인물로 묘사된다. 계몽주의는 경험적 지식의 축적을 전제로 하므로 본질적으로 탐험을 부추기게 되고, 탐험으로 알게 된 사실은 사회 변혁에 소용됨과 동시에 또 다른 탐험으로 이어진다. 즉, 계몽주의와 탐험은 서로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역사 이론으로서 서양 문명의 기원은 탐험, 계몽, 제국을 연결하는 데 있다(247p).” 베이컨이 살았던 초기 계몽주의 시대는 그리스-로마를 기원으로 삼는 문화가 처음으로 공식화되고 공고해진 시점이지만, 아직 그 문화가 제국주의로까지는 발전하기 전이었다. 다만, 그의 작품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계몽주의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자양분 삼아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분기점이다.

앙골라의 은징가(Queen Nzinga of Ndongo and Matamba)는 서구인이 비서구인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서아프리카 은동고 통치자의 딸이었던 은징가는 포르투갈의 박해에 잔혹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까지 외교적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같은 기독교 세계에 속하는 은동고를 포르투갈이 함부로 점령할 수 없다는 점을 교황도 나서 지지했다. 개종 이전의 은징가는 미개한 땅에 사는 야만인 통치자였으나, 개종 이후 은징가는 서양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17세기 중반 이전, 서양을 가르는 기준은 피부색이 아니었다.

미국 독립운동 시기를 다룬 조지프 워런(Joseph Warren)과 필리스 휘틀리(Phillis Wheatley)의 에피소드는 서양 내부의 정체성이 분화하면서 모순에 봉착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미국 정착민들은 독립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로마에 주목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화해할 수 없는 세부 종파로 분열되어 정신적 구심점을 맡아 줄 수 없었기에 그리스-로마의 황금기가 새로운 북미 대륙에서 그 연속성을 이어 가리라는 발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리스-로마를 분열된 시민을 응집할 접착제로 활용했다. 혁명파는 로마식 필명을 채택했고, 심지어 토가를 두른 채 연단에 올랐다. 위대한 로마 제국의 새로운 후계자이므로 대영제국의 노예로 남을 수는 없다고 외치던 그들은 정작 새로운 영토 안의 노예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며 모순을 드러냈다. 흑인-소녀로서 극히 예외적인 성취에 도달한 필리스 휘틀리는 그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전 문학에 통달했고 당대 가장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인 소녀는 한때 혁명파를 지지하는데 복무하기도 했으나, 결국 북아메리카 내의 흑인 노예 문제에 둔감한 혁명파에 반기를 들며 지난한 이중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정치 중립적 역사 서술이란 없다. 전파성과 유동성이란 역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주류 역사 서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러한 서술이 오늘날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낭만적 시각은 역사 공부의 중요한 동인 중 하나다. 하지만 사실관계 오류나 편파적 취사선택에 입각한 공부는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 조작된 과거를 무작정 찬양하는 것은 과거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무작정 폐기 처분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만들어진 서양」은 견고하게 굳어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관념들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가를 새삼 일깨우는 좋은 사례다. 서양이라는 가상의 덩어리가 더없이 무겁게 현실을 짓누르려 할 때 이 책이 중요한 연장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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