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앙카 보스커의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Bianca Bosker, Get the Picture

우리에게는 더 많은 체험형 특파원이 필요하다.

오늘날 미술계는 지나치게 많은 말에 포위되어 있다. 하나의 작품에도 캡션, 설명문, 보도자료, 작가노트, 비평문, 오디오가이드 따위의 온갖 글이 너절하게 들러붙어 있다. 진공 상태에서 작품과 내가 온전히 교감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언어는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온다. 미술이 미메시스로부터 이탈하면서부터, 그리고 형태가 아닌 개념을 본령이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신과 소통하기 위해 성직자라는 매개자에 매달리듯, 이제 우리는 작품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소환한다. 이러한 경향에 기름을 붓는 자들은 언어의 연금술사들 가운데서도 까다롭고 난해하기로 정점에 서 있는 미학자-미술사학자-비평가 연합체다. 그들이 둘러 처 둔 울타리는 미술계를 일상적 언어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별개의 특권적 생태계로 만들어 놓았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의 저자 비앙카 보스커(Bianca Bosker)도 미술계가 밀어낸 무수한 보통 사람 중 하나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분투 가운데 그 열정을 서서히 잃어버린 그야말로 전형적인 미술 소비자다. 아름다운 것에 관심은 있다, 가끔 전시도 찾는다, 그러나 현대미술 관련 기사나 경매가를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평론도 읽어보려고 했으나 외계어로 읽힐 뿐이다, 작품 앞에서 나만 빼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분위기가 두렵다,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등… 이것이 밀려난 자들의 내면에서 한결같이 들려오는 목소리다. 대부분은 반복되는 목소리를 그저 흘려보내도 또다시 어제 같은 내일을 산다. 반면, 저자는 필기구와 녹음기를 들고 그 세계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외부자의 미술계 밀착 관찰기라면 당연히 세라 손튼(Sarah Thornton)의 「걸작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 책의 저자는 미술사 전공자이자 현대미술 저술가이긴 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 가깝게 미술계 이모저모를 관찰하고 인터뷰해 문턱이 낮고 매끈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보스커의 이번 저술이 그것과 완전히 다른 점이 있다면, 일단 저자가 미술계 문외한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관찰과 저술 외에도 실질적으로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순 관찰자가 아니다. 갤러리에서 막내 인턴을, 아트페어에서 판매사원을, 작가의 작업실에서 보조를, 현대미술관에서 경비 업무를 실제로 맡았다. 그 육화된 경험의 밀도는 당연히 단순한 관찰기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저자는 자기 이름과 육체를 미술계의 작디작은 한 귀퉁이에 직접 던졌고, 거기서 오는 온갖 위험을 묵묵히 감내했다. 밤낮없는 육체노동과 과로와 과음에 시달렸으며, 언제든 평판이 무너질 수 있음을 절감했다. 짧은 체험 기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바닥에서 부딪히며 대화를 나눈 숱한 실존 인물들을 실명 그대로 언급하면서 여과 없이 평가했다. 자기 자신은 물론, 관계 맺은 모든 인물의 평판과 향후 관계까지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 모든 위험을 정면 돌파했다. 내밀한 체험기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세계의 진면모가 있다. 일전에 내가 이영준의 관찰기에 대해서도 지적했듯, 관찰기로는 부족하다. 진짜 핵심에 파고 들어가려면 관찰기가 아닌 체험기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체험기로만 도달할 수 있는 이야기의 깊이에 관한 좋은 예시다.

똑똑하고 부지런한데, 냉소적이고 유머러스하며, 포용력과 친화력도 두루 갖춘 저자에게 미술계 체험을 맡김으로써 우리는 미국 현대미술계의 여러 속 사정에 한 걸음 깊이 다가서게 되었다. 예를 들어 뉴욕 시내의 비슷비슷한 군소 갤러리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폭넓게 더 많이 파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누군가는 상위 고객들을 상대로 좋은 평판을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후자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더라도 ‘아무개씨’들에게 당장 작품을 팔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의 발걸음이 쉽게 닿지 않는 곳에 갤러리를 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다. 그러니 작가라면 갤러리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 기쁜 마음에 냉큼 수락하기보다는 자기 작품과 갤러리 사이의 지향점 공감대를 충분히 따져보고 결정해야 한다. 또한, “갤러리에서 예술 작품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난교 파티에서 벽의 상부 몰딩을 칭찬하는 일과 비슷했다(76p).” 즉, 그런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다. 미술계는 작품 자체보다는 맥락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다. 작가의 경력이나 작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순간에도 작품 자체보다는 작가의 학력, 인종, 출신지, 성적지향성, 소장처 등이 더 많이 고려된다(물론 ‘작품 자체’의 범위도 워낙 가변적이다). 이런 소소하지만 첨예한 진실은 미술계 내부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기 어렵다. 그들은 이미 그 세계에 닳고 닳아 그러한 현실에 특별히 주목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스커와 같은 신선한 눈을 가진 ‘체험형 특파원’이 더 많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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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뉴욕) 현대미술계에서 살아남는 비법이 서서히 드러난다.

  • 돈을 지워라(58, 71p). 작품이 돈(가격)과 연결된다는 그 어떤 증거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마라.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없어 보인다. 돈 냄새를 풍기는 모든 단어는 순화하라.
  • 인터내셔널 미술 영어를 써라(59p). 미술계에는 그들만의 어휘와 용례가 있다. 그것을 해독하고 또 자기 식대로 쓸 수 있어야 그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 또 그래야 돈 냄새를 숨길 수 있다.
  • 대중성을 지양하라(62p). 대중적이라는 말은 누구나 이해하거나 가질 수 있다는 말이고, 그렇게 낮은 층위의 작품은 평단이나 컬렉터가 선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비감을 지향하라(65, 100, 254p).
  • 작가에게 대학원 졸업장은 직업적 열정의 일차적 보증서다(89p).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다만 가학적인 대학원 과정의 난이도와 비용을 버텨낼 정도로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지닌 인물임을 드러내는 표지일 뿐이다. (막대한 대학원 학자금을 갚기 위해 향후 일정 기간에 막대한 작업 동력을 발휘할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 미술계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려면 가고시안, 자본주의, 그리고 회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라(90p). 그러면 대화의 물꼬가 저절로 술술 풀리게 될 것이다. 메가 갤러리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우리나라라면 문화체육관광부나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비판으로 응용할 수도 있겠다.
  • 검색했을 때 작품보다 얼굴이 더 먼저 나오는 작가를 피하라(91p). 그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위험부담이 크다.
  •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100p). 이제 맥락은 실체이고, 가장 중요한 무언가다(106p). 맥락을 아는 것이 곧 안목이 있는 것이다(109p). 모든 것이 연결된 미술계에서 고립주의란 불가하다.
  • 익숙한 것을 생소한 것으로 바꾸거나, 생소한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꿔라(129p). 이 말은 미술계 보도자료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문구인데, 모두가 이 말을 한다는 것은 모두가 이것을 원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여기서 본질은 적정한 예측 오차를 유발해야 한다는 점이다(360p). ‘적정한’에 주목하라. 예측을 적당히 벗어나는 오차를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하다.
  •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표현하려고 노력하라(167p). 표현하지 못한 생각이나 감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현해야 연결된다. 그리고 표현해야 안목이 개발된다. 저자를 고용했던 데니 디민 갤러리(Denny Dimin Gallery)의 엘리자베스 데니(Elizabeth Denny)는 자신의 미술사 공부 과정을 회상하며, “슬라이드를 암기하는 것보다 본인이 예술 작품에서 발견한 것을 어떻게든 분명한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다(167p).”라고 했다.
  • 모든 작품은 끝없는 선택의 결과이다(122p).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 최악이다(159p).
  • 갤러리스트들이 지금 살 수 있다고 제안하는 작품을 사서는 안 된다(190p). 현재 내 역량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작품이 내가 반드시 사야 할 작품이다.
  • 순수함은 특권에서 나온다는 점을 기억하라(257p). 사심 없는 창작은 없고, 사심 없는 후원도 없다. 정말 돈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하게 창작하는 예술가나 관대한 후원자가 존재한다면, 그의 배경에는 어마어마한 특권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의 저자도 자기가 먹고 살 걱정 없이 미술계를 체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거 자신이 쓴 글 외에도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버텨준 남편과 중산층 부모님의 존재가 있었음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 미술계는 다양성을 선호하는 세계가 아님을 받아들여라(140p). 얼핏 보면 세상 온갖 괴짜들이 다 모인 세계 같지만, 그 안에도 성공 가도를 달리는 소수 주류가 있다. 특히 기저 철학의 핵심 아이디어들을 제공하는 이들, 그리고 미술관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은 여전히 백인 남성들이다. 또 세분화된 분파 집단별로 유행하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다. 저자의 첫 번째 고용주였던 잭 배럿(Jack Barrett)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옷 입는 스타일을 마음에 안 들어 했고, 저자는 그와 같은 은근한 압력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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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침들의 대부분은 갤러리에서 일하는 동안 주워들은 것이다. 그 세계는 작품을 돈으로 환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돈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기묘한 세계다. 거기서 배운 교훈들은 예술가의 상업적 성공, 혹은 그보다 완곡한 표현인 사회적 성공을 위한 지침에 가깝다. 저자가 진짜 공감한 미술계는 그곳이 아니었다.

갤러리 두 곳에서 경력을 쌓은 후, 저자는 엉덩이 인플루언서 겸 퍼포먼서 어맨다 올피어리(Amanda Alfieri)의 엉덩이에 깔아뭉개지며, 또 줄리 커티스(Julie Curtiss)의 보조로 일하면서 예술 개념의 다양성과 감상의 주관성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숙고할 수 있었다. 이윽고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비로 일하며 자기만의 시선으로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인생에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를 깨닫는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계가 정해 놓은 정답에 연연하지 말고 천천히 자기만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최종적 결론에 다다른다.

미술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해 봤고, 또 자기만의 미감에 다다르기 위해 부단한 물 갈퀴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자의 최종 결론이 뻔하다고 느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저자는 직접 몸을 던져 저 진리에 도달했으므로 그 깨우침이 골수에 각인되어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에겐 육화된 체험이 없으므로 이 독서를 통해 1/100이라도 간접 체험을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몸소 느끼고 싶다면, 말 그대로 몸을 던져야 한다. 몸을 던지지 못한 자는 그렇게 한 자들에게 그저 침묵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보낼 뿐.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할까? 이 책의 초반부부터 끝장을 덮을 때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저자가 잭 배럿에게 소송을 당하지 않았을까, 아직 당하지 않았다면 소송 공화국인 미국에서 어떻게 이 정도로 솔직하게 누군가에 대한 자기 인상을 있는 그대로 노출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도 일기장이 아닌 대중서에! 잭은 미술계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저자를 갤러리의 말단 인턴으로 채용했다. 당장 하루하루 임대료 내기도 버거운 갤러리였지만 대놓고 녹음기와 펜을 들이대는 첩자를 안식구로 들인 것이다. 아마 저널리스트를 옆에 두고 언론이나 출판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로 삼으려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잭은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거의 인신공격에 가깝게 날이 선 태도로 저자를 대했다. 저자는 펜대의 권력을 활용해 잭의 이중성, 공격성, 속물적인 모습, 심지어 자기 뒷담화를 하고 돌아다니는 치졸한 모습 등을 오롯이 묘사했다. 너무 솔직해서 처음에는 잭과 그의 갤러리가 책 속의 가상 설정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검색해 보니 인물과 갤러리 모두 버젓이 실존했으며, 지금도 성업 중이다. 쉽게 말해, 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면, 이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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