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 展 (호암미술관)

에버랜드를 지나 굽이굽이 고갯길을 통과하면 호젓한 삼만육천지를 내려다보는 기와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삼엄한 경비를 통과해 미술관 앞마당에 서서 빙 둘러보면 할미산 능선을 병풍으로 두른 풍경이 천연 요새나 다름없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된다면 여기를 1차 저지선으로 구축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씨 가문이 왜 여기를 명당으로 콕 찍어 애지중지했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전시의 장소성이 작품의 에너지를 찍어 누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커리어 전체에 걸쳐 친족 및 젠더 권력에 과감하게 도전했던 20세기의 대표적 아방가르드가 이렇게 새 소리와 바람 소리로만 가득한 미학적 사원에 고요히 안치되어 있다. 마치 일찌감치 남편을 떠나보낸 90세 할머니가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고 캘리포니아를 누볐던 철부지 시절을 회상하는 것 같다. 미술관을 둘러싼 강박적 조경의 희원(熙園)과 군데군데 우뚝 선 벅수들도 억압적 분위기에 일조하며 탕아의 회심을 반긴다. 그 누구도 정해진 동선을 벗어나 잔디를 밟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우리는 개인정보 수집에 동의한 후 시간대별 예약 과정을 거쳐 입장했고, 여기는 서슬 퍼런 이씨 왕조 제국령의 일부이다. 강박적 조경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화재들과 살인적인 카페 물가를 보며 여기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문득문득 상기한다(가격과 달리, 커피 맛은 충격적일 정도로 형편없다).

평생에 걸쳐 다양한 매체를 어루만졌고, 그 결과물은 작업실에 굴러다니는 너절한 메모지 한 장에서부터 약 10미터 높이의 위압적인 거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그지없지만, 결국 평생의 주제 의식은 큰 틀에서 몇 가지 지점으로 수렴한다. 권위적 아버지로부터 배신감과 해방의 몸부림, 유일한 기댈 언덕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애증, 섹슈얼리티의 주체로서 자아상의 재발견 등이 그것이다(물론 작가 본인은 이런 거친 단순화를 거부하겠지만). 놀라운 것은 이토록 자기 치유의 몸부림에 가까운 전기적 작품에 생애 전체를 바쳐가며 매진할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어쭙잖은 상처에 며칠 앓아누웠다가 현실의 수레바퀴에 치여 다시금 퍼뜩 일어나 전철에 몸을 싣는 우리로서는 1940년대부터 세상을 뜨기까지 70여 년간 일관되게 마음속 심연을 탐험하고, 흉터를 어루만지고, 억압을 표출하도록 북돋우는 동력이 무엇인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면의 탐험과 자기 치유적 작업은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매듭짓지 못한 영원한 숙제였던 것일까? 하나의 숙제가 완료되면 또 다른 숙제가 주어지는 연쇄적 순환 과정이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다분히 불경스러운 발상이지만, 모든 숙제가 내면에서는 진작에 종결되었음에도 그것이 작가가 떠올릴 수 있으며 세상이 기대하는 유일한 주제였으므로 어떻게든 내외적 기대에 부응하며 작업을 이어갔던 것일까? 물론 이 마지막 추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술계에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룬 당대 대가 중의 대가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천 쪼가리와 실을 놓치지 않은 이유를 사회적 기대치에 대한 부응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누구 못지않게 가시밭길 같은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 왔노라며 자기연민에 빠져 술잔을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부르주아의 작품을 보며 ‘고작 그 정도의 사연과 상처에 기대 70년간이나 비슷한 주제로 이렇게나 많은 작품을 풀어내 왔다고?’라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나’와 ‘너’의 상처 중 무엇이 더 아픈지 비교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아픔의 크기를 저울에 올려 측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픔의 크기는 상호주관적이고, 면역력과 항체도 저마다 다르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 부르주아가 달랐던 점이 있다면, 작가는 표현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탐험했고, 표현했다. 그것을 일관되게 지속한 끝에 어떤 혁신적인 형태와 물성에 도달했고, 거기서 공감과 소통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 반응이 치유의 선순환 고리를 형성해 새로운 작업을 위한 길을 열었다. 그렇게 70년을 이어갔다. 그뿐이다.

전시는 로비 천장에 매달린 알루미늄 <커플>의 표면만큼이나 매끈하다. 110점의 다양한 작품을 특별한 주제나 유형으로 세분화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배치했다. 이씨 가문 소유의 컬렉션도 대거 출품되어 전체 작품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덕지덕지 설명문을 붙여 놓는 대신 작가가 노트에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메모를 번역해 붙여 놓음으로써 중재자 없이 작가의 내면으로 초대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 떨군 애착인형이 사탄의 저주를 받고 흑화한 듯한 패브릭 작품들은 일견 조악하게 얼기설기 꿰매어 놓은 형상이지만, 그 작업 과정의 육화된 수행성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이 작품들을 담고 있는 캐비닛의 견고한 짜임새가 작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며, 그 의미를 숙고하게끔 유도하는 측면이 있어 디스플레이의 시각적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일깨운다. 비슷한 인형이라고 하더라도 어디에 들어가 앉아 있느냐에 따라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진귀한 보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중세 유럽의 광장에 본보기로 전시된 호색한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시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꿈틀거리는 <마망>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여느 광장에서 이보다 더 큰 녀석도 볼 수 있지만, 이렇게 실내 공간 안에 욱여넣어진 형상을 마주하면서 행여 깰세라 조심스럽게 그 옆을 지나치는 것은 생경하고 이채로운 감각이다. 거대 거미의 관절 마디마디가 꿈틀대며 탈주를 꿈꾸는듯하다. 이 전시의 가장 큰 역설은 이 대목에서 온다. 이 정도 전시는 오직 여기, 아니면 극히 일부 국공립 기관에서만 열 수 있지만, 그 소수의 장소는 하나같이 너무 고요하고 정제되어 있다. 분출하는 작품의 에너지를 가볍게 찍어 누른다. 그래서 ‘이것’이 ‘여기’ 있는 것을 반갑게 마주하는 순간, 동시에 ‘이것’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여기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것도 안다. 미술관 앞 정원을 유유자적하는 공작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야생성이 거세된 우아한 발걸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은 물론 즐겁지만, 동시에 이들이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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