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줄리앙의 「불가능한 누드」

François Jullien, Le Nu Impossible

‘가능-불가능’의 이분법을 넘어,

누드는 서양미술사의 가장 독창적 발명품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누드는 회화 및 조각 표현의 본령에 있었고, 취미 판단의 가장 본원적인 준거를 형성했다. 누드를 잘 표현하는 것이 인간을 잘 아는 것이었고, 인간을 잘 안다는 것은 다시 그 인간의 창조자이자 이데아인 신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누드는 인간을 매개로 신을 이해하는 통로였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1508-1512)>에서 벌거벗은 아담이 뻗은 가녀린 손가락은 끝내 신에게 닿지 않는데, 이는 본질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욕망과 진리의 문턱에서 늘상 거부되고 마는 무력감을 적확히 표상한다. 그러한 신격화된 대의명분 아래 누드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특권적 이미지로 군림했다. 누구나 벌거벗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누드를 그릴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는 선별된 남성 화가들에게만 누드를 보고, 그리고, 감상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렇게 완성된 누드는 선별된 남성 권력자만이 은밀한 공간에 소유할 수 있었다. 공식적 미술 제도에서 여성 예술가들에게까지 누드가 허용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까지 기다려야 했다.

반면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어온 중국에서 시각 예술의 주제로서 누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거나, 다뤄지더라도 고급 예술의 주제가 아닌, 숨어서 몰래 보는 춘화로서만 소비되었다. 극히 예외적인 누드의 사례들도 서양 미술에서 누드에 비하면 지극히 주변적이고 조악한 수준에 머물렀다. 서양과 동양의 어떠한 차이가 누드의 생산 및 수용에 있어서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이런 질문은 미술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누구나 한 번쯤 품었음 직하나, 실제 이 주제만 놓고 다양한 문헌과 자기 견해를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리스 철학 전공자이자 중국학자인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적임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동서양의 방대한 미술론을 뒤져가며 차이의 발생 원인과 구체적 현상의 실례들을 풀어냈고, 오랜 기간 숙고를 통해 성숙시켜 온 자기만의 독특한 해석을 덧붙여 느슨한 이론적 에세이로 다듬어냈다.

저자가 중국 문화와 철학을 사랑하며, 문화적 상대성을 존중하는 이론가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비교문화 연구자로서 자신이 뿌리를 내린 토대에 입각해 다른 어딘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난다. 제목에서부터, 왜 ‘불가능한 누드’인가? ‘가능-불가능’의 이분법은 ‘가능’을 정상 상태로, ‘불가능’을 비정상 상태로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명명의 체계 아래에 누드를 위치시킨다면, 누드는 인류 전체의 시각 예술 네트워크 안에서 응당 존재해야 할 무언가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부재한 문화권은 응당 해내야 하는 과업을 해내지 못한 공동체가 된다. 이러한 어감상의 전제 아래, 중국은 누드를 실현하지 못한 일종의 열등 문화권이 되며, 서양과 비교하여 무엇이 결핍되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저자의 논지에서 서양의 ‘누드 있음’보다 중국의 ‘누드 없음’이 문제시된다는 점은 여러 문맥을 통해 암시된다. “무엇이 중국에서 누드의 전개를 억제했는가? 어떤 다른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누드를 덮어버리고 가로막아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32p)”라고 명시한 서두의 연구 문제 자체가 이후 이어질 모든 논의에서 ‘누드 있음’을 정상 상태로 규정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어서 본론에서 동서양의 여러 문헌과 작품 실례를 고찰한 끝에 후반부 결론에 이르러 저자는 그간 학자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애써 감춰왔던 자의식을 일거에 내던지며 누드 예찬론으로 급격히 선회하기 시작한다. “옷을 입은 사람을 그릴 때 우리는 그 인간을 그의 개성 속에서 파악되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누드의 신체를 그릴 때 우리는 하나의 본질을 파악하기를 원한다(207p).”라며 누드가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최상의 방법론이라는 진부한 대의명분을 다시금 새삼스레 꺼내 든다. 이 명분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세월 동안 숱한 미녀들의 옷을 벗겨 비너스나 오달리스크로 분해 화가 앞에 세우는 데 있어서 거의 만능열쇠처럼 활용되었던 무기였다.

저자는 중국에서는 그러한 인간 본질에의 탐구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국은 그 본질의 일관된 차원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돋보이게 하거나 촉진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중국의 상상력은 이러한 본질들의 육화에 대해 관심이 없었(208p)”다고 말한다. 반대로 서양은 누드를 통해 인간 본질의 탐구에 성공했기에 거기서 “누드는 미가 형상을 객관화시키는 힘을 통해 승리를 거두는 하나의 공간을 열어준다(210p).” 누드 하나 시도했을 뿐인데 거기서 오는 효과가 참으로 어마무시하다.

당연히 뭐라도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는 가능성의 실천 및 구체화 측면에서 더 우세하기에, ‘있음’을 ‘없음’에 대비하여 정상 상태로 보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 논점에서라면 중국의 ‘누드 없음’을 가능성이 박탈된 상태로 간주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인간이 배제된 산수가 중심 주제로 다뤄졌고, 아무런 칠이 없는 여백을 적극적인 구성 원리로서 전면에 드러냈고, 서예를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이 아닌 미적 시각 예술 장르로 발전시켰고, 은자나 노년 같은 무위의 인물상을 긍정성의 기호로 제시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중국 및 동아시아 미술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적 ‘있음’의 몇몇 양상들은 서양 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그러한 ‘없음’을 가능성의 박탈로 본다면 동서양은 각자 영역에서 비슷한 수의 가능성 양태들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즉, 누드라는 주제 안에서 중국이 접근하지 못한 가능성의 지평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여백이나 서예라는 요소에 주목한다면 서양이 접근하지 못한 가능성의 지평 또한 분명 존재하지 않겠는가? 서양에 뿌리를 둔 비교문화 학자인 저자가 누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결핍의 중국을 바라봤다면, 이제는 동양에 뿌리를 둔 비교문화 학자가 서예나 여백을 중심으로 결핍의 서양을 바라보아야 인류 지식 생태계의 기계적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여기서 한방, 그러니 저기서도 또 한방’이라는 식으로, 어찌 보면 단순무식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논법이겠지만, 비교문화 관점에서 동서 양측의 고르고 활달한 지적 담론을 활성화하자면 이보다 나은 대안은 없어 보인다.

서양철학 전공자가 동양 화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양새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 비판적으로 적어 보았지만, 사실 ‘왜 누드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이 이토록 다른가?’라는 논점에만 집중해 보면 이 책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들로 채워진 것만은 분명하다. 서양은 의복의 특수성을 걷어낸 누드를 통해 인간의 추상화된 보편적 본질을 묻고자 하지만, 중국에서 인물은 복식을 통해 그 계급, 철학, 습성을 드러내며, 그것이 배제된다면 오히려 인물에 대해 논할 단서를 잃게 된다(53p). 우리의 관습적 사고는 누드를 자연 상태의 원형으로 보는 관점을 키워 왔지만, 실상 태고 이래 문명기의 인간은 옷을 입는 것이 기본형에 가깝고, 누드는 오히려 인간을 특권적 위치에 놓아 자연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54p).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드러내고자 하는 중국의 화론에서 누드를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다. 또한, 중국에서는 해부학보다 혈 자리를 중심으로 기의 순환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데, 맨몸보다는 그것을 덮고 있는 옷의 주름이 기의 순환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준다(65p).

서양철학의 근간은 이원론적 형이상학이다. 이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실체는 그 이면에 근본이 되는 이상적 원형을 암시하거나 재현하고 있다고 보는데, 누드는 그러한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연구로 이해된다. 하지만 중국은 모든 형상이 기의 순환 과정을 드러낸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이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물체가 변화하거나 합일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75p). 견고해 보이는 바위조차 이러한 기의 순환 과정에 있는 찰나의 실체일 수 있다(83p). 그러니 누드를 통해 비가시적 세계의 원형을 찾으려는 노력에 힘을 쏟을 이유가 없다.

서양 누드에서 중요한 것은 경계를 이루는 형상이다. 누드는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지며, 모든 형상을 제치고 중심을 차지한다. 그 견고한 윤곽선을 통해 찰나의 순간이 고정되고, 이 고정된 형상이 인간 본질에 대한 숙고를 이끈다. 중국에서는 질료로 고정된 그림이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변화하는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함을 잊지 않는다. 개체는 움직이고, 여러 형상은 언제든 뒤섞일 준비가 되어 있다(91p). 과정의 유동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고정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누드란 기본적으로 고정된 포즈를 강요하는데, 그렇게 하면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96p),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상정하게 된다(99p). 이는 중국의 화론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관점이다.

중국에서 실물과 똑같은 묘사보다 중요한 개념은 공명이다. 그림을 통해 그리는 자와 보는 자, 그려진 대상들, 인간과 자연 등이 서로 기운이 순환하는 가운데 공존해야 한다(115p). 이때 현실을 넘어선 이데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123p).

서양은 기하학적 수치로 측량할 수 있는 미를 추구한다. 따라서 해부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옷으로 덮으면 정확한 측정이 곤란해진다(131p). 그러나 중국은 기의 순환과 조화를 중요시하므로 변화 과정과 조화에 주목하게 되고, 이 모든 과정은 시간의 흐름에 맡겨져 종식되지 않으므로 특정한 시점에 측정할 수도 없다(137p). 따라서 중국의 문인화는 ‘그리다’라는 표현 대신 ‘쓰다’라는 시적인 표현을 쓴다. 쓴다는 것은 그려진 대상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고(145p), 확장과 변화의 여지를 인정하는 태도이다(151p).

서양의 시각 예술은 상징을 중요시한다. 그려진 실체 A’는 그것의 본질인 A를 상징하는 일종의 알레고리가 된다. 반면, 중국은 표지를 중요시한다. 표지는 그려진 실체가 어떤 본질을 대리하는 것이 아닌, 더 넓고 큰 세상에 대한 작은 단서로서만 기능하는 것이다(164p). 표지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실재와 똑같이 모든 시각적 요소를 재현할 필요가 없고, 오직 전체를 드러내는 아주 작고 핵심적인 단서를 정확히 짚어내기만 하면 된다. 얼굴 전체를 똑같이 그린다면 얼굴이 변화할 때 그 그림이 진실과 멀어지게 되지만, 성격이나 인품을 정확히 드러내는 수염 세 가닥을 정확히 그려낸다면, 아주 적은 노력만으로도 본질을 짚어낼 수 있으므로 뛰어난 표현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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