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방법론’ 입문서들에 대한 소론

‘미술을 알고 싶은 욕망’은 ‘미술에 대해 아는 척 하고 싶은 욕망’과 맞닿아 있다. 곰브리치 선생님은 이처럼 파편적인 지식들로 미술에 대하여 아는 척하면서 정작 아름다움의 정수로 들어가지 못하는 태도에 대하여 경계한 바 있지만, 만약 이 세상에 나만 항체를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아서 모든 사람이 죽고 나만 살아 남아 있다면 나는 미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동체 속의 현존재로서 결연히 아는 척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풍부하고 신빙성 있는 아는 척을 위한 제반 이론들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껴서 관련 도서를 찾게 되었다. 시중에 미술사 방법론 관련 전문 도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엄밀하게 제목이 ‘미술사 방법론’인 책이 세 권이 있어서 각각 읽어 보았다.

공통적으로 이들 도서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쓰여졌던 많은 원문이 저자들이 글을 쓰기 이전에 이미 영어로 번역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결과물일 것이다. 번역의 과정에서 당연히 의미는 미미하게 뭉개졌을 것이다. 미술사 방법론 중 하나로 거론되는 구조주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세 도서는 관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이 세계를 다루는 책들이 늘 그렇듯, 원어민들도 그 내용을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다. 그 텍스트를 두 번에 걸쳐 번역했는데, 심지어 개별 이론에 대하여 깊게 들어가는 것이 제한되는 개론서(입문서)이다. 그러니 이들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이해의 폭은 단편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책으로 미술사 방법론에 대하여 통달한척 할 생각 말고, 제시되고 있는 참고문헌들을 열심히 찾아서 읽어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번역된 책을 연속으로 오래 읽다보면 나의 문체도 번역체로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쨋든 ‘미술사 방법론’이라는 제목의 세 권의 책은 다음과 같다.

1. 마이클 해트, 샬럿 클롱크 공저 – 미술사 방법론: 헤겔에서 포스트식민주의까지 미술사의 다양한 시각들(yes24 링크)

이 책은 장점이 많다.

우선 연대기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의 통시적 이해의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문체가 유려한 편이고, 최대한 쉬운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여러 사상가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자주 설명해 주면서 이원적 사고에 친숙한 초보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간다.

각 이론별로 비판적 평가를 달아 놓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만하다. 단순히 이론 설명에서 그친다면 그 이론을 실질적인 글쓰기나 사유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놓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

‘미술사 방법론’이라는 글자를 ‘미술/사/방법/론’으로 쪼개본다면, 저자는 ‘사’에 상당부분 초점을 맞추고 이론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이는 다른 책들과 다른 시각이기 때문에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미술사 방법론은 결국 ‘미술사’라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제반 이론 및 접근법이라는 측면에서 ‘사’가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책들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간과되어 있거나 매우 부족하다.

우리가 미술사 방법론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단순히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이런 저런 미학자와 사상가를 거들먹거리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역사의 변화와 진보/쇠퇴를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함이 클 것이다. 미술이 정말 변화한게 맞다면, 왜, 어떻게,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지 답을 얻고 싶은데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서가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각각의 이론들이 미술사 속에서의 변화 과정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잘 설명해준다.

추가적으로, 참고문헌에 단순히 제목만 적어 놓지 않고, 어떤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있는지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려는 개론서, 혹은 입문서로서 본연의 길라잡이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앤 댈리바 저 – 미술사 방법론과 이론(yes24 링크)

이 책은 다른 책들이 ‘방법론(Methods)’만 제목에 채택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론(Theories)’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제목은 일반적인 미술사 방법론 책들과 달리, 보다 고차원적이고, 어쩌면 주변 요소일 수도 있는 관념적인 세계에 대하여 기술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책은 상대적으로 미술 자체에 대한 설명 보다 미술을 둘러싼 보다 관념적인 이론들에 상당수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계속 읽다 보면, 불연듯 ‘그래서 이게 미술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다가 챕터 끝에 가서는 미술에 적용하기 위한 학술적인 측면의 질문들을 제기한다. 어떤 질문에는 간략한 답도 내포되어 있지만, 대체로는 단순한 질문들로서 독자로 하여금 자발적인 사유의 훈련을 거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구성은 이론을 토대로 미술을 바라보는 실전적인 훈련의 예시를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도 미술에 대한 논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불일치를 야기한다.

전반적으로 정신과 철학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어짐에 따라 진도를 나가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도판도 많지 않은데다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 작품들 위주로 소개하고 이론을 적용하기 때문에 미술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지겨울때마다 한번씩 도판으로 리프레쉬하는 기존의 습관은 적용되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학을 강의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영향이 책 전반에 걸쳐서 느껴진다. 단순히 페미니즘과 젠더에 대하여 논하는 쳅터가 아니더라도, 문맥 구석구석에서 젠더 이슈에 대한 저자의 지대한 관심과 높은 지식 수준이 드러난다. 이처럼 특정 관점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것 자체는 책이 저자의 지적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비판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론서의 미덕이 모든 이론에 대하여 동등한 무게로 보여줘야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부감이들 가능성도 있다.

이 책의 최대 미덕은 챕터 마지막에 이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논문을 쓸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첨삭과 지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서가 이론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글쓰기에의 적용까지 나가갈 수 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이다.

3. 로리 슈나이더 애덤스 저 – 미술사방법론(개정판)(yes24 링크)

이 책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 출간된 미술사 방법론인 것 같다. 과연 이 분야를 처음 접하는데 있어서 가장 무난한 책인 것 같다.

책은 어디로 모난데 없이 균형잡힌 시각을 바탕으로 개별 이론들에 대하여 최대한 충실하게 설명한다. 컬러 도판도 포함하고 있어서 초심자들의 이해를 돕는데 유용하다.

무난하다는 점은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다. 개별 이론들에 대하여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거기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기에는 얕은 수준의 서술에 그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보다 최신의 급진적인 관점들에 대한 서술은 약한 편이다.

티치아노의 명화를 다양한 이론을 통해 읽어내는 예시를 제시한 점은 이 책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하나의 그림을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사례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이론을 채택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결언

보다 고차원적인 이론, 이론가, 용어들을 알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였는데,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철학, 미학, 미술, 역사 등 이 모든 관념의 세계가 물리학의 세계와 달리 명쾌한 답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며, 그게 또 매력인 것 같다.

A는 절대적이면서 단일한 원칙을 강조한다. B는 A가 상대성과 다양성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C는 절대성과 상대성의 패러다임 자체를 뛰어넘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D는 다 필요없고, 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한다. 이런 끝도 없는 논쟁이 반복되는 것이 사상사의 요체가 아닌가 한다.

사실 미술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데, 헤겔이 무슨 소용이고, 시뮬라크르가 웬말인가. 예전의 미술과 지금의 미술이 다르게 보이는데, 왜 달라진 원인을 굳이 설명하겠다고 치고 받고 해야 하는가.

미술에 관하여 공부하는 것이 미술의 감동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단순히 미술가와 시대적 배경을 더 많이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인지, 미술에 대하여 신념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 방향을 알기 위해서 더 읽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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