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 – Visions of Reality, 2013)

우리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보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궁금해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미지를 보면서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 한다.

– 마크 스트랜드, 「빈방의 빛」 중에서 인용하여 멋대로 수정함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은 이 인물과 풍경이 어떤 드라마 속에 있는지를 계속 묻게 만든다. 에드워드 호퍼의 세계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 위대했던, 미국 주도의 ‘추상의 시대’에서, 재현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화가의 전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의 윤곽선은 뚜렷하고, 색체는 분명하며, 분명 어떤 잡지나 화보에서 보았음직한 우리 (아니, 미국인)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에 천착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인물들은 교류하지 않고, 무신경하며, 빛은 하나의 물질로서 공간을 점유한다. 빛의 존재감은 인물을 압도한다. 공간 속 기하학과 색채의 조화는 얼핏보면 ‘보면서 묘사한’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내 ‘보고나서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지만 그 곳에는 분명 집을 왕래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서있고, 문의 손잡이는 보이지 않지만 그 문을 여닫아야만 그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신경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세계를 이야기하는 호퍼의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장면 앞뒤의 이야기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를 유도한다. 이러한 사유는 인과관계에 대하여 무의식중에 탐문하는 인간 정신의 본능에 의거한 것이며, 이러한 본능은 필경 어떤 장면으로부터 회피와 접근을 선택하는 찰나의 순간이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좌우했던 인류의 태고적부터 DNA 속 깊숙한 곳에 내재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본능에 의거하여 이야기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우리 등 뒤, 갤러리 모퉁이에서 호퍼는 팔짱을 끼고 우리를 바라보며 조소를 보낼 것만 같다. 너희들의 그 예상은 틀렸다고, 내 그림에 그런 거창한 스토리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우리의 본능에서 기인한 영화이다. 아마 감독도 호퍼의 그림에 빠져서 그 장면 속 이야기를 연상하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를 빌렸을 것이다. 마치 아바의 노래를 엮어서 뮤지컬 맘마미아를 만든 것처럼, 영화는 호퍼의 그림 13개를 엮어서 서사를 만든다. 약 30년의 시간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시대의 변화 속에 내맡겨진 한 여성의 감정흐름을 묵묵하게 고찰한다. 하지만 뮤지컬 맘마미아가 유치하지만 알찬 서사 속에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적재적소에 아바의 노래를 배치하고 있는 반면, 이 영화에서 호퍼의 그림들은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서사를 위해 존재하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위해 짜맞춘 서사, 내지는 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서사 보다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린다. 이 영화는 기승전결의 이야기는 거의 관심이 없고, 시대의 변화와 주변 인물들의 행위에 따른 주인공의 감정 흐름에 천착한다. 특히 영화를 보고 나면 한 편의 연극, 엄밀히는 1인극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는 여성의 작중 설정이 연극 배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한다거나, 독백을 하는 장면은 노골적인 연극적 연출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사를 이루고 있는 주인공의 나래이션은 주인공이 속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지만 연극의 독백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느껴지는 까닭은 호퍼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림이 단독으로 존재할 때, 연극의 무대 같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그 안에 실재 인물(배우)가 놓여 있으니 이 보다 연극 무대 같은 그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두운 공연장 안에서 얼핏보면 효과적인 눈 속임 효과를 일으키지만, 실제로 다가가서 만져보면 원근법은 고정되어 있고, 딱딱한 나무 패널위에 그려진 아크릴화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그림 말이다.

호퍼의 그림을 영화의 프레임으로 활용해서 어떤 일관된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 안에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전달하려고 했던 감독의 의도는 매우 칭찬할 만하다. 그리고 그 결과물도 시각예술적 완성도 측면, 포스트모더니즘적 패스티시(pastiche) 측면 등에서 높은 가치를 달성하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화가의 작품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나라인 오스트리아 감독이 영화로 재창조했다니 이미 뭔가 멋지지 않은가. (그런데 그 나라에는 영화화할 화가가 지천인데!! 아, 대부분은 이미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정도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쉽다.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호퍼의 캔버스로 고정시킨 프레임만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을 깼다면, 그래서 보다 일상적인 장면과 극적인 서사 속에 문득문득 호퍼의 그림이 등장했다면 더 멋진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이렇게 공들인 영화가 이미 나왔기에, 앞으로 최소 50년 간은 호퍼의 그림을 영화로 창조하려는 감독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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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읽으면 좋은 칼럼: 링크

그 문화권이 아니면 모르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각종 사회적 맥락에 대한 정보와 호퍼 그림에 관한 뒷 이야기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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