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현격한 생산수단의 혁신을 이룬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다.
벌은 깨어있는 모든 순간 동안 일한다. 먹기 위해, 살기 위해.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다수의 인간은 기술혁신에 힘입어 삶의 전부를 생산에 매몰시키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유희적, 쾌락적, 영적 행위에 귀중한 열량과 시간을 소모하고도 그럭저럭 먹고 산다.
지난 주 KBS 인간극장에서 양봉인들이 나왔다.
철원군 DMZ 부근 청정지역에서 맑은 꿀을 채취하는 사람들이다.
제 아무리 HD 카메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라 한들, 1센티미터 남짓한 벌들의 표정 따위 보일리만무하다.
하지만 내게는 어쩐지 망연자실한 그 녀석들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온갖 잡식성 조류를 피해, 무지막지한 인간과 기계문명을 피해,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달콤한 꿀의 왕국은 한 순간에 원심분리기로 투입되어 버렸다.
인간과 동일한 식성의 한 꼭지를 공유한다는 태생적 특성이 그들을 꿀 따는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자연 그대로의 색감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색감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자연이 주는 청초한 천연의 느낌, 은은한 색조의 스펙트럼을 모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자라를 보았다.
아마 알을 낳을 장소로 염두하고 구덩이를 판 모양이었다.
허나 그 자리는 양지 바르고 호수와 가까운 좋은 산란터일지는 몰라도, 인도와 2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척박한 도시의 인공호수에서 살아가는 녀석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신기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깊은 구덩이만을 남기고 다시 호수로 사라져야만 했다.
더 좋은 터, 안락한 터를 발견했기 바랄 뿐이다.
왜가리의 일종으로 보이는 녀석은 마치 태양의 기운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듯, 저 자세로 꽤 오랫동안 깃털을 말리고 있었다.
비장한 자세는 검은 깃털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흑마법사와 같은 기운을 풍긴다.
정적인 오리 부부(혹은 친구)의 뒷모습에서 엇갈린 시선을 발견했다.
엇갈린 시선은 많은 사유를 던진다.
사르트르는 나를 ‘바라보는’ 자를 타자로 규정하였다.
타자의 시선은 나의 객관적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나 중심으로 구축하는데서 오는 충만했던 기쁨의 파괴자이다.
라캉은 주체의 일관된 시선을 부정한다.
부르넬레스키의 단일 시점이 만들어냈던 위대한 원근법의 신화는 종결됐다.
나의 시선이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나를 보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한 시선에서 타자의 욕망이 빚어내는 응시로의 이행이다.
이 두 오리는 타자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를 바라본 것일까? 타자의 욕망, 혹은 오리 세계의 문화에 의하여 서로를 응시한 것일까?
이러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문과 별도로, 단일한 공간 속에서 엇갈린 시선은 관계의 드라마를 형성한다.
고독한 주체들이 제한된 공간속에서 빚어내는 관계의 긴장감을 가장 또렷하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었다.
이 정적인 오리들은 나에게 호퍼의 군상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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