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참으로 잔인한 면이 있다.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봉착한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것을 힘들어 하면서도 내심 즐긴다.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극한상황에 대한 대리체험 욕구라고 하기에는 좀 더 고약하다. 아마 이 고통을 겪는 것이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주는 희열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재인식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을 다룬 영화나 소설에서 기대하는 장면도 그런 것이다. 구태여 피가 용솟음치고 살과 뼈가 분리되는 장면들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 그 욕구의 저변에는 우리의 실존적 삶 속에 스펙터클이 결여되어 있어서, 우리가 동물적 본성을 거의 거세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2014년에 맨부커상을 받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전쟁, 그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전쟁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다는 미명 하에 선정적인 고통의 미학을 즐기려하지는 않는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상황이 고통스럽고 처참할수록 오히려 더욱 결벽적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비극을 통해 독자의 감정을 격양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듯 하다. 그래서 ‘인물들의 고통을 이렇게 건조하게 읽고 지나가도 되는 것일까?’ 라는 일종의 죄의식마저 갖게 된다. 이는 비극으로의 공감을 강요했던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사학도 출신으로서 자국의 역사적 비극을 풀어내고 있는 저자는 한 때 불붙었다 사그러들 감정적 동조 보다는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견고한 진실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인용한 숱한 동서양의 고전들처럼,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역사적 순간을 새로운 고전으로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무모한 공사를 벌이고 있던 일본 철로부대와 그들에게 착취 당했던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부대의 정신적 리더인 의무장교 도리고 에번스는 무난하고 안정된 삶을 갈망하는 현실주의자지만, 부하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기대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부응하여 자기 그릇에는 다소 과분한 영웅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부하들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하는, 마지막 보루로서의 무게감을 힘겹게 견뎌내는 리더의 내면이 생동감있게 그려졌다.
도리고 에번스의 연애 이야기가 소설에서 매우 큰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은 예상 밖이었다. ‘사랑과 전쟁’, 그것은 영원한 테마이긴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식상해졌다고 생각했는데 2014 맨부커상 위원회의 생각은 조금 다른가보다. 도리고에게 쌩뚱맞게 운명적인 사랑이 등장한 초반에는 조금 당황했으나 소설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사랑이 친인척 관계로 맺어진 막장 치정극으로 발전했을때는 황당했다. 나아가 후반부에 ‘출생의 비밀’과 ‘엇갈린 사랑’ 모티브까지 등장했을때는 이게 진정한 호주판 막장드라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막장의 내러티브가 간결하고 유려한 심리묘사를 통해 정갈하게 포장되었기에 망정이지, 우연에 우연이 자꾸 반복되다보니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했다.
시를 매개로 대화를 나누는 필부필부의 모습, 자꾸 고전에 연연하는 주인공의 모습도 의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중반이 아직 고전의 향수와 낭만이 순결하게 남아있던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일상적인 삶의 순간 속에서 고전과 시를 통해 서로 공감하고 심리를 암시하려드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대학교 연극동아리의 셰익스피어 초연처럼 현실감이 떨어져 보였다. 특히 도끼 핸드릭스를 화장하면서 의연하게 키플링의 시를 읊조리는 도리고의 모습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오글거린다’는 말이 횡행하는 시대는 낭만을 잃어버린 시대라는 누군가의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은 하지만, 그래도 ‘과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격언이 더 무게감있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책장을 다 덮고 나니, ‘호주문학의 재발견’ 따위의 낭만적인 수식어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이토록 호평을 받을만한 작품인지 진정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작품의 담담한 분위기, 미려한 심리묘사, 시와 고전을 이용한 고품격의 암시의 기술들을 온전히 이해할 정도로 지성과 감수성이 빼어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도 이제는 진부한 감이 있고, 인물들의 뒷 이야기를 다루는 구성은 산만하며, 우연이 겹치는 상황들은 몰입을 방해한다.
사실 내 내면 깊은 곳에서 이 책을 밀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남기고자하는 암묵적인 메시지에 있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일제의 잔혹사 속에서 간과되었던 우리, 오스트레일리아 선조들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런데 비단 2차 세계대전 전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까지 이르는 수백년의 시간동안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 그리고 그것을 넘어 일제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숱한 외세로부터 받은 고통까지 DNA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나로서는 그 메시지에 고개가 쉽게 끄덕여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고통은 나름대로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고, 그 양과 질을 상호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1,000여명의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고통과 죽음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그것과 비교할때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진다. 이 불합리하고 저열한 질투심이 이 책을 밀어내는 진정한 이유인 것 같다.
‘누가누가 더 고통받았나’ 경연대회는 정말 의미 없는 짓이다. 함께 기억하고, 함께 바로잡는 것. 이것만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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