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미술여행] 2일차(1/2) – 두칼레 궁(틴토레토 특별전), 산토 스테파노 성당

2018. 9. 26.

여행지에서는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자동으로 일찍 눈이 떠진다. ‘여행자의 각성’이다. 베네치아 미술여행 이틀차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서 이 아름다운 섬의 심장,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으로 향했다. 두칼레 궁(Palazzo Ducale)에서 열리고 있는 틴토레토 500주년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내 곳곳에서 이 특별전의 홍보 포스터를 볼 수 있어서 나의 기대감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사실상 베네치아가 아닌 이상, 틴토레토 특별전을 열 수 있는 도시는 파리, 런던, 스페인 정도뿐일 것이다. 틴토레토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베네치아에 왔다는 뜻 깊은 인연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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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앞 정류장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도착한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한다. 아침 시간에 이 버스를 타서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태양이 뱃머리 쪽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광경을 매일 보며 출퇴근하는 베네치아 시민들은 얼마나 축복인가! 정작 그들은 대단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옷깃을 여미고 있지만 말이다.

광장에 도달하니 아직은 관광객들에게 점령당하기 전, 그러니까 아직은 사람 보다 비둘기가 많은 시간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원 없이 보던 그 광장에 내가 서 있다는 감동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몰아닥치기 전에 어서 줄을 서서 두칼레 궁에 입장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광장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반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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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배를 채워야 했다. 바가지 요금을 피해 광장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진 골목 귀퉁이 카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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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코 크로와상에 빠져서 열흘 동안 서너번은 족히 먹은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크로와상에 초코를 넣었는데 맛이 없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고, 그 극악의 달콤함이 이탈리안 카푸치노의 풍성한 거품을 만났을 때 엄청난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세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카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출근하는 현지인들이 주인장에게 묻지도 않고 냅킨 하나를 챙겨서 빵을 꺼내 우물우물거리는 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유 있는 아침과 함께 오늘도 고될 것이 분명한 미술여행의 전의를 불살랐다.

다시 산 마르코 광장을 지나, 두칼레 궁에 섰다. 오픈 전 부터 대기 줄이 30미터 가량 이어졌는데, 나에게는 베네치아 유니카가 있었기 때문에 예약 줄에 설 수 있었다. 간단한 가방 검사를 마치고 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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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사치스러웠던 공화국의 도제가 통치한 궁이니만큼,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인 중정과 복도, 계단을 지나 틴토레토 특별전이 이루어지는 전시관 앞에 섰다. 베네치아 유니카로 두칼레 궁에 무료 입장한 사람도 틴토레토 특별전은 2유로의 추가금을 지불해야 했다. 군소리 없이 넙죽 지불했다.

틴토레토 500주년 기념 특별전은 이곳 두칼레 궁과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두칼레 궁은 틴토레토의 전성기 회화에,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초기 작품들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역할 분배를 통해서 관람객들은 시대순으로 거장의 다채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미술관은 최적의 역할 분배를 위하여 서로가 소장한 작품과 학술적 성과를 교류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면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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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칼레 궁의 틴토레토 특별전은 연표로 시작했다. 틴토레토의 삶, 동시대 다른 화가들의 삶, 그리고 베네치아와 유럽의 역사적 사건들이 함께 정리되어 지리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대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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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초입에서 나를 사로잡은 작품은 <동물의 창조(1550)>이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내가 2016년에 도쿄 미술여행을 가서 보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당시에 도쿄의 국립신미술관에서 열렸던 「베네치아 르네상스 회화전」을 통해 이 작품을 보고 이런 짧막한 소감을 남겼다.

틴토레토의 <동물의 창조>는 거장의 솜씨가 빚어낸 판타지 세계에 대한 지극히 합당한 현시이다. 초월적으로 나아가는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들이 모두 외편을 바라보며 구획을 갖추어 전진하고 있지만, 로마네스크나 비잔틴 시대에 나타나던 작위적인 구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미디어가 없던 시대의 당대 시민들의 눈에는 정말 납득 할 수 밖에 없는 창조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을 넘나들며, 또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공간을 넘나들며, 나는 하나의 작품을 두 번 만났고, 마치 오래 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운 감동에 젖었다. 마치 예전에 읽은 소설과 지금 읽은 그 작품이 나에게 주는 생각의 결이 다르듯, 한 회화를 통해 나는 2년 전의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애틋한 마음을 담아 사진기의 셔터를 누른 그 순간, “No photo!”라는 엄숙한 제지가 감동을 무너뜨렸고, 나는 사과해야만 했다. 이 특별전은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을 꽤 잘 듣는 편인 나는 이 작품 외에 어떤 작품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이 전시에서는 틴토레토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특이한 각도에서 소묘로 남긴 습작들이 출품되었는데, 이러한 연구의 흔적들은 거장이 남다른 육체의 동세를 습득했던 과정을 보여주어서 흥미로웠다. 또한 양면에 스케치를 그린 습작은 재료비를 줄여야 했던 거장의 초년을 상기시켰다.

사실 베네치아 곳곳에 틴토레토의 작품이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두칼레 궁에서 이런 전시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전시장을 둘러보니 이 전시를 위해 세계 곳곳 유수의 박물관에서 대여한 작품이 상당히 많았다. 같은 도시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물론, 빈의 미술사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이 이 전시를 위해 틴토레토의 소중한 작품을 내어 주었다. 이 작품들은 해당 갤러리들의 대표적인 소장품이었을텐데, 거장의 탄생 500주년을 함께 축하하고 기념하는 취지에서 선뜻 대여에 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 대여는 철저한 이해관계로 이루어진다. 베네치아의 미술관들도 언젠가는 자신들이 소장한 작품들로 그들에게 보답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칭찬해줄만한 것은, 두칼레 궁과 베네치아의 공공기관들이 시 자체적으로도 충분히 소화 가능한 물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대표적인, 더 훌륭한 걸작들을 보여주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동분서주한 바로 그 노력이다.

탄생 500주년에 걸맞게 틴토레토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도 발표되었다. 예를 들어, 보스톤 미술관이 소장한 <예수의 탄생(1570s)>을 보면, 틴토레토가 1550년대에 십자가에서 내리는 예수를 그린 그림이 20년 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전혀 다른 주제인 예수의 탄생으로 변화된 것을 보게 된다. 이 변화를 위해 단순히 화면을 덮고 새로 그리는 수준의 수정이 아니라 아예 캔버스를 쪼개서 퍼즐처럼 재배치하는 가공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정이 어떠한 이유에서 벌어졌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표면과 이면을 모두 고려할 때 이 작품은 하나의 그림이 예수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담고 있는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진귀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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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포 틴토레토, 예수의 탄생(1570s)

또한 이 전시에서는 틴토레토가 하나의 구도를 어떻게 재활용 했는지, 어떤 인형을 모델로 활용했는지 등 풍부한 정보가 포함되었다. 나는 사실 그의 딸 마리에따 로부스티(Marietta Robusti)가 아버지 뒤를 이은 유능한 초상화가였다는 사실도 이번 전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들 도메니코 틴토레토(Domenico Tintoretto)가 공식적으로 아버지의 가업을 이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마찬가지로 화가였던 딸에 대한 서술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의 남성 권력이 이를 간과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뿌듯하게 틴토레토 탄생 500주년 기념 특별전 관람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궁을 둘러보았다. 엄청난 화려함과 황금 도색으로 수놓인 베네치아적 사치의 정점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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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화려함의 극치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도대체 사람을 이토록 정교한 예술혼으로 몰아세우는 동인이나 정신성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특히 대평의회회의실(Chamber of the Great Council)은 틴토레토와 베로네세가 보여주는 회화의 향연과 금박의 물결로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는데, 이런 화려한 방에서 건실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진정 궁금했다.

두칼레 궁 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와 감옥도 둘러보았다. 화려함의 극치인 궁궐에 감시와 처벌의 상징인 감옥이 붙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이러니 하지만, 이것이 중세 사회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가장 밝은 빛은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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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의 다리 창틀을 통해서 이곳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을 찍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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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광장은 다음에 다시 들를 것을 기약하며 궁을 나섰다.

산 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을 빠져 나와 다음 목적지인 카 레쪼니코(Ca’ Rezzonico)를 가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가는 김에 그 길목에 있는 성당 한 곳을 들르기로 했다. 바로 산토 스테파노 성당(Chiesa di Santo Stefano)이다. 틴토레토와 벨리니를 볼 수 있는 곳이며, 베네치아 유니카로 패스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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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성당 앞 광장에서 목 부터 축였다. 이 날 처음 만난 맥주 체레스(CERES)는 미술 분야를 제외하고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수확이다. 덴마크 태생의 이 맥주는 농사, 풍작, 과실을 주관하는 고대 로마의 신 체카레스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STRONG ALE’을 전면에 표방하고 있는 맥주 답게 7%의 알코올 함량을 자랑한다. 한 모금 마셔보면 대번에 알코올 향이 훅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카스와 참이슬을 7:1 정도로 조합한 소맥에서 느껴지는 훈기에 견줄만하다. 그래서 저 작은 병 하나를 마시면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딱 기분이 좋아지는 수준의 취기를 느낄 수 있다. 배가 금방 불러서 많은 양의 맥주를 소화할 수 없는 나에게는 최적의 배합이었으며, 이에 이 지면을 빌어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는 점을 업계 관계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참고로 나는 베네치아를 떠나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슈퍼에 들러 이 맥주 3개 들이 한 팩을 숙소 냉장고에 쟁여 놓았었다.

이제 짧은 여유를 뒤로 한 채 산토 스테파노 성당에 들어가보자. 무수한 관광객의 행렬이 내뿜는 혼란은 온대간대 없고 일순간 적막이 찾아 온다. 13-14세기의 고딕 양식을 갖춘 이 성당은 미사를 드리는 본당과 별도의 뮤지엄이 분리되어 있다. 베네치아에서는 데이 프라리 성당,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에 이어 세번째로 큰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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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rusvenezia.org/en/church-of-santo-stefano

이번에도 역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틴토레토의 손을 거쳐 성당 벽에 걸리게 되었다. <최후의 만찬(1579-80)>은 그 중에서도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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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 최후의 만찬(1579-1580)

르네상스의 엄격한 수직/수평구도와 완전히 절연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이 작품은 대담한 화면 구성을 통해 묘한 불안감과 몰입감을 자아낸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하는 예수와 사도들은 식사가 아닌 전투를 벌이려는 것 같다. 자신의 피(포도주)와 살(떡)을 떼어주며, 이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예수의 결연함에 많은 제자들이 동요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최후의 그 순간은 여지 없이 그들의 눈 앞에 서 있다. 기대와 책임이 충돌하는 이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는 틴토레토의 빠른 붓놀림은 생생한 빛과 움직임의 효과를 만들어내며 마치 스냅사진 같은 현장감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의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건물의 계단을 미리 견고하게 완성한 후에 강아지와 인물들을 사후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지만 완전히 실증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아래에서 위로, 원경에서 전경으로 한 층씩 조심스럽게 장면을 구성해 나간 것이다. 강아지 한마리, 벌거벗은 인물, 그 무엇 하나 우연히 그 곳에 있는 것은 없으며, 거장의 치밀한 계산 아래 단조로움과 헛헛함을 피하면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곳에 놓여졌다.

뮤지엄을 나오면서 늘 그렇듯 엽서 한 장을 골랐다. 한 장에 1유로였는데 나에게는 지폐 밖에 없는 상태였다. 엽서 한 장과 20유로 지폐를 내밀자 안내 부스의 직원은,

“좋은 선택이네요. 그런데 엽서는 1유로인데요… 동전 없어요?”

“네.. 이것 밖에는…”

“어디 봐봐요.”

그러더니 그는 내가 가진 동전, 다 털어서 20센트에 불과한 그 푼돈을 받더니 미소와 함께 그 엽서를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그라치에(Grazie)”

이럴 때는 역시 감사 인사를 드리고 군소리 없이 잽싸게 빠져 나와야 한다. 관광지 인심은 형편없기 마련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이런 작은 호의들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1. 일부 도판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며, 장비는 Sony RX10 MK3이다.
  2. 작가 및 장소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였다.
  3. 딱히 대단한 컨텐츠는 없지만, 그럼에도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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