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 제너의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나는 어려서부터 잡학박사를 꿈꿨다. 아는 척하기를 워낙 즐겼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 말이 ‘아는 척하고 싶은 욕망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로 들렸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아는 척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는 척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인터넷과 아카이브의 시대에 유용한 정보는 도처에 산재하고, 내가 내뱉은 말을 검증받기도 쉬워졌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면 할수록 진실에 대한 강박이 냉혹한 자기검열로 돌아온다. 날카로웠던 말끝이 점점 뭉툭해진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화법인 ‘~것 같아요’가 어느덧 내 입술에 다가와 원래 자기 자리인 냥 똬리를 튼다. 대중 앞에서 말을 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감은 더 크게 어깨를 짓누른다. 남들 앞에서 한 시간을 떠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 시간, 스무 시간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무지무지, 엄청나게, 정말 많다.

저자 그레그 제너(Greg Jenner)도 그런 똑똑한 사람 중 하나다.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는 잡학박사를 꿈꾸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고, 파티를 열고, 잠을 청하기에 이르기까지 하루 동안 일어나는 여러 일상적인 사건들의 역사적 기원을 파헤친다. 대부분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일부는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도, 구전도 없는 그 정도의 과거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 편입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역사의 범주에 대한 논란보다 중요한 것은 소급할 수 없는 끝까지 거슬러 가보고 싶은 우리의 지적 열망 그 자체이다. 이 책은 의식주, 통신, 애완동물 등을 넘어 대소변에 이르기까지 넓고도 얕게 역사적 기원과 최근까지의 흐름을 훑어주면서 그 열망에 조금은 부응한다. 저자가 유머에 대한 강박을 품고 이 글을 썼기 때문에 서구 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있다면 유쾌하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영어권 사람들이 통화할 때 ‘헬로’라는 인사말을 사용하는 관습이 에디슨의 감탄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나,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는 ‘최후의 만찬’ 도상이 당대 유럽인의 편견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만물의 기원에 관한 책들은 흥미를 자극하는 면이 분명 있지만, 우리의 지적 노정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한때 불꽃처럼 피어 올랐던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 책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어떤 글을 쓸 때 어원이나 기원을 아는 척하면서 서두를 멋지게 장식하고 싶다면 이 책들이 어느 정도는 유용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대화를 주도하면서 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면 차라리 한 분야를 깊게 파는 쪽이 유리하다. 넓고 얕게 접한 지식은 읽을 당시에는 흥미로울지 몰라도 정작 활용도는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은 지식은 정보와 정보 간에 연결고리가 약하기 때문에 정작 써먹고 싶을 때 반사적으로 튀어 나오지 않는다. 쉽게 번 돈이 흥청망청 빠져나가듯, 쉽게 들어온 지식도 금세 휘발된다.

반면 한 분야를 이해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계속 파내려가다 보면 그 분야와 연관된 배경지식들도 차츰 쌓여 가면서 보다 견고한 지적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미술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독단적으로 홀로 발전해 온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 경제, 철학 등이 맞물려 ‘맥락화’된 지식은 기억에도 오래남고 ‘연관검색어’로 촘촘히 색인되어 있기 때문에 꺼내 쓰기도 쉽다. 그러니 잡학박사를 꿈꾼다면 넓고 얕은 책 100권 보다는 자신의 가슴을 울리는 분야 하나를 정해서 집요하게 10권을 읽는 것이 낫다.

역시나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가슴을 울리는 분야 하나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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