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 展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잠시 잊고 있었던 빛

부제가 붙지 않은 전시를 실로 오랜만에 본다. 어지간한 거장의 전시라면 비장한 부제가 이름 뒤에 하나쯤 따라오면서 그 작가의 미술사적 공로를 압축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정도 되면, 그러니까 생존 화가 최고 낙찰가 기록(9천 만 달러)을 보유한 81세의 대가쯤 되면 그런 부제조차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나 보다. 그래서 그냥 <데이비드 호크니 展>이다.

언제 가야 할지 대국민 눈치작전을 보다가 기어코 평일에 휴가를 내고서야 전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개관 당시부터 화제 만발이었던, 미술관 정문 밖까지 이어진 유례없던 대기 행렬이 이제야 조금 잦아든 모양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린 나사처럼 개인적인 감상 속도와 무관하게 어느덧 출구까지 떠밀리는 가련한 존재가 되는 비극을 피했다.

사실 데이비트 호크니가 우리나라를 처음 찾았던 것은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展이었지만, 그때는 당시의 최근작 몇 점만 선별적으로 왔을 뿐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준비한 이번 전시는 그의 이름 옆에 부제가 없다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전 생애를 아우르는 완성도 높은 회고전임에 틀림없었다. 2차원 평면 위에 실재를 표현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보이는 방식에 대하여 평생에 걸쳐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온 호크니를 구상회화의 마지막 구도자로서 과도하게 추대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고전으로서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가 호크니를 기리는 방식은 역시나 재현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다.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파고가 주류 갤러리를 넘어 미술대학까지 차고 넘칠 때 꿋꿋하게 새로운 재현의 길을 모색했던 뚝심에 대한 상찬이 이어진다. 전시는 호크니가 단순히 추상에 반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래픽적인 미니멀리즘으로 3차원 공간을 재구획하고, 상징적인 기호가 넘실거리는 실험적 판화를 선보이고, 피카소에 대한 존경을 담은 가변적-다시점-역원근법적 작업들로 자기혁신했던 과정을 되짚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미술사적으로 라벨링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재현 미학이 한 사람을 경유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가 추상으로 한눈을 팔았을 때조차도 그의 화면에는 확연히 알아 볼 수 있는 물리적 공간과 부유하는 물질들로 가득하다. 그보다 앞선 재현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그가 작업을 시작했던 시점에 세상을 떠난 조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와 비교하면 5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호크니의 회화적 궤적은 그야말로 실험, 발견, 그리고 자기혁신으로 점철되었다는 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 모든 궤적 속에서도 우리가 특히나 캘리포니아 회화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3차원의 공간을 강박적인 수직수평의 색면으로 재구성한 수영장 시리즈든, 아니면 조금 더 친절한 자연주의적 인물화든 구체적인 표현이야 조금 다를지라도 그것들은 미세먼지투성이 속에서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명징한 색감을 보여준다. 호크니의 캘리포니아 시절 아크릴화들은 그것이 반사하는 빛이 우리 망막에 닿자마자 우리가 애써 잊어야만 했던 하나의 감각을 곧장 상기시키는데, 그 감각을 굳이 비유하자면, 아마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찍었던 일회용 카메라 사진을 현상한 후 하얀 봉투에서 처음으로 꺼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순간의 저릿한 감격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빛은 우리가 원치 않았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차마 발설하지 말아야 했던, 애써 중화시켜야만 했던, 그래야만 ‘쿨’한 것이라고 종용받아왔던 무언가다. 그 빛이야말로 그동안 블랙 앤 화이트와 모던-미니멀리즘 인테리어와 이케아의 북유럽 감성과 밍밍한 라떼와 시크와 모즈룩 사이에서 고립되었던 몸을 뉠만한 곳이다.

Lawn Sprinkler, 1967
A Bigger Splash, 1967
My Parents, 1977
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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