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 호크의 「이토록 뜨거운 순간」

Ethan Hawke, THE HOTTEST STATE (1996)

치기어린 20대의 사랑이야기다. 대학을 중퇴한 배우 윌리엄이 어느 라이브 주점에서 사라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다. 사라는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매우 섬세한 여인인데, 윌리엄에 본능적으로 끌리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번번이 그의 사랑을 밀어낸다. 여기서 그녀가 밀어내는 방식은 섹스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미국의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 젊은이들에게 사랑하면서도 섹스를 거부하는 상황은 대단한 모순이자 수치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인데, 그러한 답답한 대치 국면 속에서 윌리엄은 좌절하다 못해 미치기 직전까지 간다. 누군가의 육체를 간절히 소망하기를 원하면서도 그것이 타의로든 심리적 이유에서든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이 비교적 현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역시 자전적 소설이기는 한가보다.

아무래도 성적 접촉은 이성 간의 사랑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진데, 그것이 남녀관계의 본질이 아닌,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설명은 허위 내지 가식이거나, 그릇된 학습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그러한 설명은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는 견지에서 고등 영역의 심리 및 정서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나타나는데, 그런 담론이 넘쳐날수록 오히려 인간이 동물 자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다만 본능을 유보할 수 있을 정도의 집단적 정신구조를 형성하고, 학습하고, 전수할 수 있는 동물일 뿐이다. 인류만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 극단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정신적 특성을 과대평가하거나 인간이 동물의 일종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 마음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집어든 까닭은 물론 저자인 에단 호크(Ethan Hawke)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사실 이 애정은 단순한 팬심이라기 보다는 닮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물론 그의 섹시하고 지적이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더 중후한 품격이 묻어나는 외모를 닮기란 태생부터 글렀다. 다만 외모 외에 스크린에서 비쳐지는 매력들은 늘 내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고, 알게 모르게 그를 흉내 냈던 순간들도 있었음을 감히 고백한다. 그의 매력이 최대로 발현된 시점은 역시나 <비포 선라이즈>였고, 그 후 9년 단위로 발표된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도 각 나이대별로 매력적인 남자에 대한 시청각 교보재나 다름없었다. 또한 최근 작품인 <본투비블루>, <퍼스트리폼드>에서 에단 호크는 연기의 정점에 다다랐다는 인상을 주는 완성형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적인 커리어와 별개로 이 소설은 그저 공감하기 힘든 아마추어리즘에 머무른다. 우선은 사라가 윌리엄을 밀쳐내는 이유가 설득력 있게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인 애정의 대상이 아닌 그저 속내를 알 수 없는 ‘발암캐릭터’로 전락하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윌리엄이 갈팡질팡하는 마음에도 공감하기 어렵고, 이 작품의 궁극적인 주제인 ‘청춘의 불 같은 사랑, 그리고 성장통’이라는 메시지도 B급 영화의 카피라이트처럼 겉돈다. 물론 1인칭 작품이기 때문에 사라의 내면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고, 이 같은 텅 빈 부분들이 20대의 불안정성과 막연함을 더 잘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문학적인 단단함은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은연중에 알 수 있도록 드러내는 방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섬세하게 묘사되어 공감하게 되는 부분은 윌리엄의 출생 및 성장배경,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단절과 상처를 거쳐 회복과 성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장면이다. 또한 시련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 전 애인을 이용하는 저열한 장면에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공감대가 느껴진다. 결국 저자는 자기 내면의 이야기는 꽤 잘하는 편이지만, 그 밖의 인물들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역할은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 이 대목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느껴진다. 아마 그 아마추어리즘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배우 에단 호크’의 팬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아직 그의 진정한 팬은 아닌가 보다.

어쨌든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에단 호크 특유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장황설을 자주 엿볼 수 있어서 즐거울 것이다. 나도 일상생활 속에서 사소한 단초로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러한 장황설을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생각처럼 재미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그렇게 순발력 있게 줄줄 흘러나오지도 않고… 아마 언어문화의 분명한 차이 때문이리라.

“우리가 어릴 때는 모든 사람이, 온 세상이, 너의 꿈을 좇으라고 격려해 주지.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찌된 영문인지 꿈을 찾아가려고 아주 작은 시도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이 몹시 불쾌해한단 말이야.”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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