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의 성전에서 만난 상업주의의 투사
화장이란 먹고 사는 문제와 전혀 상관없이 순수하게 차이화의 기호로만 존재하는 활동이다. 화장은 본질의 차이가 아닌 기호의 차이만을 만들어 낸다. 마스카라를 그리는 행위 자체는 출근해서 일하고 성과를 내고 월급을 받고 식료품을 구매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마스카라를 그린 자와 그리지 않은 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리지 않은 자는 문명화된 행동을 거부하는 자가 된다. 우리는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태어났다. 그러나 화장을 한 얼굴이 문명화된 기본상태로 간주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무언가가 결핍된 상태로 인식된다. 개인은 이 부당한 인식구조를 혼자 힘으로 거스를 수 없고, 거스르려고 노력하다가 자칫 낙오자가 되기 쉽다. 위대한 혁명가와 시대착오적인 낙오자는 한 끗 차이이다: 다수가 그의 저항에 동조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위 문단에서 젠더 권력의 문제를 완전히 피해버렸는데, 이는 나의 비겁함이 아닌 무지 때문이다.

신용산역 1번 출구로 나와 뒤를 돌아보면 위풍당당한 아모레퍼시픽 사옥이 보인다. 어마어마한 양의 화장품을 팔아 재껴서 대기업 문턱까지 진입한 입지전적인 기업이다. 모든 인간이 어느 정도는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미적 욕망의 씨앗에 온갖 정성을 들여 비료를 주고 가꾼 후, 그 열매를 따먹은 대표적인 기업이다.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게 아름답고 부티나는 건물을 지었다. 강박적인 수직수평의 입방체에 노출 콘크리트의 담백한 맛을 살렸다. 외부는 요즘 대부분의 빌딩이 그러하듯 유리로 뒤덮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하늘한 알루미늄 루버로 다시 한 번 느슨하게 감쌌다. 이 금속 막대기 층은 위로 올라갈수록 미묘하게 팽창한다. 그래서 이 건물을 올려다보면 위로 갈수록 좁아져야 마땅한 원근법이 다소 왜곡된다. 어디서 보더라도 완벽한 입방체로 보일 수 있도록 우리의 익숙한 지각 체계를 교란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제작할 때 관람객들이 아래에서 올려볼 것을 감안하여 머리를 이상적인 비례보다 조금 더 크게 만든 것과 동일한 원리다. 이 왜곡의 기저에는 어디서 보더라도 이상적인 비례미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 허황된 열망을 거대 화장품 기업이 자신들의 육중한 신사옥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했다고 한들 놀라울 것은 하나도 없다.

아모레퍼시픽 사옥 1층과 지하에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있다. 외관만큼이나 문을 열어 주는 안내직원의 복장도, 이름의 약자(APMA)도, 심지어 새하얀 라커룸도 ‘쿨’하다. 이 미술관의 개관 1주년 기념전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에게 돌아갔다. 크루거는 주류 예술계에 발을 들인 후 줄곧 직설적인 화법으로 여성 및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무분별한 상업주의, 정치적 압력, 공공연한 제국주의적 욕망을 감춘 국제화 등 서구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크루거 특유의 굵은 폰트로 육중한 펀치를 맞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의 장소성은 시종 아이러니로 둘러싸여 있다. 여성의 미적 열망을 부추겨 막대한 이윤을 챙겨온 기업의 기념비적 성전 한 복판에서 크루거의 전시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다. 크루거가 작품을 보내면서 그 아이러니를 면밀히 검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재기발랄한 감각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이 아이러니를 즐겼을 수도 있다. 그가 처음에 텍스트 작업을 시도했을 당시처럼, 잡지광고 이미지에서 최첨단 소비지상주의의 한 순간을 오려내고 그 위에 역설적인 비판의 텍스트를 처음으로 겹쳐 놓았을 때처럼, 전혀 다른 뿌리에서 온 상반된 두 기호의 병치가 만들어내는 황홀한 자기장의 힘에 매료되었던 그 첫 경험을 재현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어두침침한 전시장에서 노련하게 스포트라이트를 통제하면서 모기업의 손에 강력한 면죄부 하나를 꼭 쥐어주었다. 최근 이 회사는 ‘아름다움’ 보다는 ‘건강’을, ‘미적 가치’ 보다는 ‘사회적 가치’라는 말을 앞세우며 방문판매 시절의 구습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크루거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라는 이번 전시는 그러한 입바른 보도자료들에 절묘하게 공모한다. 이 면죄부가 성공적일 수 있는 까닭은 당연히 명석하고 아름다운 작품 자체의 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힘이 저출산과 ‘탈코르셋’을 대면한 뷰티산업 전반의 미묘한 균열로부터 모기업을 구해내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 대목에서 예술 후원과 정치적 의도는 분리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마치 메디치가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라는 예술가 자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후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처럼 본질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알레고리적 회화와 그 후예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이미지와 의미 사이의 숨바꼭질에 넌더리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거기서 즐거움을 찾으려 애쓴다. 형태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습관은 싸구려 도판의 형태로 전해진 크루거의 작품에서 진면모를 느끼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크루거는 작품의 이미지에 의미를 숨겨 두는 의미 게임 같은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하려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아니, 그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곧장 내뱉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나 말을 2중, 3중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작품 속 텍스트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크루거가 비판하는 대상이 내뱉은 말로, 우리는 그 말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크루거가 직접 우리에게 건내는 말이다. “제발 웃어, 제발 울어” 이런 식으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도 크루거의 작품이 하나 있는지라 몇 번 봤었는데, 사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작품 참 쉽게 하네’ 정도가 솔직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40여점을 죽 모아놓고 보니 정말 대단한 예술가가 맞다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용의 신랄함을 떠나서, 일단 조형적으로 대단히 섬세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선정되고 배치되는 감각이 그야말로 정점에 있다. 그 감각이 전제되기 때문에 텍스트의 날카로움이 더욱 강력한 힘을 얻어 관람객의 지각체계 깊숙한 곳까지 빨려 들어간다. 이렇듯 크루거의 작품이 지닌 최대의 매력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환기하는 의미 작용이 그것을 수용한 사람의 배경과 처지에 따라 완전히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크루거의 작품들을 포커 크기의 카드로 만들어서 테이블 위에 늘어뜨린 다음, 열 명이 쭉 둘러앉아서 하나씩 펼쳐보면, 하나의 카드에서 열 개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사실 작품은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이야기들의 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가 아닌,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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