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가의 재발견 1 – 「절필시대: 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 展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억해야 할 이름들, 특히 정종여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붓을 놓아야만 했거나 잊혀야만 했던 여섯 명의 화가들을 조명한 전시다. 정찬영은 화가로서의 삶과 가정주부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사랑하는 자녀를 잃고 붓을 놓았다. 백윤문은 전성기에 건강을 잃고 화단을 떠나야 했다. 정종여는 북한을 선택했고, 거기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우리 미술사에서 지워졌었다. 임군홍에 대해서는 월북인지 납북인지 합의를 이루지 못한 모양이다. 어쨌든 그도 올라갔다. 이규상과 정규는 예술적 성취에 비하여 간과된 사례이다.

이들의 삶에는 아픈 역사의 상흔이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전시는 건축물의 균열에서 나타나는 선을 디자인 요소로 채택하며 그 상흔과 단절을 암시한다. 곳곳에 새겨진 이 트롱프뢰유-균열은 나름 정교한지라, 나이가 지긋하신 관람객들은 벽에 정말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자원봉사자들에게 묻기도 했다. 나도 처음에는 진짜 균열인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디자인 요소였다. 이 균열을 메꾸는 일은 우리 손에 맡겨졌다.

정종여, <독수리(1948)>

여섯 명의 화가가 소개되었지만 정종여가 워낙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까닭에 다른 화가들은 거의 들러리처럼 느껴진다. 정종여는 우리 산하를 모두 화폭에 담고 싶은 열망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모든 여행의 흔적들은 예리한 스케치들과 거대한 산수화로 남았다. 그의 습작과 산수화는 한 사람이 남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전공 분야인 동양화만 놓고 보더라도 갈필과 습필을 자유자재로 통제하였고, 사진을 방불케 하는 사실주의에서부터 관습적인 화조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에게 어울리는 최적의 표현을 구현해냈다. 기본적으로는 남성적인 강한 힘이 화면을 지배하다가도, 민초들의 생활 속 정경들을 묘사할 때는 예외적으로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을 보여준다. 정종여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초월하여 당대 화가들이 개발했던 모든 표현 기법들을 통달한 천재였다.

그가 북한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얼마나 진실하게 옹호하면서 선전의 선봉에 섰는지는 알 길 없다. 그가 북한의 미술관련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과 그곳에서의 업적에 관한 자료들을 보면, 북한식 ‘조선화’에 대한 정종여의 소신은 굳건해 보인다. 아마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그에게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최고의 대우를 해줬을 것이고, 그러한 배경에서 정종여의 정치적 신념은 더욱 굳건해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가 증명하듯, 그 어떤 최악의 국가에서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물며 그의 생전에 북한의 경제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 어쨌든 그가 북한을 활동 무대로 선택한 이상, 그가 북한 미술계의 지도자 위치에 서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산봉우리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한 정종여의 기량을 보자면, 그가 조선화의 이상에 얼마나 제대로 부합하는 화가였는지 명백해진다.

정종여, <지리산조운도(1948)>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우리를 선택했다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겼을까! 우리는 더 많은 실험을 보장해 줄 수 있었는데! 그의 천부적인 기량이 무한한 주제의 가능성들을 만났다면 더 풍성한 예술적 성취들이 쏟아졌을 터인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시나리오다. 우리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모종의 환멸, 갈등, 압박으로 인하여 붓을 끊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리가 지금 그런 사례들을 선뜻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새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종여, <어경포대 망만이천봉(1942)>
정종여, <가야산하(1941)>
정종여, <한강낙조(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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