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적 스펙터클의 끝
결국 U2가 왔다. 마지막 단추를 끼운 느낌이다.
내가 U2를 가장 열심히 들었던 시절은 고등학교 1~2학년 때였다. 그때 내게는 AA건전지가 들어가는 32MB 용량의 MP3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거기 담겨 있던 주요 레파토리 중 하나가 U2였다. 당시에는 팝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밴드인지는 몰랐다. 그냥 밴드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그 이름을 알게 된 계기도 특이하다. 내가 풀던 어떤 문제집의 단원과 단원 사이에 쉬어가는 코너로 팝 명곡들을 소개해주는 코너가 있었고, 거기서 그들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문제집에 그런 코너가 있었는지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 요즘 문제집에는 그런 낭만이 없으리라고 본다. 그 지면에 소개된 곡은 ‘All I Want is You’였다. 그 글의 필자는 카페에서 우연히 그 곡을 듣게 되었고, 듣자마자 보노(Bono)의 섹시한 음색과 풍성한 연주에 홀딱 반했다고 했다. 궁금해서 찾아 들어보니, 정말 좋은 노래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점진적으로 고조시키는 구성에 쉽게 마음을 준다.
그날도 어김없이 쉬는 시간에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음악에 심취해있었다. 그래서 과학 선생님이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선생님이 4분단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내 MP3 플레이어를 몰래 빼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선생님은 재생되고 있는 곡명을 슬쩍 본 후에 “짜식, 그래도 좋은 노래를 들으니 봐준다.”하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선생님, 이 노래가 유명한가요?”라고 물었고,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는 “유명하냐고? 허 참… 졸라 유명하지”라고 답했다. 참고로 과학 선생님은 우리 학교 밴드 동아리 지도교사였고, 그 노래의 제목은 ‘With or Without You’였다.
그 후로도 U2의 신보가 나오면 냉큼 달려가 들었다. 내가 그들을 알게 되었던 2000년대 초반에 이미 그들은 최정상에서 약간 내려온 중견가수쯤으로 여겨졌는데, 그러한 평가가 무색하게 그 이후로도 그들은 그래미어워드, 투어, 앨범, 심지어 정치 활동 등등 모든 면에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음악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한 편이다. 나는 교과서적인 화음, 선율, 그리고 딱 떨어지는 기승전결의 구성에 끌리는 반면, 그들은 점점 실험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여러 사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들의 첫 내한공연을 기어코 찾아간 것은 오랜 정과 의리, 그리고 역사적 순간에의 참여욕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U2가 공연의 신(神)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천문학적인 부를 떠받치고 있는 원천도 역시 투어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전매특허인 61 x 14미터 규모의 초대형 LED 스크린을 가지고 왔는데,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는 존재감만으로도 압도되는 경험이었다. 쭉 뻗은 고속도로(‘Where the Street has No Name’)나 뻥 트인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하는 공연(‘With or Without You’)에서는 마치 밴드가 실제로 그 풍경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연주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변화하는 역동적인 배경의 이미지에 밴드가 동화되어 어우러지는 광경은 시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종합예술 콘텐츠로서 손색없었다.
나는 콘서트장에서 정작 밴드는 보지도 않으면서 전광판만 주시하거나 심지어 휴대폰에 찍힌 화면만 주시하는 상황에 회의적인 편이다. 비싼 돈 내고 와서 라이브 연주를 듣기는 하지만, 정작 눈에 담고 가는 것은 전자화면 속 허상일 뿐이니 집에서 고화질 DVD로 보는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 화면이 기술진보로 인하여 일정한 한계를 돌파해버리자 전혀 다른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것을 이번 공연에서 알게 되었다. 시야 전체를 압도하는 스펙터클과 공연자의 땀방울 하나, 주름 하나까지 셀 수 있을 정도의 고화질이 결합되면 음악적 경험은 신체의 모든 감각을 공략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극이 된다.
단순히 영상이 크고 선명하다고 해서 그런 성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창의적이고 발 빠른 편집기술도 한데 어우러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연은 ‘Red Hill Mining Town’이었는데, 여기서 밴드의 배경영상으로 구세군이 금관악기를 들고 등장한다. U2의 음악은 구세군 브라스밴드와 서서히 융화되기 시작하는데, 절정에 도달하면 공연장 라이브 영상은 밴드를 좌측면에서 잡고, 녹화된 브라스밴드는 우측면을 보여주면서 두 영상이 접합된다. 결국, U2와 브라스밴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음악과 영상이 창조적으로 융합된 가장 멋진 사례였다. 그밖에도 라이브 영상이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편집되어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연출되는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공연장 상황에 어떻게 그렇게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완벽한 역할분담과 사전기획, 그리고 부단한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U2는 공연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로 유명하다. 사회운동가로도 분류되는 보노는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번 서울 공연에서의 메시지도 평등과 평화였다. 서두에서부터 공연 당일이 존 레논(John Lennon)의 기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평화의 수호자가 더 많이 나와야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전했다. 이후 일반적인 공연이 이어지나 싶더니, 본격적인 첫 번째 메시지가 후반부의 ‘Ultraviolet (Light My Way)’에서부터 전달되었다. History가 Herstory로 바뀌었고, 이후 역사에 획을 그은 여성들의 이미지가 나열되었다. 해녀, 위안부, 이수정 교수, 서지현 검사, 나혜석 등 우리나라의 인물들도 지나갔다. 김정숙 여사와 설리도 등장했는데, 이 대목에서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졌지만, 어쨌든 현지화 노력만큼은 높이 살만했다.
두 번째 메시지는 통일이었다. 보노는 영어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 중 하나가 화해(compromise)라면서, 남과 북이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하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walk together as one”). 이어진 마지막 곡 ‘One’에서는 초대형 화면을 태극기로 가득 채우며 소위 ‘국뽕’의 절정에 치달았다. 참 뻔한 구성이지만 그래도 울컥하는 걸 보면 민족성이라는 굴레는 생각보다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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