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Louisa May Alcott, Little Women (1868, 1869)

상상의 부재에 던지는 교훈

지난겨울에 많은 사람이 그랬듯, 나도 영화판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나서 뒤늦게 소설을 읽었다. 작가가 명시하고 있듯, 소녀들에 바치는 책이기는 하지만, 나는 소년일 때조차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해적판 짜깁기 판본을 쉽게 접할 수 있기는 했지만 아마도 젠더 기대에 편승한 탓인지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집에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 따위가 있었는데, 그중에 「작은 아씨들」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반면, 「소공녀」는 분명히 책장에 꽂혀 있었고, 나는 그동안 그 작품과 「작은 아씨들」을 종종 혼동해왔다. 다행히도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어졌다.

영화판을 보고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원작도 읽지 않은 주제에 영화화가 엄청나게 잘 된 작품이라고 주제넘은 찬사를 쏟아냈다. 가끔은 주제넘게 막 던진 단언도 어떻게든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소설의 영화화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 모델을 구현해냈다. 그는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가족사를 단선적인 시간 순서로 배치하는 대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회상의 장치로 풀어냄으로써 러닝타임의 압박에서도 효과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들을 구원해냈고, 나아가 추억 속의 아련함을 배가시키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꼭 필요한 장면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했고, 극 중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치밀하게 통제된 소품과 세트, 특히 19세기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의상이 빚어낸 시대적 분위기도 환상적이었다. 다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의 외관상 차이를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내 보였다면 세월을 넘나드는 관객의 혼란은 덜었을지 모른다.

원작 소설을 찬찬히 읽고 나니,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비극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시대는 ‘상상의 부재’, 아니면 적어도 ‘상상의 위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과거 상상으로만 구현됐던 세계, 즉 경험적 질서의 제약을 벗어난 이상적/초현실적 세계의 구현은 전적으로 디지털 신경망에 위임되어 있다. 반면, 작은 아씨들은 상상의 세계관 속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가상의 자아와 실재 자아를 비교하고 성찰하며 성장한다. 천로역정 놀이, 크리스마스 연극, 피크위크 클럽 등에서 상상의 유희가 삶의 저변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놀이는 언젠가 실제로 벌어질 상황들에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기민하게 대처하도록 돕는 역동적인 훈련이다. 유년기의 제약 없는 상상과 다양한 역할에 대한 대리적 체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적절한 역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시뮬레이션이다.

지금 우리네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고 있나? 상상은 게임 속 세계관에 위탁했다. 역할 놀이는 게임 속 캐릭터와 유튜브 크리에이터에게 위임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미리 갖추어졌고, 그 감각성은 실로 화려하고 촘촘하기에, 상상을 통해 여백을 채워나갈 여지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나는 유년기를 가난한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보냈다. 내 선대에 비하면 풍족한 환경이었겠지만, 제대로 된 장난감 하나도 변변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빨래집게로 로봇을 만들고, 우산대를 뜯어서 검을 만들고, 냄비뚜껑을 팽이 마냥 돌리면서도 하루가 금세 저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또래들은 책가방만 던져놓고 공터에 모이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고, 그중에서도 연장자는 연장자대로, 꼬맹이는 꼬맹이대로 각자 기대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며 뛰어놀았다. 놀이의 형태는 스포츠나 전쟁, 혹은 개인 단위의 경쟁 등의 형태로 단순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세부적인 맥락에서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았다. 게임의 룰을 만들어 가는 것도 결국은 당사자들이었다.

소크라테스도 당시의 청년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고 하니, 윗세대가 아랫세대를 보며 걱정하는 양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부할 정도이고, 대부분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유비쿼터스 세상에 던져진 세대가 그보다 앞선 세대는 절대 예상치 못했을 방식으로 창조적 결과물들을 쏟아낼 것이라는 전망도 유효하다. 하지만 만들어진 세계를 즐기는 세대와 황무지 위에 세계 자체를 만들며 커나간 세대는 분명 성찰의 범위와 깊이가 다르리라고 본다. 문제에 닥쳤을 때 바로 검색창을 여는 사람과 깊이 생각해 본 후 검색창을 열어 그 산출물을 내적 분석의 결과로 피드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작은 아씨들」의 표면적 주제의식은 가족의 소중함, 기독교적 소명의식, 진정한 사랑과 꿈의 성취 등일지 몰라도, 오늘날 이 작품이 던지는 가장 유효하고도 시의적절한 교훈은 상상으로 여백을 채우는 성장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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