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2 & H2O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조언: 시간이 별로 없으면 전시 속 전시만 보세요.

두 개의 팔과 다리와 눈과 콧구멍과 젖꼭지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이항(二項)에 너무도 익숙한 탓에 그 밖의 가능성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한다. 하지만 젖꼭지와 달리 인간이 구축한 문화적 구조에는 경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경계는 누군가에게 삶의 무대가 된다. 경계나 변두리에 내몰린 삶의 무대를 복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투쟁이 20세기 전반에 걸쳐 횡행하였으나, 우리는 여전히 이항대립의 구조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 한다. 분명한 색깔을 내비치지 않으면 눈길조차 끌지 못한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검증하려는 사복 KGB 요원이 도처에 깔렸다.

분명 유구한 역사는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항대립을 조장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략인지를 증명한다. 포악한 이교도를 규정하지 않고서 십자군 원정대를 꾸릴 수 있겠는가?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흐리멍텅한 세상에서 정치 유튜버가 밥벌이할 수 있겠는가? 이항대립이 완연한 보색에 가까워질수록 그 경계에 놓인 삶은 더 척박해진다.

양혜규는 이항대립적 경로의존성에 매몰된 우리에게 재고의 장을 마련하였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는 이승과 저승, 안과 밖, 일상과 예술 등 대립하는 관념들을 상기시킨다. 전시장 초입에서 맞닥뜨리는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2017)>은 블라인드 154개를 엮어 만든 거대한 모빌이다. 이 작품의 주재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코앞까지 다가가야 비로소 블라인드임을 알아챌 수 있다. 익숙한 물질이 그만큼 낯설게 쓰였다. 흔해 빠진 한갓 사물의 세심한 조합과 재구조화는 그만큼 전혀 새로운 시각성을 창출한다. 블라인드 낱장이 서로 느슨하게 엮여 나풀거리고 천천히 돌아간다. 그 아래 서서 중심을 바라보면 4차원의 세계로 빨려드는 것 같다. 블라인드는 속성상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되면서 아주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그 경계를 허물 수 있다. 닫힘과 열림이 교차하는 막이다.

<소리 나는 가물> 연작에서 인터페이스는 금속 방울이다. 무당이 굿할 때 쥐고 흔드는 장면이 대표적인 용례다. 무당은 제의를 통해 신계와 현상계를 연결한다. 방울의 반복적 움직임과 청각적 효과는 접신의 무아지경을 한 단계 더 깊이 끌어 올린다. 지난 세기말에 나이트클럽을 주름잡았던 테크노 음악이 추구했던 전략과 유사하다. 우리는 용도가 폐기된 물체의 표면을 뒤덮은 방울을 보고, 그 짤랑거리는 소리를 이내 유추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소리를 현실에서 재생할 수는 없다. 미술관에 놓인 이 “소리 나는” 물질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이라는 아우라를 덧입고 절대 손대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 좌대 위에 놓여 있다. 철옹성 같은 감시자와 함께. 손쉽게 여기저기 옮길 수 있도록 바퀴를 달아놓은 작가의 배려심은 덧없는 약 올림이 되었다. 흔들 수 없는 방울은 기호일 뿐이다.

서재의 두꺼운 책이나 장식품을 슬쩍 누르면 비밀의 문이 스르륵 열리는 장면은 헐리우드 어드벤처 영화의 지긋지긋한 클리셰 중 하나다. 이러한 장치는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가 우리 삶의 아주 가까운 곳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간과하기 쉽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면, 흰 벽에 아무렇게나 문고리 손잡이를 달아놓은 듯 보이는 <구각형 문열림>은 그러한 클리셰의 전복이다. 관문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그 관문 너머에는 진리는커녕 아무것도 없다. 작가는 아홉 개의 손잡이로 아홉 가지 유형의 심리를 대변하는 구각형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손잡이의 간격이 워낙 커서 설명 없이 구각형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인터페이스는 존재하나,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세계. 이 지점에서 뭔가를 볼 수 있는 관객이라면 작가의 환대를 받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작가에 대한 예의상 억지로 써 내려간 감상이다. 솔직히 와닿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번 전시에서 주인공의 작품보다는 그가 큐레이팅한, ‘전시 속의 전시’가 더 흥미로웠다.

<목우공방─108 나무 숟가락> 展은 작가의 지인인 김우희 목수가 만든 각양각색의 숟가락과 직접 쓴 짧은 에세이들로 구성되었다. 전시장 자체가 화이트 큐브 속 블랙 큐브로 조성되어 진시 속 전시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출품된 숟가락 중에서 본질적 기능인 ‘음식 떠먹기’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녀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다수 작품은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지극정성으로 이 녀석들을 만들었고, 보관해 왔다는 사실 자체를 드러내는 데 그친다. 일견 무용해 보이는 일에 사활을 걸고 매진하는 작업; 어쩌면 이러한 작업은 예술의 정의라는 광폭의 스펙트럼에서 무시 못 할 한 축을 차지한다. 애당초 우리가 예술이라고 폭력적으로 뭉뚱그려 일컫는 대상은 사실상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본질적 생명 유지 활동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없는 물질 및 행위의 집합체다.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무언가에 누군가가 모든 역량과 시간을 온전히 투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목우공방의 기상천외한 숟가락들을 바라보며 예술의 존재 이유 중 하나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김우희 목수는 경남 창원시 마산 진동에서 목우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쓸모있는 것을 만들어 밥을 먹고, 중간중간 쓸모없는 것도 만들어 내면을 채운다. 에세이들을 통해 유추하건대, 연로하신 이웃 주민들은 그를 괴짜로 취급되는 듯하다. 철거 현장에서 폐목재를 모아 기괴한 숟가락 따위를 만드는데 온종일 정신을 쏟고 있는 모습을 보며 밥벌이나 제대로 하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늘 누군가의 밥에 관하여 이토록 염려하고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정말로 밥벌이에 얼마간의 고충이 있는 목수는 오늘도 묵묵히 밥을 떠먹기 버거운 숟가락을 만든다. 밥을 매개로 고민과 걱정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 기괴한 숟가락만 우뚝 서 있다. 숟가락은 증언한다; 예술은 섬광이 번득한 창조의 순간이라기보다 하루하루 켜켜이 쌓이는 지리한 노동의 결과물에 가깝다는 것을, 예술과 삶은 결국에 하나의 몸짓이라는 것을.

김우희 목수는 양혜규 작가에게 숟가락만 얹은 것일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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