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otte Horlyck, Korean Art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Present
타자의 시선, 우리의 정체성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질문은 언제나 화두가 된다. 일반적으로 남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독자적인 기준으로 확고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한 민족이 타자의 시선에 눈을 돌리는 경향은 정신없는 고도성장이 어느 정도 둔화하면서, 이제 주변이나 내면을 돌아볼 만한 여유가 생겼을 때 두드러진다. 버블 경제가 끝난 일본이 그러했고, 이제는 우리가 그러고 있다. 2010년대 초반에는 ‘두유 노 지썽팍? 오어 싸이?’ 같은 밈이 ‘국뽕’이라는 프레임에서 회자 되었고, 이제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의 반응을 살피거나 해외로 진출한 케이팝 스타의 위대한 여정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케이팝 스타의 뮤직비디오는 ‘리액션 비디오’가 가장 활성화된 분야일 것이다. 정보혁명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면서 타자의 시선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에 더욱 집요하고 은밀하게 개입하고 있다.
덴마크 태생의 저자 샬롯 홀릭(Charlotte Horlyck)은 런던대학교에서 일본어, 미술사, 한국미술사 등을 공부했고, 한국학연구소장과 영국 한국학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어지간한 한국인보다 한국미술에 정통한 학자다. 그가 쓴 한국 근현대미술사는 외국인의 반응 보기를 즐기는 우리네 요즘 정서에 딱 부합하는 학술적 콘텐츠다. 그래서인지 이 저술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애초에 한국인이 아닌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입문서인 만큼, 학술적으로 깊게 들어가지는 않고, 전체 분량도 다루는 시기에 비하여 짧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흐름, 경향, 작가, 작품을 꽤나 적확하게 짚어낸다. 특히 서로 대립하는 관념들 사이에서 흠잡을 데 없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균형감은 저자의 학연 및 지연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전혀 동떨어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넓고 얕게 훑고 지나가는 개론서로서는 어지간한 한국인 저자가 쓴 것보다 낫다. 단순히 학문적 차별화를 위하여, 혹은 먹고 살기 위하여 한국미술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바탕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특징을 “정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근현대를 거치며 가장 많이 고민하고, 또 작품으로 빈번히 표현하는 주제들을 돌이켜보자면, 결국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유학파와 국내파, 미군정기의 좌익와 우익, 6.25 전쟁기의 남한과 북한, 군사 정권기의 모더니스트와 민중미술가 등과 같이 우리의 근현대사는 불과 10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극렬한 양극단의 대립이 유난히 잦았다. 그러한 대립은 외세가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방향을 설정해 줄 지도자를 상실한 국민으로서는 당연한 운명이었다. 권력자들은 극한의 대립을 통해 내부단속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잘 알았고, 그들에 의해 대립은 더욱 부추겨졌다. 예술가들도 시기마다 대립의 국면에서 어느 한 지점을 점유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의 대립이 여러 분파의 형성과 독자적 당위성 개발을 다그치는 역동적인 변화상으로 이어졌다. 또한, 권위주의 시대와 급격한 경제성장을 거쳐오며 집단과 개인의 가치충돌이 야기한 정체성의 혼란과 재정립에 관한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저자는 짧은 분량에도 각 대립의 양상을 균형감 있게 짚어내, 심화한 학습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고, 외부적 압력에 의하여 떠밀리다시피 현재에 정박한 우리에게 정체성이 중요한 화두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 당연함이 오히려 그 문제를 새삼스레 숙고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따금 만연한 무언가를 원점에서 숙고하기 위해서 낯선 시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사를 정리한 개론서이므로, 정체성의 문제를 부각할 뿐, 그것이 쟁점이 된 근원적 이유를 탐색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어떠한 삶의 굴곡을 겪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생산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토대가 제국주의적 수탈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음은 자명하고, 그런 토대에서 느끼기에 정체성 문제가 유난히도 빈번히, 그리고 첨예하게 부상하는 우리네 상황들이 분명 눈여겨 볼만한 낯선 대목이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타자의 시선에 눈을 돌려야 한다면, 그것은 국뽕을 맞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웅크리고 있는 우리의 첨예한 쟁점들을 수면 위로 견인하기 위함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