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900-2020」

정론 미술사 생성 기관의 책무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의 정론을 만드는 공식적 기관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기관은 가장 방대한 컬렉션, 가장 많은 인재, 가장 큰 규모의 투자를 앞세워 미술사 담론을 주도해 나간다. 국립 기관으로서 자국 미술사를 긴 호흡으로 직접 정리하겠다는 야심이 그동안 왜 없었겠느냐 만은, 2021년에야 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1969년 경복궁 미술관 개관 이후로는 52년 만이고, 과천관 개관 이후로는 35년 만이다. 늦은 감이 있다.

국립 기관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식화의 기능을 갖는다. 그러므로 국립 기관이 미술사를 직접 써내려 갈 때 감내해야만 하는 모종의 중압감이 수반된다. 역사란 유동적이어서 관점, 주체, 맥락,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고, 더군다나 미술사는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질적 평가가 반드시 결부된다. 이렇게 포괄적이고 두껍고 빳빳하고 호화로운 총천연색의 미술사 저술에 기관의 로고가 박혀서 매대에 꽂히는 순간부터 의미의 고정은 피할 길이 없고, 이 책의 범주를 벗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순식간에 주변화된다. 이러한 중압감을 잘 아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외부 저자를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한다. 총 34편의 원고 중에 윤범모 관장의 서문과 총 5편의 각 부 서문을 빼면 본문으로 간주할 수 있는 원고는 28편인데, 이 중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사(관)가 작성한 파트는 5편이다. 즉, 이 책의 82.1%는 외주로 채운 셈이다.

나도 이런 총서 작업을 해봤지만, 여러 전문가의 식견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숙제다. 차라리 내가 직접 모든 챕터를 쓰는 편이 낫겠다고 느낄 정도다. 지식인들이란 방향성을 정해줘도 절대 그대로 가지 않는다. 일관된 방향성에서 자꾸 이탈하려는 사람도 있고, 너무 무색무취한 사람도 있다. 기본적으로 총서라는 표지를 나눠 가졌으면 어느 정도 톤을 맞춰야 하는데, 그 톤에 대한 각자의 인식조차 제각각이다. 중복의 문제도 있다. 서로 주제를 나눠서 작성하더라도 각 주제가 포괄하는 작가 및 작품의 범위가 넓으므로 다른 저자와 필연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조율할지도 간사의 숙제가 된다. 아마 각 부의 서문을 쓴 학예사(관)가 그런 간사의 역할을 맡았을 텐데, 대단히 어려운 과업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물론 무언가를 어렵게 했다는 것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외주의 비중이 너무 높다. 전체를 아우르는 소수 저자(혹은 단일 책임자)의 서술 속에 전문가들의 지식이 끼어들어 간 형태가 아니라 대체로 많은 부분을 위임한 느낌이다. 휘트니미술관이 「The American Century」 프로젝트에서 선보였던 방법과는 일견 비슷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도 여러 저자가 참여했지만, 기본적으로 굵직한 방향성은 리사 필립스(Lisa Phillips)가 잡아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주화는 전문가의 전문성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표면적 장점을 앞세우기에 좋은 전략이지만, 미술사의 권력기관이 그것을 채택할 때 논란과 책임을 회피하는 기능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먼저 나온다. 각 부의 서문이 해당 시대를 포괄하려고 시도하나, 전체를 아우르는 굵직한 흐름은 잡기가 어렵고, 원고들이 시대의 느슨한 범주 안에서 툭툭 튀는 느낌을 준다. 예컨대 최범은 민족주의자적 주관을 너무 많이 개입한, 그리고 공예의 일탈과 제자리에 관하여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으로 점철된 글을 제출했다. 신정훈은 상당히 감성적 해석이 두드러진 접근을 선보였다. 우정아는 근래에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를 다뤘는데, 아마 2022년 10월에 출간한 자기 저술(「한국미술의 개념적 전환과 동시대성의 기원」)의 요약본이자 예고편이 아닐까 싶다(이 책을 안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주제와 주로 언급되는 작가가 겹친다).

대체로 개별 원고들은 정해진 시대와 주제 안에서 최대한 많은 작가를 ‘정론역사’의 울타리에 포섭하기 위하여 매우 숨 가쁘게 달려간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미술사 저술 작업에서 일말의 섭섭함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그 배려가 되려 독으로 다가온다. 출석부처럼 작가 이름을 나열하는 대목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 이건 읽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이 아닌 그저 소장용 참고자료, 혹은 서재의 품격을 높여주는 값비싼 오브제로구나’라는 한계만 도드라지게 된다. 그나마 송수정의 현대사진에 대한 접근이 좋았던 이유도 다름 아닌 숨 가쁘지 않아서였다. 이는 사진작가의 풀이 다른 주류 장르에 비하여 훨씬 제한적이어서 역설적으로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덧붙여, 송수정은 현대사진의 변화 양상에 있어서 대표작가들의 다양성에 집중하면서 과도한 맥락화는 최소화하는데, 이러한 접근 또한 다른 원고와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 자체의 권위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이다. 다루고 있는 대부분 작가는 미술관이 한 번이라도 소장했거나, 전시했거나, 상을 준 작가이다. 실린 도판도 60% 이상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품이나 아카이브인 듯하다. 물론 저자들에게 저술 편의를 위해 미술관 아카이브를 개방했을 것이고, 저작권 문제도 걸려 있으니 실무적으로도 미술관 자체 자료가 많이 인용되는 것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실무적인 이유만으로 어떤 대상이 과도하게 신화화된다면 그것은 제도가 역사에 부당하게 개입 내지는 매개한 사례가 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스쳐 지나가지 않았거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든 미적 활동들이 역사의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해석을 일으킬 수 있다면 차라리 서두 어딘가에서 그 한계를 당당하게 밝혀 두는 것이 좋다. 예컨대, “이 저술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연관 작가와 작품이 많이 소개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의 전부는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을 집어 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다. 오히려 한 권의 책만으로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를 꿰어 내 보고 싶은 욕심 많은 (그리고 지갑도 두툼한) 비전문가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진솔함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론 미술사를 생성하는 공적 기관의 책무다.

(8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마감한다.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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