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분노사회에 살고 있고, 우리의 이웃은 절대 선하지 않다. 아니, 그가 선한지 악한지 알 수가 없다. 나와 눈을 마주친 저 사람이 나처럼 선하고 적의 없는 마음이길 바라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만, 정말 그러하다고 확신할 방법은 없다. 완벽한 불가지의 영역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고, 그렇다면 나 이외에 모든 사람은 일단 악인의 서랍장 속에 넣어두는 것이 옳다. 외관에 속지 말자. 보편적 관습에도 속지 말자. 내 행동방식을 기반으로 타인을 예측하지 말자. 지금까지 별일 없었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를 악인의 서랍장에서 꺼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에 걸친 검증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인의 정’ 같은 근거 없는 수사에 흔들려선 안 된다. 일단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분열, 융기, 침입, 병합된 불특정 다수로서 한국인의 정체성 자체가 의심스럽다. 정이라는 호혜적 관념은 더욱 의심스럽고 무책임하다. 이처럼 모호한 두 개념이 병합된 한국인의 정이라는 신화는 더더욱 의심스럽다. 이러한 관념을 설파하면서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국민이 위임한 통치 권한의 반대급부로서 권력기관이 응당 제공해야 할 복지 서비스의 비정형적이고도 정서적인 말단사무를 국민 개개인에게 은연중에 재위탁하기 위해 퍼뜨린 관념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한국인의 정이 또 다른 정으로 되돌아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의 ROI(Return on Investment)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성장엔진의 RPM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들, 또는 완전히 다른 동력원에 기대 살아가기를 결정한 사람들이 단일한 가치기준으로 빈틈없이 재단된 이 세계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체념하여 광야를 떠돌며 ‘정원 외’로 분류되고 있다. 비정한 비약이지만 그들이 죽을 때까지 ‘정원 외’ 취급에 만족해 준다면 공동체 차원에서는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특별히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그들 개인의 비극을 우리가 잠시 못 본 척 지나친다면, 세상은 별일 없이 또 내일의 태양을 맞이할 테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분노에 절여져 시한폭탄이 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선량한 ‘정원 외’도 사소한 계기 하나만 만나면 얼마든지 그날로 시한폭탄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그들의 분노를 받아서 양(+)의 에너지로 전환해줄 그 어떤 제도적 통로도 부재하다. 정원 외나 시한폭탄들은 조직적인 힘은커녕 가느다란 소통의 통로조차 없고, 진지하게 들어줄 멀쩡한 귀때기 하나도 찾기 힘들다.
SNS와 알고리즘과 저널리즘과 정치인들이 날마다 부추기는 사상적 양극화 양상은 그 분노의 화염에 되레 기름을 붓고 있다. 어떠한 자극을 투입하든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응수하며 도파민의 역치를 계속 끌어올리고 있는 스마트폰 중심의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초고속 성장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동안 가뜩이나 말라붙어버린 관용과 인내의 샘을 마침내 완전히 고갈시켜버릴 모양새다. 더 나빠질 경우의 수는 훤히 보이는데,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할 독립변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빠질 경우의 수를 하나만 들어 볼까?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법체계가 가해자를 엄벌하지 않아서, 형량이 충분하지 않아서 분노범죄가 끊이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형량이 거지 같은 것은 맞다. 하지만 형량을 생각하면서 악행의 실행 여부 및 수위를 조절했다면 이미 분노범죄가 아니다. 분노의 시한폭탄이 형량을 생각하는 순간은 이미 손에 쥔 칼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질 때다. 이 나라의 사법기구가 감싸줘야 할 존엄하신 요인들이 워낙 득실득실한 까닭에, 그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더라도 현존하는 판례의 틀을 뒤흔드는 획기적인 형량의 증대는 불가능하지만, 그러한 혁신이 설령 단행되더라도 분노범죄의 유의미한 감소는 없을 것이다. 대신 수감 공간의 증설을 위한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사회적 분노의 총량만 유의미하게 증가할 것이다. 엄벌의 강화를 주장하는 논객이라면 자신의 논고 앞에 “이 주장은 우리 집 앞에 교도소 신설을 용인한다는 전제하에 전개되었습니다.”라는 주석을 의무적으로 달아야 한다(아울러 그 논객의 거주형태는 ‘자가’여야 한다).
어디서 어렵사리 긁어모은 부스러기 미담을 인용하며 ‘이걸 봐요,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하잖아요’라고 자위하지 말자. 그렇게 지엽적인 사례에 눈이 멀어 냉엄한 현실을 외면하게 되면 더 큰 위험에 발을 들일 수 있다. 미담은 미담의 유토피아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계속 물을 주되,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점을 계속 상기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자. 이 세상을 변화시키든, 순응하든, 되려 악화시키든 하여튼 뭐라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분노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그 어떤 몽환적 신화와도 절연해야 한다.
아래는 내가 숱한 시사/교양/다큐/뉴스를 시청하며 이른바 방구석 프로파일러로 재직하는 동안 얻은 몇 가지 교훈이자 실천적 지침이다. 어차피 시한폭탄의 제조나 설치를 막을 방법은 없다. 늘 이런 식의 결론으로 귀결되어 무척이나 유감이지만, 이건 정말이지 ‘구조적인 문제다.’ 우리 선량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대의 자본, 문화, 권력의 축을 어떻게 붙잡아 돌려놓겠는가? 돌려놓은들 거기엔 악이 없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잠재적 피해자가 한 사람이라도 덜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저 조심하라고 힘 빠진 말 한마디 건네는 것뿐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화가 가능한 대상, 변화할 수 있는 대상이 피해자뿐인데 어쩌겠는가.
첫째,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다면 우선 그 사람의 가방이나 품속에 칼이 있다고 상상하자. 특히나 그 사람의 어떤 반사회적 행동을 교정하고 싶다면 이 생각을 더더욱 유념하자.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하고 예쁘고 잘생겨 보여도 이미 살해 전과가 하나쯤 있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하는 말이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그 개입적 행동으로 인하여 죽거나 다친다면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 ‘옳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 옳음이라는 주체 혹은 타자의 평가가 나의 실존적 고통을 상쇄해주지 않는다. 만에 하나, 방관자라는 비난이 두려워 누군가의 반사회적 행동에 개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면? 정 그렇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을 지면 된다.
둘째, 낯선 누군가와 어쩔 수 없이 교류해야 할 상황이 생기더라도 상대방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시공간으로 걸어 들어가지는 말자. 중고거래를 하더라도 내가 정한 제삼지대나 내가 익히 알고 있지만, 상대는 나에 대해 유추할 수 없는 곳을 택하자. 내가 언제든 주도권을 쥘 수 있고, 내 편이 가까운 곳에 있고, 지형지물이 익숙한 곳을 택하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상대방의 차나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는 안 된다. 갈등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더욱 안 된다. 나는 상대방의 집에 어떤 무기나 방패가 있는지를 모르지 않나?
셋째, 품성이 고운 사람과 연애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생명체에 폭력성을 보이는 사람과는 조기에 인연을 끊어야 한다. 특히 연인 후보자의 열등감을 눈여겨보라.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어떤 면에서든 열등감이 있을 수 있다. 그건 정상이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에 열등감을 느끼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원인을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외부 세계에 계속 돌리면서 사회 불특정 다수에 피해망상을 보이는 인물이라면 연인으로서 절대적으로 부적절하다. 그런 사람을 만났고 조기에 징후를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돼, 나만이 이 사람을 치유해줄 수 있고 어둠 속에서 구원해줄 수 있어.’라는 ‘구세주론’에 사로잡힌 순수한 영혼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처럼 구원자로서의 욕망이 있다면 그냥 유니세프 활동가가 되자. 연애의 세계에서는 그것보다 위험한 생각도 없다. 그럴리도 없지만, 정말로 그 사람이 당신 아니면 안 된다고 가정하자. 정녕 그렇다면 당신이 떠나야만 하는 날, 그 사람이 어떻게 돌변할지 눈에 훤히 보이지 않나?
넷째, SNS를 줄이자. 내 정보는 최소로 노출하고, 적의 정보는 최대로 얻는다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나는 최소로 노출한 것 같지만 과거에 이미 노출한 것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면 온전한 하나가 된다. 가령 내가 자취방 인테리어를 자랑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인천공항에서 출국한다고 인증사진을 올린다? 그럼 내 자취방은 오늘로부터 최소 3일 이상 비어 있다고 전 국민에게 공지한 셈이다. 여행인증 자체도 이미 여행을 꿈도 못 꾸는 누군가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감정이 누군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내 팔로워들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상관없다? 친하니까 잘 안다는 가정만큼 오만한 추정도 없다. 잘 보이느라 자기검열하는 것도 충분히 피곤한데, 거기에 더해 상시 누군가의 분노를 유발하지 않을까 자기검열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참으로 피곤하다. 그러니 SNS는 안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섯째, ‘이렇게 맨날 경계하면서 살면 세상이 너무 각박하지 않나요, 너무 비정하지 않나요, 피곤하지 않나요?’라는 생각 자체를 버린다. 일단 살고 봐야 피로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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