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의 「까다로운 대상: 2000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비평은 싫다고 말할 권리를 갖는가?

조금은 무책임한 제목이다. 저자는 나름대로 오랜 시간 한국 동시대 미술의 현장에서 여러 인물, 작품, 현상을 두루 살펴보고 해체한 후 이것을 ‘까다로운 대상’이라 명명했다. 최고급 사치품에서부터 시민운동에 가까운 처절한 몸부림까지─, 한계 없는 다원주의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동시대 미술계를 생각할 때, 이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주제나 내용 면에서 일정한 결을 정하여 맥락화했다면, 그 주제에 부합하는 최소한의 구체적 틀짓기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10여 년간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들을 아주 큰 줄기(physics와 meta-physics)로만 나눠 재구성했다. 이 글들에는 애초에 일관된 주제가 없다. 매우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아울러 엮어 놓고 보니 달리 명명할 방도가 마땅찮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개념적 우산도 씌우지 않자니 비평가적 야망이나 책무가 도드라지지 않고 민숭민숭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숙고 끝에 내세운 표제가 ‘까다로운 대상’이다. 저자는 이 책에 포함된 32명의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기본적이면서 넓고 다양하며, 가변적이고 복합적이기에(10p)” 그렇게 부른다고 부연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애초에 비평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 아닌가.

까다로운 대상을 명쾌하게 밝혀 달라고 이 시대가 비평을 소환하고 있는데(물론, 여기서 소환이라는 감각은 실제 대중과는 거의 무관한, 비평가와 작가들만 그렇게 느끼는 초현실적 망상에 가깝다), 그 무대에 올라서 한다는 소리가 ‘네, 그들은 까다로운 대상입니다.’라는 정도라면 김빠진다. 현실적 구체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physics로 묶고, 현실 너머의 관념 세계에 가까운 작품들을 meta-physics로 묶는 방식도 동시대 미술의 경향과 현상을 첨예하게 맥락화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최대한 많은 글에 별다른 논쟁거리를 야기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칸막이를 부여하려다 보니 누구라도 쓸 수 있을 법한 매우 큰 우산 두 개를 씌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덧 중견 글쟁이라는 문턱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앤솔로지 한 권쯤 남기고 싶은 욕망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쟁점화 정도는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저자의 비평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이원화된 두 관념을 제시하면서 비평 대상이 그 경계를 흩트리거나 무너뜨리면서 외연을 확장케 한다는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 상충하는 두 개념이 아이러니하게 공존하고 있는데, 그래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이면서 가상적이고,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존재이면서 부재이고, 사적이면서 정치적이라는 식이다. 그럼으로써 의미의 층위가 복잡해지고 두터워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좋은 지적이다. 나도 이런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데 공감하지만, 사실 이런 표현은 잘 안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충돌하는 두 개념을 한 문장에 써서 ‘뭔가 있어 보이게’ 하지 말라는 길다 윌리엄스(Gilda Williams)의 지적을 읽고 나서부터는… (일명 ‘예티_yeti’)

또 다른 특징으로는 자신이 하는 말이 작가나 작품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들릴까 봐 대단히 경계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일단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서술이 등장하고 나면 ‘내가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으나, 오히려 그 반대다.’라는 식의 서술이 곧장 뒤따른다. 마치 이 책에서 작품에 대한 부정적 평가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하다. 실제로 483페이지의 이 책에서 어떤 작가나 작품을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은 단 한 줄도 없다. 왜일까? 여기 실린 32명의 작가가 내놓은 결과물은 진정 무결한가? 작가의 모든 의도가 성취되었나? 그렇지 않더라도, 혹여 어디선가 미끄러졌더라도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가 있나? 더 나아질 여지는 없었나? 오늘날 궁극의 다원주의 시대에는 모든 행위와 표상이 다 나름의 의미가 있으므로 비평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좋은 점을 발견해야 하고, 또 그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나?

해묵은 ‘주례사 비평’ 담론을 차치하고, 비평가가 좋은 말만 하게 되는 삶의 조건들이 분명 존재한다. 가령, 어떤 글을 자발적으로 쓰고 싶어 쓴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청탁(≒돈)을 받았다. 청탁을 받으면서 비평 대상과 관계를 맺었다. 비평 대상과 원래부터 아는 사이다. 혹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다. 현재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 글을 쓰고 나면 아는 사람이 될 것 같다. 뭐라도 지적하게 되면 다원주의의 원칙에 어긋날 것 같다. 계속 지적만 하다가는 결국에 아무도 안 불러 줄 것 같다. 작가가 이거 만드느라고 고생했는데 내가 뭐라고 지적할까. 등등등. 비평에 부정적 평가가 실릴 수 없는 까닭의 기저에는 당연히 생활인으로서의 숙명이 도사리고 있다. 예술이 삶보다 위에 있지 않을진대, 하물며 비평이 어찌 삶보다 중할 수 있겠는가.

이런 비평의 제도적 토대는 인정하지만, 이것이 비평의 모든 가능성이라고 생각하느냐면 또 그건 아니다. 꼴 보기 싫은 무언가에 대해서 꼴 보기 싫다고 말할 권리가 비평에 주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꼴 보기 싫은 이유를 정확히 논증해내고, 그 논증으로 청중을 설득해 내는 것이 비평가의 책무일 따름이다. “비평의 직무는 논증을 해내는 것이지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앤디 그런버그_Andy Grundberg).”라는 말의 요체는 판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논증하라는 것이다. 성실한 논증을 힘입은 판단은 무턱대고 의사봉을 휘두르는 설익은 판결과는 다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비평, 작품의 심층을 파고들어 진리성분을 구해내는 비평, 성실한 논증과 예리한 판단과 아름다운 텍스트가 삼위일체로 융합된 비평─, 그런 비평이 쏟아져 나온들 걷잡을 수 없는 숙명으로 다가오는 비평의 위기가 단박에 종식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종국의 파멸만큼은 지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제도권에 그러한 비평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비평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직업 비평가들에게만 강요하며 관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할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면, 이제는 제도권 밖의 비정규군이 게릴라전에 나서야 한다.

***

저자는 후기에서 미대 졸업 후 화가의 길을 걷다 비평가로 넘어간 사연을 짤막하게 소개하며, 자기 자신을 ‘실패한 화가’로 규정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실상 모든 비평가의 내면에는 ‘실패한 화가’, ‘실패한 작가’, ‘실패한 감독’ 따위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는 내재해 있으리라고 본다. 무언가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가지려 들거나 직접 만들려고 드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갖지도 만들지도 못하는 누군가는 그 생산의 언저리를 맴돌며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자라도 되기로 마음먹곤 한다.

나도 어느 정도는 실패한 화가로서, 그리고 실패한 작가로서, 이중의 실패자라는 정체성을 동력 삼아 이렇게 아무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않을 글을 쓰고 또 고쳐가며 지고한 시간을 쌓아간다.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 내 정체성을 재규정할 수 있을 분기점에 도달하리라 믿으며 뚜벅뚜벅 걸어간다. 10여 년간 쌓아온 글을 책으로 엮어 내보일 수 있었던 저자의 끈기, 수고, 담력, 체력, 기회, 인연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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