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 Foster, What Comes After Farce?: Art and Criticism at a Time of Debacle
백전노장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며,
고백하자면 나는 부끄럽게도 ‘소극’이라는 말도, ‘결괴’라는 말도 처음 들어 봤다. 그러니까 책 제목에서 핵심이 되는 두 단어의 뜻도 제대로 모른 채 저자의 이름만 보고 이 책을 집어 든 셈이다. 물론 그 선택 자체는 옳았다. 칠순을 바라보는 포스터의 날카로운 식견과 박식함, 그리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진솔함은 구태여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활자를 뚫고 흘러나온다. 어쩌면 그는 이 시대의 멸종 위기종이라 할 수 있는 낭만적 비평가상을 보여주는 마지막 인물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소극’, 그리고 ‘결괴’라는 단어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러려면 일단 비극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진 화두의 논리적 흐름이 ‘비극, 소극, 그리고 결괴의 시대에 우리가 맞이할 무언가’인데, 제목의 간결성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너무나 상식적인 전제여서 그런 것인지, 비극이라는 단어 자체는 제목에서 생략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일종의 거짓말 같은 현실이다. 길고 어둡고 음습한 역사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새 희망의 낙원으로 들어서려던 그 순간, 또다시 시대착오적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을 우리는 비극이라고 부른다. 비극은 거짓 유토피아다. 압제자의 논리는 온갖 이상향을 두른 채 모습을 드러내지만, 초라한 현실 앞에 논리적 모순은 도드라지고 실존적 고통은 배가된다. 시민들이 절대왕정을 부수고자 대리자로 소환한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쓰던 그 순간이 바로 비극의 예시다.
비극 후에 찾아오는 소극(笑劇, farce)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는 현실이다. 비극의 시대에는 믿기 어려웠을지언정 그래도 최소한의 논리는 있었다. 반면 소극의 시대는 오직 헛소리로만 가득하다. 권력의 논리는 이미 밑바닥까지 간파되어 너덜너덜하게 찢긴 후인데, 그것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겠다고 용을 쓰다 보니 거적때기만 남은 상태다. 외형은 이전의 비극을 닮았으되, 현실은 더 참담한 시궁창에 처박혀 있으니 헛웃음만 날 수밖에. 거짓말에는 진실을 앞세워 수치를 줄 수 있지만, 근원부터 썩어빠진 개소리라면 그 어떤 고결한 진실의 칼날을 들이댄대도 수치를 줄 수 없다(7p). 나폴레옹이 비극의 상징이었다면, 마지막 세습군주 나폴레옹 3세는 소극의 화신이다.
비극과 소극을 연이어 거친 후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국면이 결괴(debacle)다. 사전에서 결괴는 총체적 실패(complete failure)로 정의된다. 그야말로 큰 낭패를 의미한다. 죽은 줄 알았던 황제가 무덤에서 돌아와 관을 쓰고 진군을 명하는 것,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 허울뿐인 제국의 승리를 위해 무수한 청년이 다시금 전장으로 끌려 나오는 것이 결괴다.
저자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동시대 미국의 정치와 예술에서, 부시정권은 비극에, 트럼피즘은 소극에 연결된다. 트럼프 같은 관심종자가 세계 제일 제국의 행정부 수반이 되었다는 것, 다시금 권좌를 노리고 있으며 심지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를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 그야말로 소극이다. 이 소극이 우리가 속한 이 작은 나라의 명운까지도 좌우한다는 것은 웃다가 울 일이다.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부터 최근의 트럼피즘까지, 그가 속한 나라의 사회정치적 변화상에 주목하며 예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했다. 비극, 소극, 이어서 결괴가 찾아온다는 전망은 굳건하지만, 이것이 허무주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은 날카롭게 살아 있다. 특유의 박식함과 단단한 논리는 여전한 가운데 숱한 저술과 기획을 거친 백전노장의 내공은 더욱 단단해졌다. 이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이 비평가는 이론에 숨어 빙빙 말 돌리는 법 없이 직설적이고 명쾌하게 자기주장의 작두를 탄다. 예술, 정치, 문학, 철학을 종횡무진 아우르며 짧은 글에 오롯이 진정성을 담았다. 스스로 좌파 정체성을 당당히 내세우며 좌파적 작품과 우파적 작품(혹은 의도와 달리 우파에게 전유된 작품)을 나란히 교차한다. 결괴의 세상에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묻고자 18편의 짧은 글을 동원한 것이다.

***
1부 ‘테러와 위반’에서는 9.11테러로부터 트럼피즘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미국 정치의 몰락 가운데 펼쳐졌던 미학적 현상들을 다뤘다. 국가적 재난에 대해 예술가들은 나름의 해석과 표현으로 미적 결과물을 내놓기 마련인데, 이렇게 외상을 심미화하는 것이 미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1. 외상의 흔적). 외상을 기억하면서 실천적 방향성이 노정된다면 좋겠지만, 반대로 이미지가 성상화된다면 역사적 사건이 일종의 신학적 사건으로 성역화될 수도 있다. 이렇게 성상화된 이미지가 의도치 않게 전체주의 및 국가주의와 맞물릴 때 도화선에 떨어진 작은 불씨처럼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의 흐름이 통제를 벗어나 국경을 넘나들기도 한다. 이미지에는 힘이 있고, 그 힘은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기 마련이다. “오늘날 미술 관람에 널리 퍼져 있는 방식은 정동적 방식이다(23p).” 작품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전시의 맥락에 따라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의미를 실시간으로 만들어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관건은 그 정동의 힘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가져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미지가 누군가에게 무기가 될 수 있음은 부시 시대의 보수 기독교 이미지들에 대한 고찰에서 더욱 강조된다(2. 부시 시대의 키치, 3. 편집증적 양식). 키치적 개신교 도상은 9.11 테러 이후 유난히 활발하게 파급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학력 수준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직관적이며, 선과 악이 분명히 드러나고, 종국에 신이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형제애와 단일대오를 강조하는 키치적 이미지는 전체주의의 허점을 가리는 장치로 종종 등장하였다. “전체주의적 키치의 영역에서는 모든 답변이 미리 주어져 있고 어떤 질문도 불가능하다(28p, 밀란 쿤데라).” 9.11 테러 이후로는 이러한 키치가 이른바 성전에 논리적 명분을 제공하는 유용한 선전도구로 인식되면서 신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28p). 기독교와 헌법의 결합은 신성불가침의 국가주의 논리를 만들어 낸다(31p). 키치의 공식을 따라 분노를 유발하고, 누군가를 적으로 돌려세우는 일은 쉽고, 또 유용하다. 하지만 미술과 비평은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사안을 복잡하게 만들고 질문거리를 생산해내야 한다.
저자는 이어서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생각한다(4. 거친 것들). 오늘날 우리를 안전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법이나 인권의 가치는 그것이 없었던 폭력의 상황을 거치며 개발되었다. 법치주의 이전의 최상위 지배자는 폭력과 법이 구분되지 않는 위치에 있었고, 이러한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고찰은 그야말로 폭력이 만연했던 시대에 주로 행해졌다. 홉스(Thomas Hobbes), 루소(Jean-Jacques Rousseau), 벤야민(Walter Benjamin), 데리다(Jacques Derrida) 등이 선보인 권력과 폭력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당대의 폭력성 속에서 태어났으며, 오늘날 법, 정치, 인권의 담론에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담론이 오늘날 우리의 안전과 평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역사의 궤적을 아울러 본다면 평균적으로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지금이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폭력의 시대라고 본다면, 이는 새로운 조건을 상상하기 좋은 시대라는 의미도 된다. 이러한 가능성의 전제 위에 저자는 그다음 글(5. 트럼프 아빠)을 통해 이 책의 전체 주제와 같은 강력한 제언 한 마디를 중간에 불쑥 던져 놓는다. “파괴적인 비상사태를 구조 변화의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60p).
***
1부가 동시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작품을 소환했다면, 2부 ‘금권정치와 전시’에서는 미술제도와 미술계 자체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제프 쿤스(Jeff Koons)는 자기 작품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정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보는 것은 이 시대의 불가결한 계급 구조에 단단히 얽매여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7. 신이 된 물신). 기꺼이 제품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아이코닉한 예술가(83p), 그런 예술가의 낭만적 일면을 소유하려 얼마가 됐든 간에 지갑을 여는 컬렉터, 그리고 그 둘의 공모를 보여 혀를 끌끌 차는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신자유주의의 고공비행을 돕는 삼각동맹을 형성한다.
이러한 현상은 새삼스럽지가 않다. 이미 뒤샹(Marcel Duchamp)이, 현대미술의 원형을 만든 그 신화적 인물이 제도비판 자체가 제도의 신화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8. 아름다운 숨결). 그는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썩어빠진 당대 주류 미술계(와 그 뒷배가 되어준 자본가들)를 비판하고자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똥물을 끼얹었지만, 시간이 흘러 그 똥물은 또 다른 신화가 되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아우라를 덧입고 성좌에 올랐다. 뒤샹은 트로이 목마를 보냈지만, 사람들은 그 목마 안에 들어찬 군사들의 전투력은 금세 잊었고, 목마의 외형만 놓고 찬사를 보내는 형국이 되었다(87p).
그렇다면 동시대 (좌파) 예술가들의 과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9. 인간의 파업)? 예술가는 이 썩어 문드러진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안적 길라잡이가 되어 이 체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 생명력을 일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앵무새처럼 반복하듯, 우리는 이 체제 위에 태어나 숨 쉬고 살아왔기에 다른 체제를 상상할 수 없다. 포스터가 아감벤(Giorgio Agamben)을 인용해 들려주는 대안 하나는, 이 체제의 무기 하나를 체제의 심장부에 돌려주자는 것이다. “스펙터클은 스펙터클에 맞서 사용될 수 있는 긍정적 가능성 같은 것을 보유하고 있다(95p, 조르조 아감벤).” 우리를 쥐고 휘둘렀던 스펙터클을 탈환해 그것을 무기 삼아, 우리 주체성이 상품으로 치환되는 것을 막거나 지연하고, 획일화에 저항하고, 권력의 촘촘한 규율망에서 이탈한 언캐니한 무언가가 되자는 것이다. “왠지 어중간하지만 또한 삐딱하기 때문에 현상 유지를 위협하기도 하는 피조물(95p)”이 되거나, 그러한 존재를 촉진하는 예술이 대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대목은 저자가 예술계에 보내는 가장 직설적인 메시지이고, 좌파 체제를 가장 선명히 옹호하는 대목이며, 어쩌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혁명의 가능성을 천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포스터는 아직 혁명의 가능성을 믿는 것일까?
저자가 전시를 다루는 방식은 작품 및 작가를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10. 전시주의자). 여기서는 주로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의 큐레토리얼 특성과 한계에 대해 논하는데, 수많은 스타 큐레이터 중에서도 특별히 오브리스트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동시대 작가적 큐레이팅의 정점에 서 있는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브리스트는 그의 직속 선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에 이어 큐레이팅 자체를 일종의 복합 개념미술 반열에 올린 인물이고, 큐레이팅의 역사 서술을 위해 방대한 아카이브를 조직하고 있는 인물이며, 동시대 미술계의 사건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 신출귀몰하며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그동안 해왔듯 앞으로도 미술계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는 포스터도 역시 품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려도 감추지 않는데, 가장 큰 우려는 오브리스트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근거를 둔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최루탄 냄새 한번 못 맡아본 오브리스트가 제아무리 왕성하게 혁신을 거듭한다고 할지라도 과연 오늘날 견고한 체제의 심급 자체를 건드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핼-꼰대-포스터’의 우려인 것이다(112p). 오브리스트가 큐레이팅의 역사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내고 있지만, 태생적 한계에 갇혀 있는 그의 끊임없는 다작 자체가 필연적 망각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미술계 선배의 우려가 기우이기를 바란다(113p).
큐레이팅의 신화적 인물을 다루고나서 미술관 개념의 변천에 대한 짧은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순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11. 그레이 박스). 벽에 고정된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가치중립적 집중에 특화되었던 ‘화이트 큐브’, 영화와 비디오가 주류가 된 뉴미디어 시대에 특화된 ‘블랙박스’, 그리고 비정형이 극에 도달한 퍼포먼스까지 아우르려는 ‘그레이 박스’ 모델을 거쳐, 너무나 많은 기대의 사슬에 뒤엉켜 버린 동시대 미술관은 이제 어느 한 방향으로 확고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오늘날 미술관은 경험 아니면 해석 중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압력에 놓여 있지만(118p), 그 양자에 모두 집중하려다가는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대안은 경험과 해석 모두를 아우르는 주의 깊은 배치이지만(119p), 이것은 그저 비전 진술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현장에서, 진실한 눈을 통해서만 내려질 것이다. 포스터가 특히 주의를 당부하는 최근의 미술관 모델은 대도시 근교에 급증하고 있는 부호가 설립한 사립 미술관들이다. 이들 미술관은 하나같이 부호의 이름을 한 발짝 뒤에 감춘 채, 마치 공공 미술관인 듯 공공성을 은연중에 표방하는 전략으로 위세를 키우지만, 결국 최종 심급에서는 부호의 명망을 영속화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호가 고용한 가장 진보적인 건축가와 미술가마저도 고용주를 떠받들기 위해 결탁한다는 점에서는 의심스럽기 마찬가지다. 미술관과 거기 속한 작품을 즐기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유무형이 인프라가 무엇에 복무하고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2부의 마지막 글에서는 케리 제임스 마셜(Kerry James Marshall)의 작품세계를 다룬다(12. 바탕칠). 평생 미술사와 현장 비평을 접목하며 글을 써서 먹고 살아온 분답게 한 작가의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을 밝히는 일에 있어서 저자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글이다. 진정 멋진 작품론/작가론은 한 작품의 테두리나 작가의 생애를 관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차원의 역사와 정치를 아울러 작품의 위치를 노정하는데, 이 글은 그러한 작가론의 훌륭한 예시다.
***
3부 ‘매체와 픽션’에서는 뉴미디어 시대의 예술과 비평을 다루었다. 여기 모인 모든 비평은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 번째 글, 윌리엄 개디스(William Gaddis)의 너무 앞서나간 문학적 실험에 대한 독해는 저자의 박식함이 얼마나 폭넓은 테두리에 걸쳐져 있는지 증명한다(13. 자동피아노).
이어지는 세 개의 글에서는 각각 하룬 파로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트레버 파글렌(Trevor Paglen)의 미디어 아트를 훑고 지나가는데(14. 로봇의 눈, 15. 박살 난 스크린, 16. 기계 이미지), 어떤 의미에서는 연령순으로 배치된 이 글들이 동시대 실천적 미디어 아트의 계보학처럼 읽히기도 한다.
오늘날 세계는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고, 그 매개의 토대가 되는 것은 실질적 혹은 은유적 의미에서 전쟁이다(163p). 과거에는 사람을 위해 이미지가 생산되었지만, 이제는 기계를 위해 이미지가 생성되며, 인간은 그러한 이미지 생산 및 유통 기술의 체계에서 최종적으로 보는 주체가 아닌, 효율적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잦다. 현장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보존하려는 움직임은 전쟁 혹은 파괴의 상황과 긴밀히 연결될 때가 많고(164p), 우리는 그러한 기술적 저의들을 알지 못하면서 동조하거나 협조하게 된다. 이것이 기계 이미지의 시대다. 기계 이미지란 “이미지들의 대다수가 기계들이 다른 기계들을 위해 생산하는 것이고 이 고리에서 인간은 제외되어 있는 문화(188p)”를 일컫는다. 기계가 기계를 위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시대에 주목하는 예술가들은 드러난 이미지의 이면이나 아예 드러나지 않고 기술 네트워크 안에서만 유동하는 이미지에 주목하고, 그 저의를 만천하에 까발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미지와 이해 사이의 균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고(166p), 심지어 시각 미디어가 전쟁에 공감하는 감정이입을 널리 퍼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172p). “풍경은 폭력 행위, 그러니까 강탈, 재난, 죽음을 일으키는 행위를 숨기는 가면일 때가 많다(191p).” 하룬 파로키를 다룬 글에서, 저자는 “파로키의 파르티잔 작업이 사라지도록 놔두는 것은 막아야 한다”라며 유례없이 직설적인 어조로 글을 맺는데(174p), 이처럼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비평가의 사명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앞서 포스터의 주장 속에서 혁명주의자스러운 면모를 발견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런데 그가 슈타이얼을 다룬 대목에서는 혁명주의자의 또 다른 하위 정체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가속주의자’다. 슈타이얼은 노골적으로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 체제의 최첨단 기술을 가져와, 그 체제의 극단까지 도달한 무언가를 시청각적으로 구현해 보여준다. “마르크스부터 푸코까지, 좌파 진영에서 비판의 좌우명은 도전의 대상이 될 권력의 형태 자체에서 비판에 효과적인 지점을 찾는 것이었다(180p).” 그리고 그 지점을 찾았다면, 저항하는 대신 그 지점을 가속기에 집어넣는다. “나는 이 모순을 해결하고 싶지 않다, 나는 모순을 강화하고 싶다(180p, 히토 슈타이얼).” 폭발할 때까지 가속해 보겠다는 것인데, 결국 폭발은 예술가의 내면이나 작품에서 벌어지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을 보고, 듣고, 생각한 관객의 마음에서, 그리고 그 마음과 또 다른 마음이 서로 동화된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괴로 정의된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렇게 동화된 비판 의식이 있다면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포스터는 동료(아니, 대부분은 후배) 좌파 비평가들에게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 것을 다시금 당부한다. “우리는 지옥의 유황불 같은 우파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이런 때 좌파 비평가들의 어조는 왜 이렇게 종말론적이란 말인가(186p)?” 허나, 우리는 포스터에게 또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저기요, 당신은 경력도 마무리 단계고, 먹고 살 걱정도 덜 하시니까 그렇죠.’
기계 이미지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미지의 변화된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이미지의 목적은 재현이 아닌 활성화,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유효한 행위들로 바뀌었다(196p). 과거 유력한 인물의 초상화나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풍경화는 재현 그 자체로 주문자에 복무하면 그 일차적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이제 이미지는 자율주행, 포격, 물자보급, 여론조작 등을 위한 전 단계에 속한다. 기계가 기계를 위해 제공하는 이미지는 폭력적 결과로 쉽게 이어지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없고, 대신에 알고리즘의 의도에 따라 일종의 대리 생산자나 중간 유통단계로서 복무를 강요받는다. 이제 저항의 유일한 선택지는 기계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되는 것이다. 기계가 효율성, 예측가능성, 경로의존성으로 우리에게 복무를 강요한다면, 우리는 비효율성, 예측불가능성, 무작위 실험, 불합리로 맞서야 한다(199p). 주류 스펙터클에 대항해 언캐니한 스펙터클이 되자는 앞선 글(9. 인간의 파업)에서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고, 이것이 최근 포스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저항의 방법론임을 읽을 수 있다. 다만, 기계 이미지 시대의 언캐니한 데이터 교란자가 되려면, 우선 기계 이미지 시대에 부합하는 비평적 안목과 독해력을 갖춰야 한다(201p).
이어지는 마지막 두 글에서도 저항적 균열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신념이 엿보인다. 세라 제(Sarah Sze)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사물들의 예기치 못한 유기적 조합을 통해 오늘날 문명의 당위적 상태에 대해 생경한 의문을 품게 한다(17. 모형의 세계). 마지막 글에서는 프로토타입과 예측가능성에 대항해 균열을 통해 실재에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다룬다(18. 실재적 픽션). 이 논의를 통해 포스터가 결괴의 시대에 예술과 비평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시금 선명해진다. 예술가라면 “재현을 수단으로 해서 감춰진 현실을 재구성(225p)”해야 한다. 비평가라면 허무주의보다는 선량한 대안을 선택해야 한다(223p). 과업은 명확하나, 실행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No Day But Today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