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s Didi-Huberman, Peuples exposés, peuples figurants
이미지와 사유는 민중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문법적으로 ‘민중들’이라는 말은 없다. 민중, 대중, 국민 등 집합명사는 이미 집합을 가리키므로 복수형으로 쓸 수 없다. 저자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나 역자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도 이 책은 묵직하게 끝까지 ‘민중들’을 강조한다. 저자가 주인공으로 지목한 민중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역사적 거대서사의 주인공이 아닌, 시각문화의 변두리로 밀려난 존재들이다. 우리 같이 평범한 생활인이면서도 민중이라는 뭉툭한 단어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개별적 특수성의 영혼들이다. 역사가 온전히 기록하지 못한 이들을, 인간 혹은 민중이라는 개념 속에 희석되어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을 섬세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디디-위베르만은 일관되게 민중들(peuples)을 호명한다. 이 호명은 위태롭고 첨예한 복수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인간들 또는 민중들을 희생하고 이렇게 인간과 민중을 앞세울 수 있는 사회에 귀착되는 것은 사실은 비인간성 그 자체이다(35p).”
왜 민중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 시대의 주류 이미지에서 민중은 배제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 민중을 노출하는 방식은 과잉이거나 아니면 결핍이다(18p). 둘 다 정상은 아니다. 과잉의 예시는 KBS 「인간극장」이나 직업군으로서 경찰을 떠올리면 된다. 인간극장은 얼핏 평범해 보이나 자세히 뜯어 보면 비범한 사연을 지닌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다룬다. 그들은 외견상 평범한 인물상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그 구성과 나레이션의 세부 맥락에서는 공영방송이 국가주의 프로파간다에서 촉진해야 하는 이상적 가족상 및 생활상에 초점을 맞춰 규범화된 일면에 조명을 비추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다뤄지는 인물들의 휴머니즘, 가족주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의지, 그리고 어김없이 노을이나 꽃을 바라보며 하하호호 웃음과 함께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피날레의 상투적 구조는 그들에게 당초 시련과 아픔을 줬던 사회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눈을 가리게 만든다. 나레이터는 어떤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개인적 의지와 가족의 힘이 결합되면 결국 이겨낼 수 있다고 은연중에 종용한다. 시청자 아무개씨는 전날 밤에 뉴스나 시사 다큐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잠자리에 들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인간극장을 보며 ‘그래, 그래도 이 문제는 결국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 등 소규모 사적 공동체의 힘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겠지’라고 읊조리는 순화된 시민으로 거듭난다. 관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순화된 분노는 애초에 분노가 없었던 것보다는 낫다. 無분노는 별안간 무너지는 둑처럼 미지의 혁명적 위험 요소를 끌어안지만, 순화된 분노는 투명한 제도적 틀 안에서 지속적 관리의 가능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시사 다큐와 인간극장은 일몰-일출의 주기를 넘나들며 사회적 분노를 개인화/내면화시키는 무한의 피드백 루프를 형성한다.
직업군으로서 경찰이 과잉노출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그것이 왜 문제인가? 이 세상에는 실상 수천수만 종의 직업이 존재하나, 우리가 주류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이라고는 본래 거기서 노출됨이 업의 본질인 연예인이 아닌 이상 판사, 검사, 경찰, 변호사, 의사, 재벌밖에 없는 듯하다. 미디어 콘텐츠에서 극단적 내러티브를 보여주면서 시청자를 붙들어 매려면 누군가 죽거나 최소한 죽음의 문턱을 오가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범죄 관련 직업의 중요성이 과도하게 부풀려진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수 대비 경찰 인력 비율은 0.25%에 불과한데, 미디어 등장 빈도만 놓고 보자면 경찰은 전국민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매일 같이 범죄 불안을 촉진하는 데 혈안인 뉴스까지 더 하면 그 비중은 20%를 넘어갈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경찰관들에게 경찰 관련 드라마나 영화 중에서 무엇이 가장 현실적이고, 무엇이 가장 비현실적인지 질문하는 것조차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사실 그런 질문이 가능한 직업군 자체가 몇 없다. 미화원, 택배기사, 자동차 영업사원,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자를 대상으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기타 등등’ 직업이 일절 등장하지 않더라도 미디어 세상은 잘 돌아가고, 그러한 미디어가 우리 시지각에서 제2의 창으로 작용할 때, 실제 세상도 마치 그런 직업 없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민중들은 항상 사라질 위험에 노출된다(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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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민중 소멸 시대에 대응하여, 디디-위베르만은 민중들을 제대로 다룬 예술가의 작품을 치밀하게 훑어가며 민중들의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에 관해 예증한다. 책의 도입부터 2장까지는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이 주인공이다. 그는 수련의 출신으로, 자신이 다뤘던 환자와 몸담았던 병원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 기초해 인물의 얼굴을 찍었다. 불과 몇 초 전에 태어나 점액을 덕지덕지 묻힌 신생아로부터 세상사에 초탈해 작가의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바쟁이 사용한 프레임은 표준화되었으되, 그 프레임 안에 담긴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고유성으로 충만하다. 바쟁은 자신이 대면한 개개인을 인식하고 기억하기 위해 거의 의례에 가깝게 통제된 형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얼굴의 파토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하면서도 작가로서의 분석적 거리를 유지했다.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성과 개별적 고유성을, 그리고 한 존재를 현 상태에 이르게 한 역사적/물질적 조건을 고루 다뤘다. 이 모든 시각성을 찰나의 얼굴 이미지에 온전히 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바쟁은 디디-위베르만이 강조하는 ‘재몽타주’의 첫 번째 사례로서 손색이 없었다.
재몽타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붙잡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부지런하고도 섬세한 작업이다. 이름 없는 자를 노출시키기 위한 다큐멘터리적 시도다. 그것은 애써 논증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는 것이다. 시적 감수성과 다큐멘터리적 태도를 변증법적으로 결합하면서 각자의 얼굴이 지닌 고유한 파토스를 전면에 드러내고, 그것이 여느 영웅적 초상화와 비견될 정도로 영속화된 가치를 지니게끔 내놓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디디-위베르만의 대안적 미술사에서 사상적 기저를 이룬다.
3장에서는 민중이 공동체를 이룸을, 그리고 공동체는 나눔의 행위를 통해 결속됨을 강조한 후 다시 4장에서부터 작품론이 중심에 선다. 3장이 집단화된 민중들의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측면에 너무 집중했다고 느꼈는데, 4장부터는 다시금 실제 예술가와 작품에 주목하며 실례를 든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면서 파솔리니의 작품은 물론, 그와 연관된 선후배 감독들의 작품들까지 엄청나게 많은 고전영화가 예시로 등장하나, 영화사에 대한 나의 배경지식이 워낙 일천한지라 저자의 논의를 원형 그대로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사진, 회화, 조각은 배경지식이 부족해도 도판을 통해 대략이나마 논의를 따라갈 수 있으나, 영화는 작품 이해를 위해 최소한의 시간 투입을 전제하므로 애석한 대목이다. 어쨌든 본격적인 영화론에 앞서, 디디-위베르만은 오늘날 영화에서 민중들이 드러나는 방식이 크게 세 부류라고 말하는데(187p), 이 유형화는 현재 논하고자 하는 작품이 어디 있는지 판단하고자 할 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첫째는 민중들을 국가주의 영웅으로 다루는 작품, 둘째는 그들을 자본주의의 소비 주체로 다루는 작품, 셋째는 잃어버린 진실한 얼굴로 다루는 작품이다. 당연히 저자는 셋째 유형에 초점을 맞춰 파솔리니를 모범사례로 들며 논의를 전개한다.
파솔리니의 출발점에는 무엇이 있었고, 그것이 디디-위베르만에게 왜 중요한가? 청년 파솔리니는 볼로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의 시인으로서 정체성은 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후에도 계속 이어지지만, 그의 첫 번째 직업이 영화감독이 된 것은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의 미술사 수업에서 받은 영감이 크게 작용했다. 로베르토 롱기는 당대 미술사학자 중에서도 독특한 접근을 채택했다. 그는 시대와 사조 순으로 이어지는 거장 중심의 연대기적 미술사에서 탈피하여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이질적인 이미지를 병치하고, 거기서 드러나는 충돌과 우연성을 포착하여 새로운 통찰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설명하고 논증하기보다는 병치해서 보여주고 클로즈업하면서 변화와 지속, 그리고 물질과 형식의 변증법을 일깨웠다. 그 깨달음의 순간, 즉 ‘형상적 섬광’은 파솔리니의 가슴에 강하게 남아 짧았던 작품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가 추구했던 시적 감수성의 리얼리즘에 녹아들었다.
파솔리니에게 롱기가 전환점이 된 것처럼 디디-위베르만에게는 벤야민(Walter Benjamin)과 바르부르크(Aby Warburg)가 전환점이었다. 파솔리니가 롱기를 만난 이야기는 디디-위베르만 자신이 바르부르크를 만난 이야기와 겹쳐지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의 ‘잔존’ 개념과 <므네모시네 도감> 작업을 통해 시대착오적 이미지들의 충돌과 중층적 의미작용을 심도 있게 해석할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주옥같은 명화로부터 한낱 광고 전단에 이르기까지, 바르부르크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나름의 질서와 우연적 배치 속에 노정한 이미지들의 화학작용은 역사적 거대서사 속에서 배제된 민중들의 힘과 정신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었고, 디디-위베르만에게 새로운 정치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디디-위베르만에게 바르부르크가 그러했듯, 파솔리니가 만난 로베르토 롱기도 어두운 시대에 민중을 희망의 불씨로 소환해 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여기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이미지란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한다. 이미지란 노출되게 마련이고, 사람들의 생각을 어디론가 이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이미지란 없다. 정치에 눈 감으려 노력하는 이미지조차 반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좋은 이미지는 인류라는 운명에 엮인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적 양상과 정치적 비전을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를 자문하게 한다(64p). “제도적 장치 없이 광학적 장치가 불가능한 것처럼, 정치적 프레임 없이 미학적 프레임 역시 불가능하다(96p).” 따라서 좋은 이미지는, 그리고 좋은 해석자는 이미지의 저변에 깔린 기술적 조건과 더불어 제도적·정치적 프레임을 읽게 하고, 그로부터 현실에 개입될 수 있는 실마리를 보게 한다. 민중들의 이미지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독해는 오늘날 위기를 극복할 작은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173p).
치안과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이미지는 누군가를 타자로 분류할 수도, 동일자로 분류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본질상 이질적이기 마련인데, 이 이질성은 충돌과 분출을 함의한다. 그렇기에 위험하다. “이미지의 치안은 타자를 떼로 규정하면서 극도로 혐오하고, 동일자를 패로 조직하면서 총애한다(87p).” 우리는 이미지를 보면서, 그리고 이미지의 대상이 되면서 떼가 될 것인지, 동일자가 될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는 위치에 선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전체주의는 고유한 개인을 단일한 목적과 대의에 귀속된 일종의 원자로 치환한다. 개인은 전체주의의 경로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을 때만 이미지의 주인공이 되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떼와 패의 분기점에서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출지를 정해야 한다.
민중들은 형상을 취해야 한다(158p). 단순히 보이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이미지의 고유성이 상투어가 되지 않도록 시선에 의지를 부과해야 한다(128p). 민중들을 노출한다는 것은 “몫이 없는 자와 이름 없는 자가 온전한 정치적 주체의 위상으로 형상화되게 하는 것이다(141p).”
순수함은 지고의 가치이지만 비극의 시대에 순수함은 죄다. 쉽게 말해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 과정에서 뇌까지 순수하다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이 시대에는 의식도 의지도 없는 순수함이 아닌, 이질성과 충돌의 변증법이 빚어내는 민중들의 역동적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하는 순수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소멸의 위협과 모든 것을 무릅쓰고 나타나고자 하는 생명의 필연성 사이에서 민중들의 노출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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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민중들을 위한 예술에 대한 지향과 그 지향을 담은 자기 글의 형식이 서로 통합되는 글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줄곧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배격하고, 민중들에게 가깝게 다가가 접촉하면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쟁점화할 수 있는 이질성의 존재들로 표상하는 이미지를 옹호했다. 또 화려한 형식이나 특정 인물이 부각되는 이미지가 아닌, 시적 감수성과 다큐멘터리적 객관성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이미지를 옹호했다. 디디-위베르만이 쓴 글은 그가 옹호하는 이미지처럼 질박하고 시적이면서도 학술적 객관성으로 중무장했다. 탄탄한 이론에 기반을 두면서도 작품의 세세한 요소를 놓치지 않는 섬세한 안목과 물 흐르듯 이어지는 논평은 시적인 비평과 이론적 비평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시적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한다. 시적인 접근은 아름답고, 예측할 수 없으며, 감각적인 무언가다. 이 방식이 다큐멘터리즘 혹은 학술적 객관성과 결합할 때 강한 폭발력이 생성된다.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것을 자기 글의 형식으로서 증명했다.
저자는 논의를 위해 푸코(Michel Foucault), 벤야민, 아감벤(Giorgio Agamben) 등 많은 선배를 소환하지만, 그들 뒤에 숨지 않고 전면에 나서서 당당히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는 민중들을 지나치게 옹호하면서 신성시에 가까울 만치 정당화하는 듯한 낭만주의에서 오는 불편감이 없지 않지만, 특유의 당당함과 사고의 흐름을 타고 구불거리는 문체를 따라 설득력을 얻는다. 바쟁이 클로즈업한 얼굴에 대한 다음 표현을 보면, 우리는 이미지의 표층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새롭게 보게 되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은 비평의 역할 중 하나인,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역할을 상기한다.
“이것은 특히 이미지의 최종 포맷 덕택에 가능해지는데, 우리 앞에 있는 이 얼굴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거나 신생아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들이 통상적인 프레임을 찢어버리고, 오직 그들 육체의 밀도로부터 우리에게 불쑥 튀어나온다. 때때로 그들에게는 저부조에서와 같은 확고함, 또는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를 향해 팽팽해지고 거세지고자―폭풍우가 거세진다고 말할 때와 같이―하는 무언가에서의 확고함이 있는 것만 같다.”
– 105p
훌륭한 사유는 단순히 저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자국의 문화 전체를 역사 속에 새겨놓는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를, 혹은 그 나라를 거치며 사유했던 사상적 스승들을, 그들이 속했던 역사적 맥락을, 또 혁명의 나라라는 사상적 터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렇게 자국 역사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 터이나, 그가 그 조건 위에서 사유하기에 이 의미 부여는 필연적이다. 우리에게도 사유가 필요하다. 우리 민중들을 섬세한 눈으로, 그리고 시적인 감수성으로 바라보는 사유가 필요하다. 그들을 역사 속의 단역이 아닌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사유가 필요하다. 그들을 어둠 속의 반딧불이처럼, 쉽사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저 존재감만으로도 가슴 찡하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사유가 필요하다.
끝으로, 번역과 편집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역자 여문주는 언어유희와 시적 감수성이 흐르는 문장의 맛을 고스란히 살리려 부단히 노력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가 남긴 역자주와 참고문헌의 번역서 정보들은 저자의 사유 심층부에 도사리는 의도까지 닿게 하는 길잡이로서 손색없다. 민중들의 이미지라는 사유에서 출발점이 되었던 바르부르크의 아카이브를 표지로 두른 이 책은 외형적으로도 주제의식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의 물질성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진다. 빳빳하고 사치스러운 컬러풀 도판으로 가득한 양장본이었다면 정작 민중들은 서고 밖을 겉돌았으리라.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날개조차 없는 문고판은 이제 멸종위기종이 되었는데, 이 책은 문고판이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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