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새미의 「뮤지엄 게이트」

감상적 여행기의 한계

저자가 나름 전공한 연구자이길래 박물관학이나 큐레토리얼에 관한 연구서인 줄 알고 무턱대고 집어 든 내 잘못이다. 연구서가 아닌 여행기다. 저자 본인이 체류했던 미국, 영국, 일본 등지의 뮤지엄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으로 가득한 책이다. 감상적 여행기라는 정체성은 각 챕터의 서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뮤지엄의 대표작 한 점이 저자에게 친군하게 말을 거는 식으로 시작하는데, 우리는 이런 도입부를 흥미진진해 보이고자 애쓰는 참고서에서 주로 봐왔다. 군데군데 학술적 인용이나 역사 및 개념에 대한 간략한 배경지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감상을 뒷받침하는 수준에 그친다. 나도 한때는 이런 책을 종종 찾아 읽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감상이 나에게 주는 시사점이란 극히 제한적일뿐더러 지적으로 남는 것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철저히 멀리해 왔다.

1장부터 6장까지는 노예무역이나 원주민 추방과 같은 미국의 인권 탄압 역사가 드러나는 뮤지엄을 탐방한 내용이다. 7장의 달리(Salvador Dalí) 미술관은 전체 맥락상 딱히 맞물리는 구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저자의 개인적 관심사였던 것 같다. 8장에서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레드하우스를 다루면서 사회참여적 예술인 가정의 부조리한 젠더 권력 문제를 암시하지만, 날 선 비판적 서술은 애써 빗겨나간다. 9장과 10장에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걸작 두 점을 따라가는데, 여기서도 저자의 팬심이 드러난다. 11장에서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맥락에서 펼쳐진 새로운 공예 경향을 살짝 암시한 뒤, 12장부터 14장까지 자기 전공 영역인 공예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며 대단원을 장식한다. 여기서 저자는 가장 공력을 들여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펼쳐 놓고, 오랜 학문적 고민거리들도 풀어 놓으며, 자기만의 공예론도 소심하게나마 설파한다. 공예는 순수예술보다 저열한 무언가가 아닌, 독창적 정신세계와 실용성을 갖춘 미적 장르이며, 이것을 정의하는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과 실무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다(공예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빼먹은 공예 뮤지엄인 ‘뮤지엄 오브 아트 앤 디자인_Museum of Arts and Design(MAD)’처럼). 또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구분하는 구닥다리 같은 행정적 구분을 재검토하여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열린 플랫폼으로서 뮤지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타당하나, 나를 비롯한 T의 화신들은 한층 탄탄한 학술적 근거와 논리를 원할 것이다.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느니(210p), 현기증이 몰려와 걸을 수 없었다느니(194p) 하는 스탕달스러운 얼버무림보다는 학자로서 자기 이름을 건 명확한 판단과 주장을 듣고 싶다. 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새로운 뮤지엄 개념을 많은 사람이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기폭제로 쓰이길 바란다면, 애써 여운을 남기려는 시도보다는, 그리고 그 의미조차 불분명한 기나긴 부제의 행렬(‘인디언의 눈물, 흑인 노예의 노래, 천재 건축가의 그림자 미술관 기행’?)을 늘어놓기보다는 핵심 논점에 집중해 촘촘하게 문헌과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아름다운 논리와 문장으로 엮어내는 노력이 더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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